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번왕국 창건자 송찬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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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2-03 01:02|본문
송찬간포의 출생지는 지금의 티베트자치구 산남지구이다. 기원 629년 좌우 송찬간포의 아버지 낭일윤찬이 청장고원을 통일했다. 통일 후 토번은 한 씨족으로부터 왕국으로 되었다.
송찬간포는 국왕의 외동아들로 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0살 후부터 송찬간포는 무예가 출중해 널리 알려졌다. 송찬간포는 말 타기, 활쏘기, 격검 등 여러 가지 무예를 정통했다. 송찬간포는 무예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높은 문학자질을 갖추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토번의 유구한 역사를 기재한 "찬보세계"를 전부 낭송할 수 있었다. 그는 시 창작에서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의 시는 현존하고 있는 토번 문학작품의 걸작으로 되었다.
송찬간포가 13살 나던 해에 토번 왕국은 뜻밖에 들이닥친 재난을 입었다. 한차례 연회에서 송찬간포 아버지가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으로 하여 대신들이 배반을 꾀하고 귀족들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기원 629년 송찬간포는 찬보에 즉위한 후 수도를 지금의 라싸로 옮기고 과단한 조치를 취해 내란을 평정한 후 대신 녹동찬의 협조 하에 노예주 통치의 토번왕국을 세웠다.
나젊은 송찬간포는 토번의 귀족생활에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는 당 왕조의 선진적 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당태종 역시 토번왕국의 명성을 들어왔으므로 그들과 친선관계를 맺는데 동의했으며 또 답례 방문으로 토번에 사절을 보냈다.
2년 후 숭찬간보는 다시 장안에 사절을 보내 당 왕조에 청혼했다. 당태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노한 송찬간포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투위훈을 격파한 후 승승장구로 당나라 경내의 송주, 지금의 사천성 송반을 진공해 크게 승리했다. 송찬간보는 "만약 공주를 나한테 시집보내지 않으면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 들어가겠다"고 당 왕조를 위협했다.
이에 성이 난 당태종은 대잔 후군집더러 대군을 인솔하여 토번에 반격을 가하게 했다. 토번의 군사들도 송찬간포가 당 왕조와의 전쟁을 발동한데 대해 원래부터 달갑게 여기지 않던 차에 당 왕조가 대군을 파견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철퇴하자고 요구해 나섰다. 계속 싸우다간 참패를 당할게 뻔했으므로 송찬간포는 당 왕조에 화의할 것을 요구했다. 당태종도 본시 토번과 친선관계를 맺으려 했으므로 강화에 동의했다.
기원 640년에 송찬간포는 또다시 유능한 사신을 파견해 장안에 가서 청혼하게 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송찬간포가 파견한 대신 녹동찬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후의 일이지만 청장고원의 백성들 속에 "오난구혼사"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이야기가 이러하다. 녹동찬이 장안에서 청혼할 때 당나라 주변 나라에서 청혼하러 온 사절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태종은 청혼하러 온 사절들에게 다섯 가지 문제를 내놓으면서 이 문제를 정확히 대답하는 사절이여야 청혼을 허락하겠다고 령을 내렸다.
첫째 문제는 한 오리의 가는 명주실을 야광주의 아홉 굽이 구멍에 꿰라는 것이다. 녹동찬은 명주실을 개미허리에 맸다. 개미는 명주실을 끌고 야광주 구멍으로 들어가 아홉 굽이를 기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