당나라 황제 당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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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2-03 00:59|본문
당현종의 이름은 이용기인데 당예종의 셋째 아들이다. 당현종은 3살에 초왕에 봉해졌고 장수 2년(693년) 임류왕으로 되였다.
당현종의 조모인 무측천이 죽은 후 당중종이 무능하여 대권을 황후인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가 잡았다. 위황후 일족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미리 간파한 당현종은 위황후 일당이 기원 710년에 황제 중종을 독살하려고 할 때 과단하게 궁전정변을 일으켜 위황후 일당을 일망타진했다. 그 후 당현종은 자신의 부친을 예종으로 복위시키고 태자가 되였다.
당현종은 자신의 정치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치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당예종 역시 무능한 황제여서 대권을 잡지 못했다.
대권은 당예종의 누나인 태평공주 손에 들어갔는데 당현종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태평공주와 암투를 벌였다. 두 세력 간의 투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연화원년인 712년 당예종은 태평공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당현종에게 넘겨주었다. 태평공주는 당현종을 폐위시키기 위해 그 해 7월 4일 궁전정변을 일으키려고 했다. 당현종은 선손을 써서 7월 3일 우림군을 거느리고 태평공주 일당을 제거했다.
당현종은 새 황제로 등극한 후 2년이 지나 연호를 개원으로 고치고 인재를 등용해 그들의 보좌를 받으며 밤낮으로 정사에 몰두했다. 당현종을 보좌하던 요숭은 당현종이 직접 등용해 재상자리에 앉힌 신하이다. 요숭이 내놓은 많은 새로운 조치를 당현종은 적극 채납해 나라를 다스리는 시정방침을 제정했다.
당현종은 엄격한 시험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평가하는 기준을 내놓았고 상벌을 엄하게 집행했다.
당시 당나라의 최대의 강적은 돌궐이었는데 돌궐은 자주 당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 당현종은 당나라 정권을 공고히 하고 통일을 수호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해 군사력을 높혔다.
당현종은 변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부병제에 대해 개혁을 단행했다. 당현종은 관내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군사를 징집하여 변방에 배치했다. 그는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이 군사훈련에만 몰두하게 하기 위해 모든 부역을 면제시켰다. 하여 당나라 군사력은 전례 없이 제고되었다.
당현종은 중아시아로 통한 교통로를 다시 개통해 대외 경제문화 교류를 추진했다. 마침내 당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관계가 형성되면서 아시아의 정치와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나라가 후에 세계적으로 제국이 될 수 있는 기초로 되었다.
이밖에도 당현종은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기 위해 부역을 감소시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보다 편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하여 백성들은 당현종의 덕을 기리게 되였고 나라 재정도 날이 갈수록 윤택해졌다.
당현종이 사회경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했기에 경제가 전례 없이 번영해 당현종이 즉위한 개원 년대는 당태종에 이어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기로 되였다.
그러나 개원 30년, 연호를 천보로 고친 당현종은 이때부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혼음방탕, 사치, 환락에 빠져 당나라는 위기에 직면했다.
당현종은 그칠 줄 모르는 사치와 향락 속에서 귀비 양옥환에게 빠져 조회마저도 나가기 싫어했다. 그는 양귀비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나 다 방법을 대여 해결하고야 말았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