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마을을 찾아서 (10) 사오씽(紹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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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10-03 09:42|본문
영웅들이 호탕하게 마셨던 술, 黃酒의 산지
왕희지 절세의 걸작 '난정서' 탄생
지금도 소흥에 가면 시엔헝주점(咸亨酒店)이 있다. 젊은 날 루쉰(魯迅)이 가끔 찾았던 잔술집이다. 소흥을 찾을 때마다 나도 그곳에서 한 사발 그득하게 나오는 황주(黃酒-소흥주)를 앞에 놓고 분위기를 잡아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아주 유명한 숙식업소로 발전했지만 황주를 사발에 담아 잔술로 파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소흥은 20세기 중국문학의 거장 루쉰의 고향이자 소흥주의 산지로도 이름이 높다.
계몽문학가인 루쉰의 작품을 '화변문학(花邊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그의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연재소설 가장자리를 꽃그림으로 장식한데서 온 이름이다. 어찌 보면 상업소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매문(賣文)을 꾸짖고 그의 이름을 폄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어릴 적 공부했던 그의 가숙(家塾) '삼매서옥(三昧書屋)'과 시엔헝주점이 지척에 있어 당대의 지성들이 한 잔 술로 교류를 하던 모습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진다. 그가 나고 자란 생가 곁에는 기념관이 들어서고 수년 전에는 기념관 앞 자동차가 다니던 도로까지 자동차를 못 다니게 하고 보행가로 바꾸었다. 기념관에 보관된 그의 펜글씨를 보면 난필인 글씨가 부끄러워 손을 자꾸만 뒤로 숨기게 되고, 수많은 저작들을 보면 일천한 독서량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도록 부끄럽다.
소흥주는 그 역사가 수천 년도 더 되어 중국을 대표하는 여덟 가지 술 가운데 하나다. 찹쌀을 발효시켜 만드는데 여아홍(女兒紅)이라고도 한다. 집안에 딸이 태어나면 새로 담근 이 술을 땅속이나 담장 안에 보관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딸이 시집 갈 때 꺼내어 사용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이렇게 빚어진 술은 딸과 운명을 같이하여 만일 시집가기 전에 딸이 불의의 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술은 영원히 담장 속에 묻히고 만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도읍지였던 소흥의 원래 이름은 월주(越州)였다. 20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유구한 역사가 흐르고 있는 정말 오래된 도시다. 남송의 소흥원년에 설치한 요양시설로 인해서 작은 구역부터 소흥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점차 지금의 소흥시 전체 이름으로 변해왔다.
강남 수향의 대표적 도시가 바로 소흥이다. 그런 만큼 도시전체가 수로로 이어져 있는 진정한 물의 도시로 일찍이 크고 작은 운하가 발달하였다. 운하를 오르내리는 작은 배를 오봉선(烏蓬船)이라고 부르는데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여 노를 젓는 소흥만의 전통적이고도 특이한 배를 가리킨다. 지금은 수로들이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로 뒤로 물러나 앉아 마실 다니는 오봉선을 만날 수는 없지만 동호(東湖)라는 작은 호수에 가면 그나마 관광용으로 타 볼 수는 있겠다. 시내를 벗어나면 왕희지가 술에 취한 채 붓을 들어 쓴, 훗날 당 태종이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절세의 걸작 난정서(蘭亭序)가 탄생한 난정이 있다. 산동성에서 태어난 왕희지는 40대의 장년이 되어 소흥지방의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왕희지는 난정에 있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여한다. 유상곡수라하면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운다는 말이니 경주의 포석정과 비슷한 뜻이겠다.
41명의 지방 문사가 모여 술 한 잔에 시 한수라. 이렇게 모인 시를 책으로 묶고 서문을 쓴 것이 바로 난정서이다. 당나라 태종이 그의 글씨를 지극히 사랑하여 당대의 서예가들로 하여금 난정서를 베껴 쓰게 하고 원문은 황제가 죽어 무덤에 들어 갈 때 가지고 갔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모작들로 그중 유명한 8가지를 난정팔주(八柱)라 일컫는다. 남방의 작은 도시 소흥에서 매년 음력 3월 1일 '서예절'을 개최하는 것도 서성(書聖)의 걸작이 태어난 지방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