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여행 -연변 라지오 방송 ②시인과 당나귀 그리고 싸락눈 (연변延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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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11-14 12:13|본문
싸락눈 내리는 북국의 밤 '그때 그 시인' 낭만이 가슴을 달군다
50여년 전 만주를 유랑했던 시인 백석
사랑을 그리며 읊었던 한편의 시가
이제야 환청처럼 귓전을 흔들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50여년 전 만주를 유랑했던 시인 백석
사랑을 그리며 읊었던 한편의 시가
이제야 환청처럼 귓전을 흔들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백석
1930~19430년대 북방정서의 대표 시인인 백석은 남만주 일대를 유랑하다 어느 겨울 신의주 한 마음씨 좋은 목수집 봉당에 '쥔을 붙이고' 있었다. 밖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짚북데기 불에 추위를 쫓으며 그래도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한다. 시인의 신세는 처량하기 그지없지만 세월 지난 우리네 입장에선 참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2006년 겨울 나는 부산의 두 시인(서규정, 조성래)과 만주 안도현의 벽촌에 있는 김일량 시인의 집에 며칠을 묵었다. 돈이 없던 백석은 남의 집 헛간에서 겨울 저녁을 보냈지만 우리는 난방이 잘된 북간도식 토담방에서 한층 안온하게 겨울밤을 보내고 있었다. 북간도식 토담집은 입식 부엌에다 원룸 형태였다. 영하 이삼십도의 추위가 보통인 그곳에서는 열손실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부엌과 방이 하나로 트여 있다. 처음엔 상당히 어색했지만 생각처럼 별로 춥지도 않았고 그런대로 지낼만했다. 벽촌이라 밤이 되니 저녁을 먹고 술 한두 잔 주고받고 나니 달리 할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김 시인의 부인은 잠자리를 위해서 마실가고, 우리 넷은 나란히 누웠다.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던 그 밤 우리는 '연변라지오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침 방송에서는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가 낭송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청마가 그쪽 안도현 어디쯤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듣고 있었던 것은 '연변라지오방송'만이 아니었다. 밖에는 백석의 겨울밤처럼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가 난다 해서 싸락눈이라 했던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 사이사이 이따금씩 멀리서 나귀 우는 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긴 여행과 추위는 오간 데 없고 가슴이 자꾸 뜨거워졌다. 북녘 땅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던 백석의 시도 떠올랐다. 나타샤, 당나귀, 눈…. 눈을 볼 수 없는 남쪽 나라 부산의 작가가 이렇게 눈 내리는 북국의 한 벽촌 토담방에서 부산의 두 시인과 연변의 시인과 나란히 누워서 눈 내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부산의 대선배인 청마 유치환의 시가 낭송되는 방송을 듣는다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시인의 집 벽에는 거울과 백두산 풍경화 사진액자가 걸려 있고 액자에는 백두산 입장권과 선물한 친구들의 문구가 써져 있다. 투박하게 멋을 부린 글씨였지만 그 투박한 글씨에서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김일량 동지 /살아서 글로 싸우고 /죽어서 글로 남기라'.
태어난 한 곳에 50년간 그대로 살고 있다는 시인, 변화의 시대에 좋은 재능을 가지고도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을 지키고 한 곳에 산다는 고집이 그의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석화(시인)는 말했다. 자연이 그대로 담긴, 생태 시인, 자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안도현 양병진 고수촌에서 아내와 둘이서 사는 시인. 낮에 본 그의 시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빛은 자기 흰 살 속에서도
가장 하얀 속살만을 뽑아서
한 채 두 채 집을 짓고 있다.
서규정 시인과 나는 누운 채로 담배를 피웠다. 특히 서규정 시인의 담배는 거의 증기기관차 굴뚝 수준이다.
그래도 연기는 천정으로 쉽게 흩어져갔다. 분위기 탓인지 담배 연기를 무척 싫어하는 조성래 시인도 '허- 분위기 좋네'를 연발했다. 그는 뒷날 그 상황을 그렇게 읊었다.
오오, 나는 한때 외로운 잠적을 기도했네.
잊지 못할 애인의 이름 어리석게 외우며
추운 땅의 끝으로 말없이 떠나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