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 속에 서민들의 대중음식으로 자리잡은 수제비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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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2-01 18:45|본문
우리의 생활 속에 서민들의 대중음식으로 자리잡은 수제비에 얽힌 이야기
수제비는 원래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음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제비는 본래의 표기가 "수접(手摺)"이었습니다.
(手:손 수, 摺:접을 접)
즉, 손으로 접는다는 뜻입니다.
수접(手摺)에 접미사 "~이"가 붙어서 "수접이"로 불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수제비"로 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제비가 일반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말 쯤으로 보여집니다.
조선시대에는 수제비를 운두병(雲頭餠)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끓는 국물에 반죽을 뜯어넣고 끓이면 익은 후에 수제비가 둥둥 뜬 모양이 마치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듯한 형상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중국 한나라 말기의 학자였던 "유희"가 지은 <석명>이란 책에 "탕병(湯餠)"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시기에 수제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약 1,800여 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음식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지금은 수제비가 서민들의 한끼 식사나 새참 등의 용도로 인기를 끄는 대중음식이지만 예전에는 잔치나 큰 행사가 있던 날에나 구경할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옛 문헌에 오롯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가 1459년에 편찬한 '산가요록'에는 수제비를 "나화(刺花)" 또는 "수라화(水刺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금이 드시던 밥상을 높여서 부를 때 "수라상(水刺床)"이라고 했던 것을 유추하면 수제비가 임금님 밥상에서도 "꽃(花)"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에는 한글로 "수저비"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1527년 '훈몽자회'에 수제비의 옛말인 "나화(刺花)"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귀한 대접을 받던 수제비가 서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대중음식으로 등장한 것은 아무래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을 통해 밀가루가 대량으로 반입되기 시작한 후부터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이전에는 밀가루를 구하기도 어렵고 비쌌던 탓에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이 수제비는 지방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는 뜨덕국, 뜨데기로 불렸으며 전라도에서는 띠연국, 떠던국으로, 경북 북부 산간지방에서는 다부렁국, 벙으래기로, 경남지방은 밀제비, 수지비, 밀까리장국으로 불렸고 통영지방에서는 군둥집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저배기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고 전합니다.
근래에는 수제비를 "던지기탕"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을 들었는데 알고보니 이는 북한에서 사용되는 방언이었습니다.
황금손에게도 수제비는 서글픈 추억을 간직한 음식입니다.
1968년도 남부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벼농사를 거의 망치다시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관개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천수답은 하늘만 바라보다가 모내기를 하지 못하고 7월 하순 쯤에 논에다 벼 대신 메밀을 파종했었습니다.
메밀은 몽골이나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인 식물인데 그 지역의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특성처럼 가뭄을 잘 견뎌내는 작물입니다.
그 해 가을에는 벼 대신 메밀을 많이 수확했었습니다.
메밀을 가정의 절구통에서 빻은 후 체로 친 다음 반죽을 하여 수제비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메밀은 쌀이나 밀가루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높고, 성인병을 유발하는 글루텐이 없어서 건강에는 더없이 좋은 식품이지만 점성이 부족한 까닭에 식감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철없던 황금손은 매일 메밀수제비를 준다며 부모님께 짜증을 낸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메밀수제비가 최고의 건강식이었는데 말입니다.
쌀이 귀하던 시절의 서글픈 추억이 새롭습니다.
글.제공/ 해죽순 배대열 대표
정리/[중국망] 이종숙 기자 sendak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