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滿, Man)족의 발상지 우라가(烏拉街, Wulaj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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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4-25 09:05|본문
만(滿, Man)족의 발상지 우라가(烏拉街, Wulajie)는 우라국의 도읍이었다. 그로 인해 우라가는 길림(吉林, Jilin)성 제이의 도시 길림시에 비해서도 더 높은 지위를 확보하면서 "큰 우라가, 작은 길림시", "우라가 먼저 있었고 길림이 그 뒤에 형성되었다"는 설을 만든다.
만(滿, Man)족의 발상지 우라가(烏拉街, Wulajie)는 우라국의 도읍이었다. 그로 인해 우라가는 길림(吉林, Jilin)성 제이의 도시 길림시에 비해서도 더 높은 지위를 확보하면서 "큰 우라가, 작은 길림시", "우라가 먼저 있었고 길림이 그 뒤에 형성되었다"는 설을 만든다.
길림시와 약 30km 떨어진 우라가는 송화강(松花江) 상류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용담산(龍潭山)을 마주하고 북쪽으로 봉황각(鳳凰閣)을 끼며 서쪽으로 송화강의 손을 잡고 동쪽으로 장백산(長白山) 지맥에 기댄 우라가는 좋은 풍수를 자랑한다.
만족어인 우라는 강가라는 의미이다. 사오백년전의 명(明)조때에 소수민족관리를 위해 이 곳에 우라위(衛)를 두었다. 그 뒤에 우라의 여진족들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부근의 여진족동네를 합쳐 우라국을 설립하고 우라에 도읍을 정했다.
건주(建州)의 여진족 두령 누르하치가 수차 우라국과 싸우다가 1613년에 우라국을 멸하고 우라에서 여진족의 힘을 키워 남진해 천하를 얻고 청(淸)나라를 세웠다. 그 때문에 청나라 순치(順治)황제는 베이징(北京)에 청나라의 도읍을 정한 뒤 우라가를 청나라 발원의 성지로 정했다. 그로부터 장백산 기슭, 송화강가의 우라가는 오늘날까지 장엄함과 신비함을 보여준다.
절 8개와 사당 4개, 저택 3채, 거리 1개 등 유구한 역사의 고건물을 보유했던 우라가에는 오늘날 괴부(魁府)와 살부(薩府), 백화점장대(白花点將台) 등 유적만 남아 있다. 뜰 두 개를 가진 사합원(四合院)식 건물인 괴부는 완정하게 보존된 청조의 건물이고 지역의 행정사무를 관리하던 총관아문(總管衙門)은 청나라 공물기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밖에 우라가에는 1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라옛성도 있다. 외성(外城)과 중성(中城), 내성(內城) 등 세 겹의 성 중 제일 바깥쪽의 외성은 다 허물어지고 가운데의 중성은 터만 남아 있으며 제일 안쪽의 내성은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다. 흙으로 쌓은 단위에 설치된 백화점장대는 삼소전(三宵殿)과 점장대 하부의 원통루(圓通樓), 그 곁의 낙현정(樂賢亭)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백화공주의 전설이 얼룩진 역사에 아름다운 색채를 더해준다.
짙은 민족적 색채를 자랑하는 우라가의 풍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샤머니즘의식과 혼례식이다. 무당을 뜻하는 샤머니즘은 밍크를 신앙하는 중국 북방 제반 민족의 원시적인 종교이다. 만족의 결혼식은 아주 특이하다. 결혼식에 며칠 앞서 신부측은 신부의 옷과 용품들을 신랑측에 가져가고 신부의 물건을 받은 이튿날 신랑은 신부집에 인사를 드리러 온다.
계절을 막론하고 솜옷을 입은 신부가 시집문앞에 도착하면 신랑은 길함을나타내기 위해 신부가 타고 온 가마를 향해 활 세 발을 쏜다. 이밖에 만족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만족의 음식 또한 아주 특이하다. 만족식 전골과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고 하는 잔치상, 떡, 커다랗게 부친 전, 옥수수죽, 단 호빵 등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 오늘날 우라가에는 날아갈듯한 처마의 건물과 황궁은 없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송화강가에서 옛성과 세월의 흔적이 역역한 터를 통해 어젯날 역사의 견증자로 남아있다.
길림(吉林, Jilin)성 길림시에 위치한 우라가는 교통이 편리하다. 길림시 열차역부근의 버스 터미널에서 우라가행 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우라가에 이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