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위조여권자의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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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3-31 10:33본문
나는 한국에 입국해 9년 세월을 보낸 중국동포 장 영수(가명)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입국해서 벌써 서른 고개를 넘겼다.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기와 함께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과 책임감을 가슴속 깊이 느끼게 되고, 자기가 진 죄를 더더욱 가슴 저리게 뉘우치게 된다.
나는 요녕성 OO시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농사는 돈이 안 됐다. 1998년 6월 7일, 나는 고생 많이 하신 어머니 병도 고쳐드리고 남부럽지 않게 호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브로커에게 7백만 원을 주고 한국행을 하였다. 어머니와 주변사람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시골집을 담보로, 일부 대출도 받고, 또 한국 갔다 온 친척집에서 일부를 빌린 돈이었다. 위명 계명근 이름으로, 회사연수생명의로 그토록 가고 싶던 모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그런데 돈 벌기가 중국에서 생각한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힘들고 지칠 때 옆에서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처지라 저녁에 피곤한 몸을 지탱하며 자리에 누우면 고향생각, 아픈 어머니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도 이 악물고 참으며 나올 때 진 빚 7백만 원을 빠른 시일 내에 갚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회사연수생이라 아무리 뼈 빠지게 한 달을 벌어도 노임은 40만 원 정도 밖에 안 되었다. 40만 원에서 먹고 쓰고 나면 아무리 아껴 써도 한 달에 25만 원도 안 남는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건설현장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귀에게 홀린 것처럼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오직 돈벌이 세 글자 밖에 없었다. 별다른 기술은 없지만 아직 젊은 나이에 현장일이라도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일했다. 처음 하는 현장이리라 힘들고 고생 또한 말할 수가 없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참고 3년 정도 버니 빚도 거의 다 갚게 되였다. 돈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집도 없이 이 친구 저 친구 네 집을 다니며 눈치 밥 먹으면서 하루살이 생활을 했던 것이다.
빚을 다 갚자 나는 우선 싼 집이라도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보증금 백만 원에 월 15만원의 완전 지하 단칸방을 얻었다.
2002년 5월, 나는 친구의 소개로 아내 최 미봉을 만나게 되었다. 착하고 소박하며 여성스러운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당시 아내도 불법체류자여서 나의 힘든 처지를 더욱더 잘 알고 이해해 주었다.
2003년, 나는 마침내 최미봉과 결혼식을 올렸다. 비록 두 사람 다 불법이여서 서류상으로 정상적인 결혼신고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국타향에서 여직 외롭게 혼자 살아온 나에게 장모와 장인이 있어 너무 좋았다. 앞으로 부모님 공대하며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잘살자고 아내와 약속하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우리가정에 불행이 생기게 되었다. 2003년 1월, 장모님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자궁암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였다. 당시 장모님도 외국인이라 의료보험혜택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병원비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처음엔 한 달에 거의 천만원정도 들었다. 그러나 장모님은 거의 2년 동안 암과 싸우다가 2004년 6월 21일, 아쉽게도 59세의 젊은 나이에 3천만 원이 넘는 빚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후 우리는 외로이, 홀로 남은 장인을 모시고 같이 살게 되었다.
2006년 4월, 우리 부부사이에 귀여운 아들애가 태어났다. 아기 키워줄 사람이 없어서 아내는 집에서 애를 키우며 가정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어른도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울증에 몸도 안 좋으셔서 일을 다니지 못하고 집에 계셨다. 2007년 9월에는 복부염증으로 수술까지 하였다. 비록 내 두 어깨에 지워진 짐은 더 무거워졌지만, 귀여운 아들애를 볼 때마다 힘이 나고, 하루속히 정상적인 신분으로 떳떳한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2005년, 새로운 귀화정책의 덕택에 아내는 장인호적을 따라 귀화신청을 하게 되어 당해 8월 국적을 취득하였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신분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하나 만들기도 힘들고 인생에서 필요한 보험하나 가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건설현장에서도 일부 사업주들은 내가 불법체류자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몇 개월을 피땀 흘려 힘들게 일해도 계속 미루며 제대로 월급을 주지 않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못 받은 돈만해도 2천만 원이 넘었다. 이 돈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녀 봤댔자 불법체류자라는 죄명 때문에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자진신고 하여 귀국한다할지라도 당시 정책으로는, 나처럼 위조여권으로 입국한 사람은 5년 동안 입국규제를 받게 되며, 한국국적을 취득한 아내와 정상적인 혼인을 한다고 할지라도 5년 후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들애와 헤어져서 살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가정에서 아내, 아들애, 장인어른 세 식구가 모두 내가 번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인데 내가 없으면 나의 가족은 생계조차 문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장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빚까지 갚아야하는 상황, 그래서 죄가 죄를 만들며 현재까지 오게 된 것이다.
현재 나는 아내와 아들애와 행복한 가정을 갖게 되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 사람은 죄를 짓고는 발편잠을 잘 수 없는 것이다. 매일을 불안한 마음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깊은 밤에 귀여운 아들,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뜬 눈으로 세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나와 아내는 서류상으로 한국에서 결혼 신고는 끝난 상황이다.
우리 부부는 항상 버는 것보다 아껴 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고 있다. 장모님 때문에 진 빚도 절반정도 갚았고, 구로동에서 싼 월세 집을 잡아 장인어른 모시고 어린아들애 키우며 열심히 살고 있다.
나는 2006년 4월부터 시행되는 자진출국프로그램에 따라 당해 8월 구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9월 14일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부터 불기소이유통지서를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 불법체류자 신분 때문에 못 받은 돈이 2천만 원 정도 남아있는 상황이고 생활력이 전혀 없는 처와 이제 5개월도 안 된 아들애, 그리고 앓고 계시는 장인을 두고 차마 발길을 뗄 수가 없어 자진귀국을 포기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매일 불안과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법무부에서는 죄 없는 나의 아내와 애를 봐서라도 인도주의 차원에서, 내가 출국하지 않고도 속죄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처리해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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