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 중국 쑤저우(蘇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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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1-01-27 09:00|본문
◇쑤저우의 운하(왼쪽), 운하 옆의 집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쑤저우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특히 쑤저우는 운하와 아름다운 정원, 미인들로 유명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대단한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쑤저우는 매우 크고 훌륭한 도시다. 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고 지폐를 사용한다. 사람들은 교역과 수공업으로 살아가며, 비단이 대단히 많이 생산돼 옷을 지어 입는다. 도시가 얼마나 큰지 둘레가 40마일에 이르며, 이 도시에는 돌로 만든 다리가 6000개나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은 1260년에 시작해 1295년에 끝났으니, 이 이야기는 13세기 후반의 일이다.
당시 기록에 따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잔뜩 기대감을 갖고 쑤저우에 들어서는 순간 실망하게 된다. 돌로 만든 다리 6000개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번화한 ‘동양의 베네치아’는 좁고 낡은 운하와 초라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휘돌아보는 관광객의 눈에 쑤저우는 마치 초췌한 노인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잠시 여유를 갖고 퇴락한 도시의 고즈넉한 정원과 뒷골목을 천천히 거닐고 그 정취 속에서 과거를 회상한다면 쑤저우는 푸근한 고도로 다가오기도 한다.
쑤저우는 춘추시대 오나라 수도로 오왕 합려의 무덤이 근교에 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 간이었는데, 합려는 이곳에서 월왕 구천에게 죽는다. 합려의 장례를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백호가 나타나 무덤 위에 꿇어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이곳은 호구(虎丘)라 불린다. 합려가 칼로 잘랐다는 바위 시검석도 근처에 있다. 합려가 귀중하게 여겼던 검 3000자루를 묻은 후 호수가 된 검지(劍池)도 있고, 고대에 쑤저우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호구탑(虎丘塔)도 볼 수 있다.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는 가시나무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간 끝에 월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오왕 부차는 마땅히 부친의 원수인 구천을 죽여야 했으나, 미녀를 상납받은 후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이에 구천은 쓰디쓴 쓸개를 핥아 가며 힘을 길러 오나라에 복수하게 되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오게 된다.
쑤저우에는 남북조시대인 6세기에 세워진 한산사란 절이 있다. 7세기에 당나라 시인이자 승려인 한산(寒山)이 머물러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고, 당나라 시인 장계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에서 이 절을 언급함으로써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쑤저우는 마르코 폴로가 얘기했던 대로 예로부터 비단의 집산지여서 지금도 시내 비단박물관에 가면 시대별로 구분해 놓은 비단과 누에를 기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쑤저우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원들이다. 쑤저우 정원들의 특징은 다른 도시에서처럼 왕의 것이 아니라 부호들의 개인 정원이라는 점이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쑤저우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특히 쑤저우는 운하와 아름다운 정원, 미인들로 유명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대단한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쑤저우는 매우 크고 훌륭한 도시다. 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고 지폐를 사용한다. 사람들은 교역과 수공업으로 살아가며, 비단이 대단히 많이 생산돼 옷을 지어 입는다. 도시가 얼마나 큰지 둘레가 40마일에 이르며, 이 도시에는 돌로 만든 다리가 6000개나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은 1260년에 시작해 1295년에 끝났으니, 이 이야기는 13세기 후반의 일이다.
당시 기록에 따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잔뜩 기대감을 갖고 쑤저우에 들어서는 순간 실망하게 된다. 돌로 만든 다리 6000개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번화한 ‘동양의 베네치아’는 좁고 낡은 운하와 초라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휘돌아보는 관광객의 눈에 쑤저우는 마치 초췌한 노인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잠시 여유를 갖고 퇴락한 도시의 고즈넉한 정원과 뒷골목을 천천히 거닐고 그 정취 속에서 과거를 회상한다면 쑤저우는 푸근한 고도로 다가오기도 한다.
쑤저우는 춘추시대 오나라 수도로 오왕 합려의 무덤이 근교에 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 간이었는데, 합려는 이곳에서 월왕 구천에게 죽는다. 합려의 장례를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백호가 나타나 무덤 위에 꿇어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이곳은 호구(虎丘)라 불린다. 합려가 칼로 잘랐다는 바위 시검석도 근처에 있다. 합려가 귀중하게 여겼던 검 3000자루를 묻은 후 호수가 된 검지(劍池)도 있고, 고대에 쑤저우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호구탑(虎丘塔)도 볼 수 있다.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는 가시나무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간 끝에 월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오왕 부차는 마땅히 부친의 원수인 구천을 죽여야 했으나, 미녀를 상납받은 후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이에 구천은 쓰디쓴 쓸개를 핥아 가며 힘을 길러 오나라에 복수하게 되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오게 된다.
쑤저우에는 남북조시대인 6세기에 세워진 한산사란 절이 있다. 7세기에 당나라 시인이자 승려인 한산(寒山)이 머물러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고, 당나라 시인 장계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에서 이 절을 언급함으로써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쑤저우는 마르코 폴로가 얘기했던 대로 예로부터 비단의 집산지여서 지금도 시내 비단박물관에 가면 시대별로 구분해 놓은 비단과 누에를 기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쑤저우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원들이다. 쑤저우 정원들의 특징은 다른 도시에서처럼 왕의 것이 아니라 부호들의 개인 정원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