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인 연변 미래가 밝은 연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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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0-03-31 09:54본문
▣ 주장의 보고를 듣다
글로벌경제위기가 지구를 강타하던 숨가쁜 2009년이 저물어가고 바야흐로 새 천년의 열번째해를 맞아온 2010년의 1월초순 나는 무려 십여년이나 가보지 못한 연변땅을 밟게 되였다. 남방도시 광주와 30여도의 기후차이가 있는 연길의 최저기온은 평균 령하20도였다. 십여년만에 만나는 북방의 소한추위가 몹시 걱정스러웠는데 내가 행장을 푼 북대구역의 국화모텔은 몹시도 훈훈했다.
저녁을 치른후 소일삼아 연변뉴스를 틀었더니 자치주 제13기인민대표대회 제3차회의에서 진술하는 리룡희주장의 보고가 방송중이였다. 끼끗하고 생기에 넘치는 젊은 주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심에 찬 그의 보고를 듣고있노라니 려로의 피곤이 깡그리 사라지면서 선조의 넋이 잠든 연변의 더욱 빛나는 전망이 가슴뜨겁게 안겨온다.
선도구전망계획, 연룡도일체화, '두만강상담회', '동북아박람회' 등 경제무역상담회에서 올린 알찬 성과들, 또한 관광업에서 이룬 아름찬 수확들은 국제금융위기에 처했던 연변이 쌓아올린 눈부신 금자탑이다. 위기속에서 이처럼 거대한 성과를 창조할수 있는 연변과 연변사람들의 저력은 정녕 무엇이였을가.
▣ 방대한 내수시장
일정이 너무나 빡빡해서 연변 각지를 두루 가보지 못했기에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연길의 서시장과 사흘돌이로 열리는 흥안장터를 돌아보면서 나는 연변이야말로 방대한 내수시장이요 연변사람들이야말로 근로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점을 느꼈다.
산더미같이 쌓인 상품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여기에 민족화합의 장을 만들고있는 조, 한 두민족의 부지런한 장사군들이 솜씨를 보이고있었다. 조선족짠지, 조선족된장 지어 조선족청국장까지 팔고있는 한족젊은이는 새벽에 훈춘에서 삼륜차를 몰고왔단다. 연변에 가면 진짜 조선족된장을 사가자고 별렀던 나지만 조선족이 아닌 한족젊은이앞에서 머뭇거리는데 안해는 제꺽 10근이나 사는것이였다.
한족젊은이가 팔고는 있지만 그것은 훈춘조선족된장공장의 산품이란것을 알아본것이였다. 말이 난김에 덧붙이지만 시장이나 장터의 대다수가 한족장사군들이였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속에서 조선족젊은이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수가 없고 조선족장사군들이란 다만 머리가 세여가는 중늙은이 아니면 파파할머니들이였다.
국제의류공장이라고 소문난 광주에서 살고있는 우리에게 수요되는것은 옷이 아니였다. 그리고 연길에서 팔고있는 명표옷들은 같은 것이라도 광주보다 몇배나 비쌌다. 우리에게 수요되는것은 조선족된장과 조선족고추장이였고 말린 산나물이나 조선명태와 조선말테이프였고 조선말서적이였다. 이런것들이 흥안시장에 즐비했다.
어쨌든 이번 연길행에 많은 수확을 얻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그 많은 연변의 산품들이 더한층 국내시장에 진출해서 내수시장의 범위를 확 넓힐수는 없을가,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보니 북경, 청도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연변식품이 개발되지 않고 있고 설령 있다쳐도 가물에 콩나듯, 그것도 질이 높지 못하다.
명태 하나로도 몇십가지 료리를 만들수 있는 한국 어느 마을사람들처럼 아직 우리에게는 개발이식이 부족한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연길사람들의 모습을 다른 측면에서 흔히 볼수 있었다. 연길의 호텔들에서 식당들에서 친절하고 자상한 서비스를 받으면서 나는 례절바르고 인정미 있고 정갈하고 씨원씨원한 우리 조선족들로 해서 자부감을 느꼈다.
▣ 엄동설한의 연길거리
내가 연길에 있는 그 며칠 매일 눈이 내렸다. 그러나 연길거리에는 눈이 없었다. 한국뉴스를 볼라니 그 당시 한국에도 눈이 많이 내려 폭설피해가 적지 않았다. 차길이 막혀 출근이 걱정되는것쯤은 약과라 치고 쩍하면 차를 번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서울시청은 주민들에게 자기 집앞 9미터사이의 눈을 쳐내지 않으면 5만원(한화)의 벌금을 안긴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연길시민들은 몹시 자각적이였다. 밤새 내린 눈이 이른 아침엔 벌써 종적이 없었다. 새벽부터 눈치는 소리가 어데서나 들렸다. 령하 20도의 혹한속에서도 연길시내의 통로들엔 눈 한줌 없었다. 이는 내가 그 며칠 후 급한 일로 목단강에 갔을 때 여실히 증명되였다. 목단강거리는 도처에 미끌거리는 얼음길이였고 도처에 눈더미가 쌓여있었다.
연길기온이 글쎄 흑룡강보다 좀 높은건 사실이지만 어쟀든 령하 20도의 추위속에서 얼마든지 눈얼음길이 생길수있다. 눈이 오면 금방 쳐내고 다른데로 옮겨가니까 그렇지 아니면 어림이나 있겠는가. 단지 여기에서도 우리는 깨끗하고 부지런한 연길시민들의 참모습을 느낄수 있다.
▣ 연길의사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사회보장문제가 불거지고있다. 그중에서도 의료위생부문의 부패가 놀라운 정도이다. 작년엔가 심양시제1병원이 유효기가 지난 약을 팔아 사람잡는 병원으로 소문났다. 많은 도시병원들에서 가짜약을 팔지 않는다 해도 쓸모없는 약을 팔고있다.
게다가 감기고뿔에도 혈액소변검사, 심전도따위는 작은것이고 몇백원씩 료금이 드는 의기를 사용하면서 사람을 한나절씩 들볶은뒤에 소용없는 약을 한보따리 팔아먹는 병원과 의사들이 한둘이 아니라는것은 이미 세인이 다 아는바다.나는 연변의 병원과 의사들이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찾아갔던 북대로교수중서의진료소와 연길현대병원의 의사들은 좋았다.
로교수중로교수중서의 찾은것은 내 코 량언저리에 난 붉은 반점때문이였다. 사람들앞에 나설 일이 있는데 어떻게 빨리 낮게 해줄수 없는가고 한씨성을 가진 로교수를 붙잡고 사정했더니 해산물따위로 인한 과민같으니 약을 써보라면서 처방지에 써주었다. 그리고는 어느 약방에나 다 있는 약이니 나가서 사라고 했다.
약방에서 14원으로 두가지 알약을 사서 복용했더니 그날 밤으로 반점이 말끔이 없어졌다. 광주에서라면 적어서 몇백원 팔았을것이다. 진찰비 1전 받지 않고 자기진료소의 약도 팔지 않은 로교수의 풍격, 그러한 의료도덕정신을 현대병원의 의사에게서도 실감했다. 위장병치료에서 기적의 3주료법을 창시해낸 김룡철의사가 그중의 하나이다.
김의사와 만나보기전 광주에서 나는 이미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게도 만성위병이 있었던것이다.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부드럽고 친절한 그의 목소리를 자주 들으면서 그가 보내오는 약으로 병이 완치된 나는 언제든 연길에 가면 그를 찾아보려고 마음먹었었다. 현대병원2층에 있는 김룡철의사의 진찰실엔 출근시간부터 벌써 여럿의 환자가 와 있었다. 진찰중에 전화가 자주 있었다.
김의사는 조금도 시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병원의 위치와 버스의 로선을 자상히 알려주었다. 김의사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찾은 환자들이 증송한 축기가 벽에 여러폭 걸려있었다. 진찰실복도에 해림에서 꼭두새벽에 떠나왔다는 중년사내가 앉아있었다. 여러해 위병에 시달리는 형님이 꼭 김의사를 찾아가보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는것이였다. 현대중의료법으로 잡다한 검사가 없이 병증세에 따라서 약을 쓰는 현대병원은 많은 환자들의 발목을 잡고있다.
▣ 민족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땅
연길세기호텔에서 내 둘째딸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날 세기광장은 들끓었다.우리말고도 여러집의 결혼대사가 마련된것이다. 역시 령하 20도의 추운 날씨였지만 산뜻한 치마저고리차림의 녀인들과 한복차림의 남성들이 모여들었다. 흰눈이 덮힌 광장에 봄날의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피여난듯했다. 나도 난생처음 한복을 입고 결혼식에 참가했다.
연변에서는 대사에 반드시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사돈께서 한국에서 맞춰온 옷이였다. 혼례사회자들도 한복차림이였다. 한국에서는 결혼식에 녀인들만 한복을 입고 남자들은 다 양복차림이였는데 연변에서는 남자들도 흔히 한복차림이였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 살아숨쉬는 이 땅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아름다운 전통문화는 비단 옷차림에서만 피여난게 아니다. 내가 앉은 좌석에 낯모를 젊은이들이 찾아와 곱게 인사를 올리고 축배를 들었다. 내 사위의 동무들이라면서. 그중에는 30대의 젊은 대학교수도 있고 역시 젊은 곤충학박사도 있으며 잡지사의 젊은 편집도 있었다.
내가 황공스레 일어나 인사를 받으니까 그들은 저희 동무의 장인이면 저희들의 어버이벌이라며 깎듯이 대하는것이였다. 나는 이같이 인정있고 례절바른 연변청년들에 의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미덕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 연길신화서점
연변에 가면 욕심나는 책을 한짐 지고오겠다는 생각을 앞세웠던 내가 연길신화서점을 찾은 날은 삭풍이 외투깃을 파고드는 몹시 추운 날이였다.눈보라가 일고있었다. 그래도 서점안은 후끈후끈 열기가 났다. 나는 헤아릴수 없는 그 숱한 종류의 책들과 역시 헤아릴수 없는 고객들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교수참고자료를 찾는 선생님들, 과외서적을 뒤적이는 중학생들, 보건위생면의 서적을 안고다니는 살뜰한 주부들, 소일삼아 소설책과 잡지를 번지고있는 할아버지들… 그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서점을 찾은 연길시민들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 조선족의 문화와 문학이 꽃피는 연변의 숨결을 느꼈다. 이같은 연변의 독서풍토가 바로 그같이 훌륭한 작가들을 키워낸게 아닐가.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훌륭한 전문가, 학자들을 키워낸게 아닐가싶다. 연변의 독서풍토는 그 이틀후 룡정신화서점에서도 실감했다. 연변에는 해마다 독서절이라는 대중활동이 버러지고 그럴때면 매우 장관이란다. 나는 지난해에 연변일보에서 본 ‘책향기넘치는 연변을 건설하자’는 내용으로 된 연변자치주 등개서기의 글이 떠오르면서 감개가 더 깊어졌다. 그렇다. 문화는 민족의 령혼이요, 민족의 근본이다.
▣ 맺는 말
연변하면 조선족은 물론 한반도에서나 일본에서나 중국대지에서 누구나 안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 는 지금도 해남도, 광주 등 머나먼 남방하늘에 울려퍼지고 연변아줌마들의 김치와 토장은 전국 대도시들에 알려졌다. 연변은 중국조선족자치주이고 연길은 중국조선족 수도이다. 중국조선족의 이미지, 중국조선족의 위상은 자고로 연변에서 표현되였다.
중국혁명과 사회주의건설에 한몫 크게 기여했던 연변은 가는 곳마다 하얀 렬사비가 세워져있다. 선렬들의 붉은 피가 스며든 연변땅은 그래서인지 이른 봄이면 산자락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여난다. 개혁개방은 연변에 많은 혜택을 주었다.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연변인민들은 한반도는 물론 리시아, 일본, 미국, 캐나다 등 이역만리에서도 솜씨를 펼친다.
고생을 감내하는 이악성,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 아글타글 돈을 모으는 집착성, 잘살아보겠다고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는 근면성 이것이 바로 연변사람들의 저력이다.인정있고 례절바르며 말씨고운 연변사람들은 어디에 가서나 자기 민족의 얼을 지킨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노래방출입과 혼외련, 짜리혼, 출국바람에 가정이 깨여지고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여 국법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변사람들중의 극소부분이다.
필자는 연변인민들의 앞길에 더욱 찬란한 무지개가 펼쳐질것이라는 확신을 안고 남방비행기에 올라 부푸는 심정으로 새로 일떠선 개발구와 새로 일떠선 무역빌딩들과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아담한 주택들과 만무 과수원과 무연한 논벌들을 오래오래 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