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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책사)진의 중요성지-지록위마(指鹿爲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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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19-03-05 23:27 조회 :26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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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록위마(指鹿爲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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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는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가운데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고사로 , 진(秦)나라가  어렵게 천하를 통일하고도 왜 14년 만에 망한 이유도 동 고사성어에 함축 되어 있다.

 

'사슴(鹿)을 가리키며 말(馬)이라고 우긴다'는 뜻으로 이 고사성어는 중국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가 권력을 잡기 위한 묘책으로 고안한 술수(術數)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진시황(秦始皇)이라 부르는 시황제(始皇帝)는 전국(戰國) 7웅 중의 한 나라인 진(秦)의 왕이었다.

 

대륙의 서부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던 진나라의 임금 영정(嬴政)은 수도를 함양(咸陽)으로 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구축을 위해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도량형제와 문자, 수레 등도 통일하였다.

 야심차고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진시황은 한(韓)나라를 맨 먼저 함락시키고(B.C.230년), 이어서 조(趙), 위(魏), 초(楚), 연(燕)나라를 공격해서 차례로 정복 했다(B.C.222년).

 

비교적 강국에 속했던 제(齊)나라는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결국 진(秦)의 공격에 무너지게 되어 이로써 진(秦)나라는 역사상 최초로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B.C.221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북쪽의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진시황의 업적이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도 왜 14년 만에 망했을까 ?

 

항상 위협적인 요소는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으로 나뉘는데 외부의 위협이 있어도 내부가 단결돼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사례는 제외해야 겠지만 ,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실은 내환, 그중에서도 내분(內紛)이 결정적이다. 바로 환관의 농락이 주 원인이었다.

 진시황은 13살 되던 해에 왕위에 올랐고, 39살에는 전국의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의 황제가 되었다.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전략가이면서도 개혁가였던 진시황에게는 조고(趙高)라는 환관(宦官)이 있었다. 조고는 원래 노예의 신분이었으나 총명하고 타인의 마음을 탁월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서 환관으로 발탁되었고,  진시황은 조고에게 자신의 작은 아들인 호해(胡亥)를 가르치도록 한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조고는 정성을 다해 호해를 보살폈는데 진시황은 물론이고 왕자였던 호해에게서도 신임을 얻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러 즉위 후 5번 째 지방 순시를 나갔다가 공교롭게도 갑자기 지금의 산동성 덕주(德州)를 지나던 중에 중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황제는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꿈꾸었기에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전혀 계획에도 없었는데 갑자기 중병을 앓게되니 허둥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과도한 법치주의나 엄격한 군현제(郡縣制)에서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 진단이라 하기 어렵다. 위대한 성공(정복)이 부른 이 교만함이야말로 진나라의 급작스런 멸망을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당장 태자를 세우는 일이 급선무 였는데 황제는 유서에서 장자였던 부소(扶蘇)에게 왕위를 상속한다는 조서(诏書)를 작성하여 조고에게 궁궐로 보내라고 명령하고는 운명한다.

 

당시 황제의 나이 50세 였고, 연도로는 기원 전 210년이었다.

 조고는 장남이었던 부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소가 황제로 즉위 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 질 것을 염려하여 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우매하고 무능한 호해를 황제에 앉히려는 계략을 꾸몄다.

 황제가 죽기 전에 궁전으로 보내라고 했던 조서를 없애버리고 대신 가짜 조서를 작성해서 함양으로 보낸다.

 장남인 부소와 후견인이었던 몽염(蒙恬)에게 역모(逆謀)의 죄를 범했으니 황제가 함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결(自決)하라는 것이 조서의 내용이었다.

 

조서를 받은 부소와 몽염은 조고가 위조해서 보낸 글을 황제의 뜻으로 알고 억울해 하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이 뜻대로 돌아가자 조고는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이 호해의 뒤에서 섭정(攝政)을 하기 시작하였다.

 조고의 국정 농단(壟斷)으로 조정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승상이었던 이사(李斯)는 황제에게 진언코저 하였으나 조고의 모함으로 사형을 당했고, 자연스럽게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던 중 조고가 자기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한가지 꾀를 냈다.

 어느 날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며 조고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이에 대해 2세 황제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어찌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오?”라고 반문 하였다.

 그러자 승상 조고는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며 “이것이 말이냐, 사슴이냐?”고 물었다. 

조고를 두려워한 상당수 신하들은 말이라고 동조했으며, 잠자코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는 사슴이라고 부정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였다가 후에  죄를 씌워 모두 죽였다. 그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이후로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할 때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이 고사가 인용된다. 

 그후 조정이 조고의 농단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수도 함양성 밖에서는 항우와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을 해왔고 호해는 전력을 다해 대항하였으나 이미 부패한 황실의 군사들은 의욕을 잃었던지라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결국 승상인 조고의 반란으로 호해 황제는 자결을 택했으니 그의 나이 고작 23세 였다.

 이 와중에도 조고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위해 옥새를 가지고 대전(大殿)에 올라 군신들을 소집했으나 한명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환관이 황제가 되려고 하자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일임을 알고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은 것이다.

 조고가 이루려던 허황된 황제의 꿈은 무참하게 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조고는 호해의 조카이자 부소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새로운 황제로 세운다.

 그러니까 자영은 진시황의 직계 손자로서 적통(嫡統)의 대를 이어 간다는 상례에 따라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사리판단이 명확하였기에 조고를 매우 증오했다.

 자영은 자신에게 찾아온 승상 조고를 장검(長劍)으로 찔러 사살한다.

 그러나 이미 진(秦) 황실의 기운은 기울어진 후였다.

 자영은 겨우 46일 동안 황제의 자리에 머문 후 한(漢)나라의 고조가 된 유방(劉邦)에게 항복(B.C.207년)함으로써 진(秦) 황실은 3대 14년 만에 문을 닫았다.

 외부의 적을 막기위해 쌓았던 그 엄청난 만리장성도 내부 자체에서 곪아버린 상처(내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천하의 진시황이 세운 거대한 통일 제국이 조고라는 환관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망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시 '인재의 발탁과 등용'과  '참모(책사)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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