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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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2-24 17:15|본문
용 정
총면적은 2590㎢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용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하여 첫 마을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용정의 시초라 할것이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 또한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용정은 일제의 마수가 제일 먼저 뻗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일제는 <조선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이곳에 군경을 파견하여 <조선통감간도파출소>를 세웠다.
이 기구는 나중에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바뀌였다. 후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 민족의식도 싹트고 따라서 애국심도 들끓게 되였다.
그러다 끝내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에는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3.13만세운동>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깊은 사건이였다.이후로 용정은 우리 민족의 얼은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 되였다.
연길시에서 버스를 타면 약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연길못지 않게 우리 나라 역사와 연관이 있는 용정시가 있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용정은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입니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전국에서 제일 큰 과수농장이 있으며 잎담배와 사과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용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이들의 깊은 서로움이 느껴지는듯하다.
용정중학교
용정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가 있다. 그 학교에는 여전히 조선족들이 다니고 있고 교사(校舍,쑈써)앞에 윤동주 기녑비도 있다. 이학교는 용정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러보는 곳 중의 하나이다.
용두레우물
모아산기슭의 해란강반에 자리잡은 용정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아담한 도시이다.
무릇 용정에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시내 중심에 있는 용정지명기원지에 와서 돌아보고 흔상하면서 한차례 관광을 한다. 이곳에는 우아하게 하늘높이 치솟은 수양버들 한그루가 서 있다. 바람에 나붓기는 휘늘어진 푸른 가지가 내왕하는 관광객들을 정겹게 부르고 있다.
수양버들옆에는 환장 남짓한 높이의 돌비석이 세워져있는데 비석의 정면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용정지명이 기원된 우물"(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고 비석의 아래쪽에 잇는 우물어귀를 돌로 둘러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용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다.
우물은 마치 하나의 거울처럼 흘러간 력사의 찬란한 빛발을 반사하고 있다. 때는 1879년 전후, 조선족농민 장인석과 박윤언 두 가정이 륙도구(지금의 용정)에 이사와 황무지를 일구고 곡식을 심다가 문득 이 오랜 우물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푸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부근의 한족농민들과 함께 이곳에 드레박받침대를 세웠는데 조선족들은 이를 용드레우물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륙도구를 용정촌이라 부르게 되였다.
1934년에 지명기원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우물을 다시 수건하고 주위에 기둥을 세우고 우물둘레에 철관을 씌웠으며 돌비석을 세우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