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창시자 황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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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2-03 01:11|본문
황태극(皇太極) 은 청(淸)나라 태조(太祖)인 누루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황태극은 누르하치의 아들 중 가장 용감하고 지모가 뛰어났다. 황태극은 어려서부터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아왔다. 천부적으로 총명한 황태극은 양호한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난 재질을 갖추었다.
1626년 누르하치가 병으로 죽은 후 누르하치의 자식들은 35살인 황태극을 대한(大汗)으로 추대했다. 황태극은 제위에 오른 후 전통적인 습관을 개변하고 민족모순을 완화하며 농업과 수공업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군사 면에서 원래의 8기군 외에 한군(漢軍) 8기군을 내오고 군기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밖에도 황태극은 내삼원(內三院)과 6부(六部)의 설치 등 제도정비와 함께 군사력을 강화하여 명나라에 대항하고 청조(淸朝)의 기초를 이루었다.
황태극이 즉위 당시에는 명(明)나라와 교전상태에 있는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웠으나 1635년 내몽골 지역을 평정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새(玉璽)를 손에 넣은 것을 계기로 여진을 만주라 개칭하고 그 이듬해는 심양에서 황위에 올라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정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바꿨다.
그 때로부터 황태극은 역사상 청태종_(淸太宗)으로_ 불리웠다.
황태극은 황위에 오른 후 명나라에 대한 정벌을 다그쳤다. 명나라도 이에 맞서 황태극의 군사와 결전을 벌였다.
그 결전이 바로 송금대전(松錦大戰)이다. 요서에 위치한 금주는 당시 명나라의 관외(關外) 방어권에서 가장 견고한 요충지였다.
명나라는 금주 부근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1679년 황태극은 금주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 진공을 들이댔으나 명나라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금주를 함락하지 못하고 그저 금주 포위권을 좁히기만 했다.
1641년, 금주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지휘를 받던 몽골군이 청군에 투항하자 황태극은 청군을 인솔해 명나라 13만 대군과 격전을 벌였다. 격전에서 명나라군은 대패하고 나중에는 명나라 군을 인솔했던 장령들이 대거 청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2년 남짓이 진행되었던 송금대전이 막을 내리고 청군은 관외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였다. 그 이듬해 청태종 황태극이 병으로 심양 청녕궁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