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 역사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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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1-03-03 08:27|본문
전설 + 문학 + 종교 + 이야기가 있는 관광 뇌봉탑
항저우 뇌봉탑에 간 것은 오후 4시께였다. 뇌봉탑은 서호 남쪽에 있는 탑으로 정자사(淨慈寺) 앞 석조산(夕照山) 위에 있다. 송나라 개보8년(975년)에 오월왕 전숙이 지었는데 처음에는 서관전탑(西關塼塔)이라 하였고 나중에 '왕비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뇌봉의 작은 산 위에 있어 대개는 '뇌봉탑'이라 부른다.
현재 뇌봉탑은 오월왕 때 것이 아니다. 그 탑은 1924년 9월24일 무너졌다. 탑 내부가 벽돌로 되었고 외부를 목조로 지어 천년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최근에 다시 지었다. 2001년 항저우에 갔을 때 재건 공사가 한창인 걸 보았는데 그 이듬해 준공했다 한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탑을 세운 데는 여러 이유가 있으리라. 탑이 붕괴되자 탑을 재건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곧바로 재건공사가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재정난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1912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섰으나 혼란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신생 정부는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지방정부도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니 많은 돈이 드는 탑 재건 공사를 당장 착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탑 재건을 반대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문학가 루쉰(魯迅 1881-1936)이다. 우리에게는 '노신'으로 더 알려진 인물. '서호10경에 뇌봉탑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뇌봉탑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 중국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크게는 '십경병(十景病)', 작게는 릫팔경병(八景病)릮에 걸렸다. '십(十)자'형 병균이 이미 혈관에 침투하여 전신에 퍼져 있다." 그가 한 비판의 일부다. '루쉰 전집'에 실린 그가 쓴 '뇌봉탑 붕괴'에 관한 두 편의 글을 보면, 그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고 또 다른 귀중한 문화재가 손상되어 보수가 시급한데 뇌봉탑 재건을 서둘러야 한다는 여론이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파괴없이 새로운 건설이 없다. 그러나 파괴가 됐다하여 곧 새로 건설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중국 정부는 그 반대 주장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일까, 탑 재건은 이후로 미뤄졌다
그런데 뇌봉탑이 재건된 후에는 루쉰의 반대 이유가 설화와 얽혀져 재미있다. 흰 뱀이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여자로 변해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법해(法海)선사에게 붙잡혀 뇌봉탑 아래에 갇혔다는 설화다. 송대(宋代)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백사(白蛇) 전설을 1736년(乾隆1년)에 경극으로 만든 '백사전(白蛇傳)'이 꽤 유명하다. 루쉰도 어려서 할머니에게 귀가 닳도록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쓴 반대론에도 그 설화가 나온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루쉰이 탑을 세우면 여성해방이 늦어진다는 글을 남겨서 재건이 늦어졌다고 설명한다. 루쉰이 갑자기 여성해방론자가 되는 셈이다.
지금의 탑은 옛 탑과 모습이 매우 다르다. 이름은 같으나 탑은 옛 탑이 아니니 복원이라 할 수 없다. 5층 동탑으로 계단으로 올라 가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는 것 뿐이다. 나이든 분이나 장애인을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는 자동차도 있다. 물론 돈을 내야 한다.
층마다 볼 만한 게 많다. 일층에는 흰뱀, 백사의 사랑 설화를 목판에 조각해 두었고 2층에는 오월조탑도, 즉 오월국왕 전숙이 탑을 만든 과정을 그린 그림이 있다. 3층에는 뇌봉탑을 읊은 역대 시문이 적혀 있고 4층에는 탑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를 조각해 놓았는데 어찌나 세밀하게 실물처럼 새겨놓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5층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조각해 놓았다. 붕괴된 원래의 탑 일부를 내부에 그대로 놓아두고 새로 지어 탑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낙조는 보기 어려웠다. 이곳은 서호10경의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로 널리 알려졌다. 이곳에 올라서니 서호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석양이 아니어도 그 경치가 아름다웠다. 붉은 해가 산을 넘어가며 호수에 길게 붉은 물을 이룰 때 그 낙조가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이곳에 와서 경치에 빠지지 말고 관광객을 끌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주의깊게 살펴볼 일이다. 탑 하나만 지어놓았다면 그게 아무리 오래되었다 한들 사람들이 다시 오겠는가. 설화와 문학, 풍경, 종교를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즉 '이야기가 있는 관광'이 되도록 정교하게 한 것이다. 이야기가 있으니 흥미진진하다. 뇌봉탑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곳과 우리나라의 관광지가 교차되었다. 어디나 비슷한 관광지, 볼 게 있어도 이야기가 없어 재미가 없는 곳, 우리나라 관광시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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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 박물관
"비단은 항저우 비단이 최고"
절강성 '용정차'도 자랑거리
항저우에 가면 서호만 보지 말고 박물관을 들러 보아야 한다. 중국의 문화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비단박물관을 꼭 한 번 가볼 일이다. 비단은 세계적으로 중국 비단이 유명하거니와 그 비단이 거래된 길, 중국에서 로마까지의 무역로가 '비단길(실크로드)'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비단을 '사주(絲綢)'라고 하는데 명주실을 빽빽하게 짠다는 뜻으로 우리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사주라는 한자를 접하니 일본 음악가 키타로의 '사주지로'라는 음악이 생각난다. 사주지로는 '비단길'이라는 중국식 표현.
항저우에는 '중국사주박물관'이 옥황산 아래에 있다. 1992년 정식 개관한 이곳에는 소장품이 1만2000여 점에 달한다. 국립박물관이라 그 규모가 크고 소장품도 많다. 이곳에 두 번 가 보았는데 비단산업이 이곳에서는 여전히 성행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잠업이 거의 사라지고 역사속에나 존재하는데 이곳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는 모양이다. 항저우 사람들은 항저우 비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물어보면 무조건 항저우 비단이 최고란다. 비단으로 거의 모든 옷을 만들어 팔거니와 기념품도 비단으로 만들고 선물한다. 관공서의 공식적 답례품이나, 선물도 거의가 비단제품이다.
비단길은 당나라(618~907)때 항저우와 소주 등에서 생산된 중국 비단이 수도인 장안을 떠나 돈황과 천산남북로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까지 간 길이다. 그러니까 유럽과 아시아, 동서의 교역로였다. 그 비단길을 역사속에서 상상만으로 배웠던 그 길. 항저우 비단박물관에서 확인한다.
절강성에 가면 자주 눈에 띄는 게 용정차를 파는 가게다. 용정차는 중국 10대 명차 중의 하나인데 절강성 항저우 서호 서쪽에 있는 천목산(天目山) 남쪽 줄기에 있는 용정산에서 생산된다. 청나라 건륭제가 항저우를 순시하다가 용정차의 맛을 보고 감탄해 차나무 18그루를 어차(御茶), 황제가 마시는 차를 생산하는 차나무를 따로 지정했다고 한다. 용정차는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는 용정차를 많이 사온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도 용정차 맛을 볼 수 있게 됐다.
항저우에 처음 갔을 때 차농장에 갔다. 차밭도 보고 제다도 구경하고 차를 사는데 처음 가격이 흥정할 때마다 내려갔다. 미리 담아져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통에 담아주는데 그 자리에서도 진짜 용정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국 길에는 또다른 명차 황산 모봉차를 사는데 이번에도 그 자리에서 통에 담아준다. 그런데도 신뢰가 가지 않은 건 완전히 밀봉된 상품만 보아서 일까.
용정차는 마셔보면 별 맛이 없다. 그 맛없는 맛, 무미(無味)가 용정차의 특징이라 한다. 그 명성을 알고 큰 기대에 부풀어 용정차를 처음 마셔보는 사람들은 실망이 클 수도 있겠다.
차를 마실 때는 한 가지 알고 마셔야 한다. 중국차는 기본적으로 중국 음식에 맞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음식은 고기가 많이 들어가고 기름에 튀기기까지 해 느끼하다.그리고 중국은 물이 좋지 않아 차를 많이 마셔야 한다. 그래서 중국차는 만들 때 여러번 덖지 않는다. 많이 우러나와 기름기를 씻어주고 오래도록 마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를 물에 넣으면 덖었는데도 여전히 잎이 살아있다. 그런 차를 중국에서는 높이 평가한다. 중국차를 자주 마시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속이 쓰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음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채소를 많이 먹고 중국음식에 비해 기름지지 않는다. 그런데 기름기를 제거하는 차를 많이 마시면 속이 쓰릴 수밖에. 향기가 좋고 맛이 좋은 중국차라도 삼가해서 마실 일이다.
항저우 뇌봉탑에 간 것은 오후 4시께였다. 뇌봉탑은 서호 남쪽에 있는 탑으로 정자사(淨慈寺) 앞 석조산(夕照山) 위에 있다. 송나라 개보8년(975년)에 오월왕 전숙이 지었는데 처음에는 서관전탑(西關塼塔)이라 하였고 나중에 '왕비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뇌봉의 작은 산 위에 있어 대개는 '뇌봉탑'이라 부른다.
현재 뇌봉탑은 오월왕 때 것이 아니다. 그 탑은 1924년 9월24일 무너졌다. 탑 내부가 벽돌로 되었고 외부를 목조로 지어 천년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최근에 다시 지었다. 2001년 항저우에 갔을 때 재건 공사가 한창인 걸 보았는데 그 이듬해 준공했다 한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탑을 세운 데는 여러 이유가 있으리라. 탑이 붕괴되자 탑을 재건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곧바로 재건공사가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재정난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1912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섰으나 혼란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신생 정부는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지방정부도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니 많은 돈이 드는 탑 재건 공사를 당장 착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탑 재건을 반대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문학가 루쉰(魯迅 1881-1936)이다. 우리에게는 '노신'으로 더 알려진 인물. '서호10경에 뇌봉탑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뇌봉탑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 중국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크게는 '십경병(十景病)', 작게는 릫팔경병(八景病)릮에 걸렸다. '십(十)자'형 병균이 이미 혈관에 침투하여 전신에 퍼져 있다." 그가 한 비판의 일부다. '루쉰 전집'에 실린 그가 쓴 '뇌봉탑 붕괴'에 관한 두 편의 글을 보면, 그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고 또 다른 귀중한 문화재가 손상되어 보수가 시급한데 뇌봉탑 재건을 서둘러야 한다는 여론이 못마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파괴없이 새로운 건설이 없다. 그러나 파괴가 됐다하여 곧 새로 건설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중국 정부는 그 반대 주장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일까, 탑 재건은 이후로 미뤄졌다
그런데 뇌봉탑이 재건된 후에는 루쉰의 반대 이유가 설화와 얽혀져 재미있다. 흰 뱀이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여자로 변해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법해(法海)선사에게 붙잡혀 뇌봉탑 아래에 갇혔다는 설화다. 송대(宋代)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백사(白蛇) 전설을 1736년(乾隆1년)에 경극으로 만든 '백사전(白蛇傳)'이 꽤 유명하다. 루쉰도 어려서 할머니에게 귀가 닳도록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쓴 반대론에도 그 설화가 나온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루쉰이 탑을 세우면 여성해방이 늦어진다는 글을 남겨서 재건이 늦어졌다고 설명한다. 루쉰이 갑자기 여성해방론자가 되는 셈이다.
지금의 탑은 옛 탑과 모습이 매우 다르다. 이름은 같으나 탑은 옛 탑이 아니니 복원이라 할 수 없다. 5층 동탑으로 계단으로 올라 가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는 것 뿐이다. 나이든 분이나 장애인을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는 자동차도 있다. 물론 돈을 내야 한다.
층마다 볼 만한 게 많다. 일층에는 흰뱀, 백사의 사랑 설화를 목판에 조각해 두었고 2층에는 오월조탑도, 즉 오월국왕 전숙이 탑을 만든 과정을 그린 그림이 있다. 3층에는 뇌봉탑을 읊은 역대 시문이 적혀 있고 4층에는 탑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를 조각해 놓았는데 어찌나 세밀하게 실물처럼 새겨놓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5층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조각해 놓았다. 붕괴된 원래의 탑 일부를 내부에 그대로 놓아두고 새로 지어 탑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 낙조는 보기 어려웠다. 이곳은 서호10경의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로 널리 알려졌다. 이곳에 올라서니 서호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석양이 아니어도 그 경치가 아름다웠다. 붉은 해가 산을 넘어가며 호수에 길게 붉은 물을 이룰 때 그 낙조가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이곳에 와서 경치에 빠지지 말고 관광객을 끌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주의깊게 살펴볼 일이다. 탑 하나만 지어놓았다면 그게 아무리 오래되었다 한들 사람들이 다시 오겠는가. 설화와 문학, 풍경, 종교를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즉 '이야기가 있는 관광'이 되도록 정교하게 한 것이다. 이야기가 있으니 흥미진진하다. 뇌봉탑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곳과 우리나라의 관광지가 교차되었다. 어디나 비슷한 관광지, 볼 게 있어도 이야기가 없어 재미가 없는 곳, 우리나라 관광시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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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 박물관
"비단은 항저우 비단이 최고"
절강성 '용정차'도 자랑거리
항저우에 가면 서호만 보지 말고 박물관을 들러 보아야 한다. 중국의 문화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비단박물관을 꼭 한 번 가볼 일이다. 비단은 세계적으로 중국 비단이 유명하거니와 그 비단이 거래된 길, 중국에서 로마까지의 무역로가 '비단길(실크로드)'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비단을 '사주(絲綢)'라고 하는데 명주실을 빽빽하게 짠다는 뜻으로 우리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사주라는 한자를 접하니 일본 음악가 키타로의 '사주지로'라는 음악이 생각난다. 사주지로는 '비단길'이라는 중국식 표현.
항저우에는 '중국사주박물관'이 옥황산 아래에 있다. 1992년 정식 개관한 이곳에는 소장품이 1만2000여 점에 달한다. 국립박물관이라 그 규모가 크고 소장품도 많다. 이곳에 두 번 가 보았는데 비단산업이 이곳에서는 여전히 성행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잠업이 거의 사라지고 역사속에나 존재하는데 이곳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는 모양이다. 항저우 사람들은 항저우 비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물어보면 무조건 항저우 비단이 최고란다. 비단으로 거의 모든 옷을 만들어 팔거니와 기념품도 비단으로 만들고 선물한다. 관공서의 공식적 답례품이나, 선물도 거의가 비단제품이다.
비단길은 당나라(618~907)때 항저우와 소주 등에서 생산된 중국 비단이 수도인 장안을 떠나 돈황과 천산남북로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까지 간 길이다. 그러니까 유럽과 아시아, 동서의 교역로였다. 그 비단길을 역사속에서 상상만으로 배웠던 그 길. 항저우 비단박물관에서 확인한다.
절강성에 가면 자주 눈에 띄는 게 용정차를 파는 가게다. 용정차는 중국 10대 명차 중의 하나인데 절강성 항저우 서호 서쪽에 있는 천목산(天目山) 남쪽 줄기에 있는 용정산에서 생산된다. 청나라 건륭제가 항저우를 순시하다가 용정차의 맛을 보고 감탄해 차나무 18그루를 어차(御茶), 황제가 마시는 차를 생산하는 차나무를 따로 지정했다고 한다. 용정차는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는 용정차를 많이 사온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도 용정차 맛을 볼 수 있게 됐다.
항저우에 처음 갔을 때 차농장에 갔다. 차밭도 보고 제다도 구경하고 차를 사는데 처음 가격이 흥정할 때마다 내려갔다. 미리 담아져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통에 담아주는데 그 자리에서도 진짜 용정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국 길에는 또다른 명차 황산 모봉차를 사는데 이번에도 그 자리에서 통에 담아준다. 그런데도 신뢰가 가지 않은 건 완전히 밀봉된 상품만 보아서 일까.
용정차는 마셔보면 별 맛이 없다. 그 맛없는 맛, 무미(無味)가 용정차의 특징이라 한다. 그 명성을 알고 큰 기대에 부풀어 용정차를 처음 마셔보는 사람들은 실망이 클 수도 있겠다.
차를 마실 때는 한 가지 알고 마셔야 한다. 중국차는 기본적으로 중국 음식에 맞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음식은 고기가 많이 들어가고 기름에 튀기기까지 해 느끼하다.그리고 중국은 물이 좋지 않아 차를 많이 마셔야 한다. 그래서 중국차는 만들 때 여러번 덖지 않는다. 많이 우러나와 기름기를 씻어주고 오래도록 마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를 물에 넣으면 덖었는데도 여전히 잎이 살아있다. 그런 차를 중국에서는 높이 평가한다. 중국차를 자주 마시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속이 쓰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음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채소를 많이 먹고 중국음식에 비해 기름지지 않는다. 그런데 기름기를 제거하는 차를 많이 마시면 속이 쓰릴 수밖에. 향기가 좋고 맛이 좋은 중국차라도 삼가해서 마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