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불상 출토 닝보 천봉탑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0-04-21 13:04|본문
불교에서는 탑(塔), 혹은 탑파(塔婆)를 석가모니 부처의 무덤으로 간주한다. 무덤이라면 시신이 있기 마련인데 부처가 입멸하면서 다비식을 거 수습한 유골인 사리(舍利)를 그 시신으로 본다. 한국 불교 탑파에서 사리 혹은 그것을 감싼 각종 장식품인 사리장엄구는 대체로 기단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다 안치한다. 심초석 한쪽(통상 중앙)에다가 사리공(舍利孔)이라는 구멍을 파고는 그 안에다가 사리를 안치하고, 사리공 내부, 혹은 심초석 주변에다가 다른 공양품들을 묻는다. 하지만 중국 불교에서는 우리의 심초석, 혹은 사리공 대신 아예 기단 아래에다가 거대한 지하창고를 마련하고, 그 안에다가 사리를 비롯한 각종 공양품을 쌓아 놓는다. 이런 지하창고를 중국에서는 지하궁전이라는 의미로 '지궁'(地宮)이라 부른다.
최응천 동국대박물관장이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시(寧波市)박물관 상설전시품에서 확인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은 닝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천봉탑(天封塔)이라는 불교 탑파의 지궁에서 1982년 6월 출토된 것이다. 당시 닝보시고고연구소는 그 전해 12월에 닝보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이 탑의 훼손이 심각하다는 판단에 따라 수리에 앞서 지궁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곳에서는 은(銀)으로 제작한 불전(佛殿.불교건축물), 은으로 만든 탑 등을 포함한 140여점의 각종 사리공양품을 수습했다. 이 공양품 중에 바로 통일신라시대 불상 1기가 포함돼 있었던 것이며, 닝보 시내 천일각(天一閣)이란 유서 깊은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최근 보존처리를 거쳐 지난 1월 개관한 닝보시박물관에 전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보는 천봉탑은 1989년 12월에 다른 송(宋)나라 시대 탑을 참조해 수리한 것이다. 높이 51m에 이르는 규모가 아주 큰 전탑(벽돌탑)으로,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 형태는 육각형이며, 언뜻 7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14층 탑이다. 닝보의 지방지인 '은현통지'는 이 탑에 대해 "당나라 무후(武後) 시대인 천책만세(天冊萬歲)와 만세등봉(萬歲登封) 시기(695-696)에 처음 세운 까닭에 천봉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적고있다. 천책만세와 만세등봉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인 무즉천(무후)이 그의 재위 시대에 사용한 연호(年號)들이다. '천봉'이란 명칭은 이 두 연호에서 한 글자씩을 딴 것이라는 설명이다. 당시 이 탑이 들어선 사찰은 '천봉탑원'(天封塔院)이라 불리다가 나중에 황제에게서 '천봉사'(天封寺)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다만 이 천봉탑이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통일하기 전인 오대십국 시대를 구성하는 왕조 중 하나인 후한(後漢) 시대 건우(乾祐) 3년(950)에 창건, 혹은 대대적인 수리가 이뤄졌음은 분명하다. 이후 이 탑은 남송 건염(建炎) 3년(1129) 금나라의 침입 때 파괴되었고, 소흥(紹興) 14년(1144)에 이르러 중건됐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1982년 지궁 조사에서 수습한 일부 유물에 이 시대 제작된 공양품이 확인된 점에서 확인된다. 그러다가 가정(嘉定) 13년(1220)에 다시 훼손됐다가 원나라 태정(泰定) 3년(1326)에 이르러 다시 파괴되고 지순(至順) 원년(1330)에 이르러 재차 수복됐으며 이 무렵에 방국진(方國珍) 형제가 대대적으로 중창(重創)했다.
하지만 명나라 영락(永樂) 10년(1412)에 이르러 벼락을 맞아 3층이 붕괴하자 같은 해에 수리했으며, 가정(嘉靖) 36년(1557)에는 태풍에 탑 꼭대기가 무너져 2년 뒤에 중수(重修)한 일도 있다. 이어 청나라 순치(順治) 17년(1660)에 크게 고쳤다가 건륭(乾隆) 16년(1751) 8월에 다시금 태풍에 탑 꼭대기가 무너지니, 건륭 21년(1756)에 다시 중수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이 가경(嘉慶) 3년(1798) 12월에 이르러 막 보수를 완료할 즈음해 탑등(塔燈)에서 옮겨 붙은 불로 사찰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고, 탑 또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 탑은 1935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