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의 아시아 문화 기행] 허난성 숭산 소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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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8-15 09:03|본문
◇중국 숭산 오유봉 능선에 세워진 달마좌상.
소림고수 기대했던 무림지존… 값싼 상혼과 관광객들만 붐벼
강호(江湖). 무협지에나 등장하는 이 단어는 여행을 할수록 실감나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여행은 어떤 면에서 진짜 무협지 세계와도 같다. 횡단보도를 무시한 채, 파란불이건 빨간불이건 액셀러레이터밖에 밟을 줄 모르는 중국의 운전사들은 무협지속 표창처럼 도로를 날아다닌다.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여행자는 어느새 경공술의 고수가 되어, 허공답보의 비술로 도로를 건너다닌다.
진정 중국이 무림이라고 느꼈던 결정적인 계기는, 사고현장에서였다. 자전거는 건널목에 있었고, 차는 여전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결과는 박살 난 자전거와 피 흘리며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자전거 주인. 루쉰의 소설 약(藥)에 나오는 사형장의 풍경과도 같이, 모든 행인에게 이 광경은 그저 구경거리였다. 심지어 낄낄거리는 사람마저 있었고, 5분쯤 쓰러져 있던 그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고는 박살 난 자전거를 질질 끌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시 중국 여행 초보였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 정말 이곳에서는 스스로, 잘,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갑자기 이른 아침 공원 곳곳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중국인들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갈고 닦는 사람으로 보였다. 앞서 말한 경공술은 기본, 줄을 결코 서지 않기 위해 보법(步法)을 익혀 새치기를 하고, 코딱지를 파 탄지신통(彈指神通)을 펼쳤고, 합마공(蛤魔功)으로 배를 부풀려 목구멍에 기를 모은 후 가래를 마구 뱉어냈다.
강호(江湖). 무협지에나 등장하는 이 단어는 여행을 할수록 실감나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여행은 어떤 면에서 진짜 무협지 세계와도 같다. 횡단보도를 무시한 채, 파란불이건 빨간불이건 액셀러레이터밖에 밟을 줄 모르는 중국의 운전사들은 무협지속 표창처럼 도로를 날아다닌다.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여행자는 어느새 경공술의 고수가 되어, 허공답보의 비술로 도로를 건너다닌다.
진정 중국이 무림이라고 느꼈던 결정적인 계기는, 사고현장에서였다. 자전거는 건널목에 있었고, 차는 여전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결과는 박살 난 자전거와 피 흘리며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자전거 주인. 루쉰의 소설 약(藥)에 나오는 사형장의 풍경과도 같이, 모든 행인에게 이 광경은 그저 구경거리였다. 심지어 낄낄거리는 사람마저 있었고, 5분쯤 쓰러져 있던 그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고는 박살 난 자전거를 질질 끌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시 중국 여행 초보였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 정말 이곳에서는 스스로, 잘,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갑자기 이른 아침 공원 곳곳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중국인들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갈고 닦는 사람으로 보였다. 앞서 말한 경공술은 기본, 줄을 결코 서지 않기 위해 보법(步法)을 익혀 새치기를 하고, 코딱지를 파 탄지신통(彈指神通)을 펼쳤고, 합마공(蛤魔功)으로 배를 부풀려 목구멍에 기를 모은 후 가래를 마구 뱉어냈다.
소림사나 가 볼까? 중국이 무림, 달인의 세계였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불현듯 소림사가 가고 싶어졌다.
깊은 산속, 심산유곡에 있을 것 같았던 무림의 지존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당나라 시절 낙양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도 뤄양(落陽)에서 60㎞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숭산 소림사의 시작은 495년이지만, 소림사가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527년 한 인도인의 방문 때문이다. 남인도 깐치뿌람(Kanchipuram) 출신인 그의 중국행은 당시 중국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황제는 불교 교단에 엄청난 시주를 행하던 사람이었다. 황제는 불교의 본고장에서 온 그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공덕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했다. 없습니다(無)! 이 일로 인도인은 황제를 피해 소림사까지 흘러들어와 9년간 벽을 보고 수행한다. 그 인도인의 이름이 바로 달마. 선불교의 초조(初祖)이자, 소림무술의 창시자다. 하지만 소림사의 역사는 선불교의 향기보다는 피 냄새가 더 진동했다. 특히 당나라 성립기, 후일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의 사병 구실을 해내며 절 자체가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다. 임금에게 가지도 말라던 부다의 가르침은, 황실을 호위하고 민중을 탄압하는 종교권력이 되어버린 셈이다. 무협지를 보다 보면 소위 명문 정파라고 불리는 조직, 이를테면 소림사나 무당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악당이라는 설정이 자주 나오는데, 일정 부분 역사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깊은 산속, 심산유곡에 있을 것 같았던 무림의 지존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당나라 시절 낙양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도 뤄양(落陽)에서 60㎞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숭산 소림사의 시작은 495년이지만, 소림사가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527년 한 인도인의 방문 때문이다. 남인도 깐치뿌람(Kanchipuram) 출신인 그의 중국행은 당시 중국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황제는 불교 교단에 엄청난 시주를 행하던 사람이었다. 황제는 불교의 본고장에서 온 그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공덕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했다. 없습니다(無)! 이 일로 인도인은 황제를 피해 소림사까지 흘러들어와 9년간 벽을 보고 수행한다. 그 인도인의 이름이 바로 달마. 선불교의 초조(初祖)이자, 소림무술의 창시자다. 하지만 소림사의 역사는 선불교의 향기보다는 피 냄새가 더 진동했다. 특히 당나라 성립기, 후일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의 사병 구실을 해내며 절 자체가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다. 임금에게 가지도 말라던 부다의 가르침은, 황실을 호위하고 민중을 탄압하는 종교권력이 되어버린 셈이다. 무협지를 보다 보면 소위 명문 정파라고 불리는 조직, 이를테면 소림사나 무당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악당이라는 설정이 자주 나오는데, 일정 부분 역사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건 소림사는 오늘날까지도 거대했다. 평일이었지만 관광 버스는 단체 여행객들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사원 입구부터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소림사 무술 쇼를 공연하는 소림사 직영의 극장이었다. 의외로 순진했던 나는 큰 기대를 하고 쇼를 봤지만 역시나 쇼 곱하기 쇼는 쇼일 뿐, 할리우드 특수효과에 눈높이가 맞춰진 탓인지 솔직히 시시했다. 소림사의 핵심구역인 대웅전과 108나한당, 고승들의 사리탑이 장엄하게 펼쳐진 탑림까지 봤지만, 첫사랑만큼 설레게 하는 소림사는 다가오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시끄러운데 고수들이 수행을 할 수나 있겠어?
인파에 밀려 9년 면벽을 한 달마의 그림자가 스며있다는 면벽영석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술 수행 탓에 바닥이 움푹 꺼졌다는 천불전의 바닥도 스치듯 지나쳤을 뿐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소림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설정으로 향했다. 어느 겨울날, 9년 면벽을 하던 달마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장수였다. 적군만 만나면 쳐부술 수 있었던 명장은 마음 한구석의 불안함만큼은 무찌르지 못했다. 그는 황제의 면전에서 바른말을 하고 은거한다는 인도 승려라면 그의 불안함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달마를 찾아온 것이다.
달마는 너를 불안하게 하는 그 마음을 꺼내라 했고, 장수는 그 마음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없습니다(無)! 고개를 돌린 달마. 후일 선불교의 이조(二朝)가 되는 혜가의 깨달음. 입설정은 바로 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단체 관광객들은 산 아래 소림사만 덜렁 본 채, 부리나케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찾는 이 없는 이 쓸쓸한 작은 정자에서 두 번의 ‘없을 무’(無)라는 말로 선불교가 탄생했다. 모두가 잊어버린 사실. 산 아래 관광객도, 인파에 떠밀려와 새삼스레 선불교의 탄생지를 생각해내는 나조차도….
달마는 수행만 하다 보면 몸이 약해질 것을 막기 위해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소림사에서 무술은 수행을 위한 방편이었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언제나 목적보다는 방편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방편에 집착하다 타락하고, 변해가고, 원래 생각했던 목적을 잊어버린다. 누구도 ‘소림사=무술’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림사는 그를 있게 했던 달마, 그리고 선불교와 결별하고 있었다. 입설정에서 때 아닌 화두를 잡고 생각을 따라가는 사이, 어느새 1600년 전의 그날 밤처럼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해의 첫눈이었다.
하긴… 이렇게 시끄러운데 고수들이 수행을 할 수나 있겠어?
인파에 밀려 9년 면벽을 한 달마의 그림자가 스며있다는 면벽영석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술 수행 탓에 바닥이 움푹 꺼졌다는 천불전의 바닥도 스치듯 지나쳤을 뿐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소림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설정으로 향했다. 어느 겨울날, 9년 면벽을 하던 달마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장수였다. 적군만 만나면 쳐부술 수 있었던 명장은 마음 한구석의 불안함만큼은 무찌르지 못했다. 그는 황제의 면전에서 바른말을 하고 은거한다는 인도 승려라면 그의 불안함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달마를 찾아온 것이다.
달마는 너를 불안하게 하는 그 마음을 꺼내라 했고, 장수는 그 마음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없습니다(無)! 고개를 돌린 달마. 후일 선불교의 이조(二朝)가 되는 혜가의 깨달음. 입설정은 바로 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단체 관광객들은 산 아래 소림사만 덜렁 본 채, 부리나케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찾는 이 없는 이 쓸쓸한 작은 정자에서 두 번의 ‘없을 무’(無)라는 말로 선불교가 탄생했다. 모두가 잊어버린 사실. 산 아래 관광객도, 인파에 떠밀려와 새삼스레 선불교의 탄생지를 생각해내는 나조차도….
달마는 수행만 하다 보면 몸이 약해질 것을 막기 위해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소림사에서 무술은 수행을 위한 방편이었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언제나 목적보다는 방편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방편에 집착하다 타락하고, 변해가고, 원래 생각했던 목적을 잊어버린다. 누구도 ‘소림사=무술’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림사는 그를 있게 했던 달마, 그리고 선불교와 결별하고 있었다. 입설정에서 때 아닌 화두를 잡고 생각을 따라가는 사이, 어느새 1600년 전의 그날 밤처럼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해의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