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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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2-24 15:33|본문
초기의 교육상황은 주로 전통적인 서당교육을 통하여 초등수준의 교육을 실시했으나, 점차 근대적인 성격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통치권에 들어가자, 1906년 이상설이 룽징에 서전서숙을 세웠으며, 이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반일 민족교육기관이 계속 설립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항일유격정부인 노동민주정부가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발표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하기도 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1950년대에는 초·중등교육의 확대보급, 단일민족학교 설립, 교원양성과 교과서편찬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65년 소학교는 1,274개교, 중학교 278개교, 중등전문학교 5개교, 대학 3개교로 확대되었다.
1966년 이후 10년에 걸친 문화혁명은 연변지역의 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각종의 민족학교들이 해산되어 조선인의 취학률이 80%에서 30%로 감소했으며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연변 지역에 제공되던 교육재정보조가 취소되는 등 교육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1982년 9월 자치주 교육국에서 '연변교육 30년'을 발표하여 민족 교육을 재건하려는 방침을 제시했다. 초등교육 부문에서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단일민족학교 운영을 재개하면서, 조선어교육을 강화했고, 초등교육확대정책이 실시되었다.
중등교육 부문에서는 사범교육이 확대되었고, 위생학교·경찰학교·예술학교 등 다양한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고등교육 부문에서는 학교 규모의 확대와 전공학과를 증설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본과생 중심의 교육에서 연구생·본과생·전과생의 3단계 교육으로 변화되었다.
1991년 현재 소학교는 78개교, 중학교는 72개교, 중등전문학교 9개교, 그리구 종합대학교 하나가 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통치권에 들어가자, 1906년 이상설이 룽징에 서전서숙을 세웠으며, 이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반일 민족교육기관이 계속 설립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항일유격정부인 노동민주정부가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발표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하기도 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1950년대에는 초·중등교육의 확대보급, 단일민족학교 설립, 교원양성과 교과서편찬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65년 소학교는 1,274개교, 중학교 278개교, 중등전문학교 5개교, 대학 3개교로 확대되었다.
1966년 이후 10년에 걸친 문화혁명은 연변지역의 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각종의 민족학교들이 해산되어 조선인의 취학률이 80%에서 30%로 감소했으며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연변 지역에 제공되던 교육재정보조가 취소되는 등 교육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1982년 9월 자치주 교육국에서 '연변교육 30년'을 발표하여 민족 교육을 재건하려는 방침을 제시했다. 초등교육 부문에서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단일민족학교 운영을 재개하면서, 조선어교육을 강화했고, 초등교육확대정책이 실시되었다.
중등교육 부문에서는 사범교육이 확대되었고, 위생학교·경찰학교·예술학교 등 다양한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고등교육 부문에서는 학교 규모의 확대와 전공학과를 증설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본과생 중심의 교육에서 연구생·본과생·전과생의 3단계 교육으로 변화되었다.
1991년 현재 소학교는 78개교, 중학교는 72개교, 중등전문학교 9개교, 그리구 종합대학교 하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