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지역 조선족의 이동 분포와 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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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1-09-08 03:44본문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이동 분포와 특점
차철구 (길림성 민족연구소)
동북아개발현장 조선민족은 동북아지역의 주요한 토착민의 하나로서 조선반도에서 발원했다. 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은 륙속 중국, 구쏘련, 일본 등 주변나라로 대량으로 이동하여 점차 온 동북아에 널린 위대한 민족으로 되였다. 초보적 집계에 따르면 목전 동북아지역에 있는 조선족은 약 6,780만인으로서 동북아 총인구의 24%좌우를 차지한다. 그중 조선인구가 2,250만이고 한국인구가 4,310만(조선과 한국은 모두 단일 민족국가이다)이고 중국조선족이 192만이며 일본경내의 조선족이 67만, 구쏘련의 조선족이 약 40만이다. 동북아정세가 완화되고 각 나라지간의 관계가 완벽화됨에 따라 동북아 조선족사이의 래왕이 날로 밀접해지고 있다.이는 동북아지역 경제협력발전에 추진역할을 놀고 있다.
본문은 조선족의 이동과정을 회고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의 분포 및
그특점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려 한다.
1. 조선족의 이동
목전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분포는 력사적으로 형성된것이며 19세기중엽부터 시작된 몇차례 조선족 대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언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어떤 시대배경과 사회원인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
동북아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제1단계는 19세기중엽으로부터 1910년 《일한합병》까지로서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으로 이사왔다. 제2단계는 《일한합병》으로부터 1931년의 《9.18》사변전야까지이고 제3단계는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제2차대전종말까지로서 동북아지역의 조선족분포가 거의 형성되였다.
제1단계 조선족의 이동과 우리나라 동북에 분포된 상황을 보면 1906년까지 조선족은 서쪽의 안동, 흥경(興京), 류하로부터 돈화 일선의 남부지역에 국한되여 있어 서북쪽으로는 휘발하(煇發河), 동쪽으로는 녕고탑(寧古塔)과 목릉하(穆稜河) 일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로야령(勞爺岺)을 넘어 목단강연안과 삼성(三姓)지방 즉 동북경내지로 점차 이주해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북에 이주해온 조선족인수가 부쩍 늘어났다.
1894년까지만 해도 도합 7만 8,000인이던 조선족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9,000인으로 늘어났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1904년의 5만여으로부터 1909년의 18만 4,867인으로 늘어나 당지의 만족, 한족을 초과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에 조선정부를 강압하여 《한일보호협의》를 체결한 뒤를 이어 1910년에 또 조선매국노 리완용 등 사람과 결탁하여 비밀리에 《한일합병조약》을 맺어 조선을 완전히 먹어 버렸다.
망국노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의 조선인민들이 다투어 동북아 여러 나라로 이주해갔다. 이는 조선족이 동북아 여러나라로 이주해간 제2단계이다. 이시기는 주로 정치원인으로 하여 이주해갔다. 조선족은 그냥 우리나라 동북으로 이주해오는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910년부터 1912년까지 이태사이에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6,354인 된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압록강북쪽에 이주해간 조선족이 9만 8,657인 된다. 도문강북쪽에 이주해간 9만 3,883인까지 합하면 도합 19만 2,540인이다. 특히는 1919년 《3.1》운동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과 반일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920년의 45만 9,400여인으로부터 1930년의 63만 982인으로 늘어났다. 그중 연변 4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약 40만 9,402인으로서 64.9%를 차지하고 안동과 통화 지역에 5만 545인으로서 8% 차지하고 봉천과 철령 지역에 9만 7,169인으로서 15.4% 차지하고 길림과 장춘지역에 2만 4,157인으로서 3.8% 차지하고 북만(흑룡강에 속함)에 4만 4,463인으로서 7% 차지하고 려순, 대련 지역에 1,747인으로서 0.27% 차지하고 기타 지역이 약 1,000인좌우였다. 우의 수자에서 볼수 있다싶이 길림성 연변지역은 이미 우리나라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로 되였으며 료녕성도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흑룡강은 장성세를 이루었다.
조선에서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15년간(1910-1925) 조선측에서 해외로 이주해간 난민이 30만호를 초과했다. 1919년까지 약 10여만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 토목건축과 석탄채굴 등 로동에 종사하였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만족, 몽골족 지역과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이 5만 6,000인이며 22만 5,000여인이 연변지역에 이주해갔고 1926녀부터 1930년 사이에 또 10여만인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갔다. 1922년 12월 구쏘련 극동지역의 외국무장간섭이 철저히 분쇄되고 쏘베트공화국이 창건됨에 따라 구쏘련에 이주해간 조선족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구쏘련측에서 통계한데 따르면 1926년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이미 8만 7,000여인에 달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을 침화전쟁의 공고한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6년 4월 20년사이 100만호 500만인 일본이민을 이민하려는 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파산된 농민을 강압하여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민사업을 관리, 사후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행한 주요지역의 하나이다. 1940년 한번에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2,810호나 된다. 1941년이후 일본식민당국은 강북지역의 신이민자들을 《이민개척단》으로 만들어 북만과 내몽골지역에로 내몰아 논을 풀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북으로 강제이민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이 3만 856호에 14만 7,744인 된다.
일본의 강제이민으로 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 3,015인으로 껑충 올라 1932년의 67만 2,649인에 비해 2.2배 늘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강제이민 때문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있다. 례를 들면 1937년 《7.7》사변전야에 우리나라 관내로 들어온 약 3만여명 조선족들은 다수가 반일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단체의 책임자이다. 또 장사군도 있고 다은 원인으로 하여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은 화북, 화중, 화남 등 지역에 분포되여있었다. 몇년간 급격히 늘어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관내 조선족이 10여만인에 달하였는데 그중 화북지구에 좀 많았다. 재일 조선족은 대부분 제2차세계대전기간 일본에 《강제징용》되여간 로력자들이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수자에 따르면 침화전쟁발동이래 일본식민당국에 끌려 참군한 조선인은 36만 4,000여인으로서 그중 태평양전쟁시기(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참군한 사람만 해도 11만 6,294인이다.또 600만 조선인이 로력자로 끌려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전쟁가운데서 목숨을 잃었거나 제명에 죽지 못했다. 적지 않은 《행운자》들은 또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1945년 일본투항때 재일조선족은 약 200만인좌우였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르면 1939년 구쏘련경내에 거주한 조선족인구는 18만 2,300여인으로서 1926년에 비해 1.1배 늘어났다. 《9.18》사변후 쏘련에 이주한 조선족들은 일본식민주의통치와 일본의 강제이민에 못이겨 구쏘련에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다. 해당 서적,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조선광복까지 세계 각국에로 이주해간 조선족은 무려 당시 조선반도 총인구의 15%좌우 차지하는 400만인이나 된다. 그중 중국동북에 정착한 사람이 대략 160만, 중국내지에 대략 10만, 구쏘련 씨비리아와 극동 지역에 대략 20만, 일본에 대략 210만, 기타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략 3만인 이주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종말후 조선족의 대량적 이주는 거의 끝났다.
동북아개발현장 조선민족은 동북아지역의 주요한 토착민의 하나로서 조선반도에서 발원했다. 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은 륙속 중국, 구쏘련, 일본 등 주변나라로 대량으로 이동하여 점차 온 동북아에 널린 위대한 민족으로 되였다. 초보적 집계에 따르면 목전 동북아지역에 있는 조선족은 약 6,780만인으로서 동북아 총인구의 24%좌우를 차지한다. 그중 조선인구가 2,250만이고 한국인구가 4,310만(조선과 한국은 모두 단일 민족국가이다)이고 중국조선족이 192만이며 일본경내의 조선족이 67만, 구쏘련의 조선족이 약 40만이다. 동북아정세가 완화되고 각 나라지간의 관계가 완벽화됨에 따라 동북아 조선족사이의 래왕이 날로 밀접해지고 있다.이는 동북아지역 경제협력발전에 추진역할을 놀고 있다.
본문은 조선족의 이동과정을 회고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의 분포 및
그특점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려 한다.
1. 조선족의 이동
목전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분포는 력사적으로 형성된것이며 19세기중엽부터 시작된 몇차례 조선족 대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언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어떤 시대배경과 사회원인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
동북아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제1단계는 19세기중엽으로부터 1910년 《일한합병》까지로서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으로 이사왔다. 제2단계는 《일한합병》으로부터 1931년의 《9.18》사변전야까지이고 제3단계는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제2차대전종말까지로서 동북아지역의 조선족분포가 거의 형성되였다.
제1단계 조선족의 이동과 우리나라 동북에 분포된 상황을 보면 1906년까지 조선족은 서쪽의 안동, 흥경(興京), 류하로부터 돈화 일선의 남부지역에 국한되여 있어 서북쪽으로는 휘발하(煇發河), 동쪽으로는 녕고탑(寧古塔)과 목릉하(穆稜河) 일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로야령(勞爺岺)을 넘어 목단강연안과 삼성(三姓)지방 즉 동북경내지로 점차 이주해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북에 이주해온 조선족인수가 부쩍 늘어났다.
1894년까지만 해도 도합 7만 8,000인이던 조선족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9,000인으로 늘어났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1904년의 5만여으로부터 1909년의 18만 4,867인으로 늘어나 당지의 만족, 한족을 초과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에 조선정부를 강압하여 《한일보호협의》를 체결한 뒤를 이어 1910년에 또 조선매국노 리완용 등 사람과 결탁하여 비밀리에 《한일합병조약》을 맺어 조선을 완전히 먹어 버렸다.
망국노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의 조선인민들이 다투어 동북아 여러 나라로 이주해갔다. 이는 조선족이 동북아 여러나라로 이주해간 제2단계이다. 이시기는 주로 정치원인으로 하여 이주해갔다. 조선족은 그냥 우리나라 동북으로 이주해오는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910년부터 1912년까지 이태사이에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6,354인 된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압록강북쪽에 이주해간 조선족이 9만 8,657인 된다. 도문강북쪽에 이주해간 9만 3,883인까지 합하면 도합 19만 2,540인이다. 특히는 1919년 《3.1》운동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과 반일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920년의 45만 9,400여인으로부터 1930년의 63만 982인으로 늘어났다. 그중 연변 4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약 40만 9,402인으로서 64.9%를 차지하고 안동과 통화 지역에 5만 545인으로서 8% 차지하고 봉천과 철령 지역에 9만 7,169인으로서 15.4% 차지하고 길림과 장춘지역에 2만 4,157인으로서 3.8% 차지하고 북만(흑룡강에 속함)에 4만 4,463인으로서 7% 차지하고 려순, 대련 지역에 1,747인으로서 0.27% 차지하고 기타 지역이 약 1,000인좌우였다. 우의 수자에서 볼수 있다싶이 길림성 연변지역은 이미 우리나라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로 되였으며 료녕성도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흑룡강은 장성세를 이루었다.
조선에서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15년간(1910-1925) 조선측에서 해외로 이주해간 난민이 30만호를 초과했다. 1919년까지 약 10여만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 토목건축과 석탄채굴 등 로동에 종사하였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만족, 몽골족 지역과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이 5만 6,000인이며 22만 5,000여인이 연변지역에 이주해갔고 1926녀부터 1930년 사이에 또 10여만인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갔다. 1922년 12월 구쏘련 극동지역의 외국무장간섭이 철저히 분쇄되고 쏘베트공화국이 창건됨에 따라 구쏘련에 이주해간 조선족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구쏘련측에서 통계한데 따르면 1926년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이미 8만 7,000여인에 달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을 침화전쟁의 공고한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6년 4월 20년사이 100만호 500만인 일본이민을 이민하려는 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파산된 농민을 강압하여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민사업을 관리, 사후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행한 주요지역의 하나이다. 1940년 한번에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2,810호나 된다. 1941년이후 일본식민당국은 강북지역의 신이민자들을 《이민개척단》으로 만들어 북만과 내몽골지역에로 내몰아 논을 풀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북으로 강제이민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이 3만 856호에 14만 7,744인 된다.
일본의 강제이민으로 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 3,015인으로 껑충 올라 1932년의 67만 2,649인에 비해 2.2배 늘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강제이민 때문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있다. 례를 들면 1937년 《7.7》사변전야에 우리나라 관내로 들어온 약 3만여명 조선족들은 다수가 반일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단체의 책임자이다. 또 장사군도 있고 다은 원인으로 하여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은 화북, 화중, 화남 등 지역에 분포되여있었다. 몇년간 급격히 늘어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관내 조선족이 10여만인에 달하였는데 그중 화북지구에 좀 많았다. 재일 조선족은 대부분 제2차세계대전기간 일본에 《강제징용》되여간 로력자들이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수자에 따르면 침화전쟁발동이래 일본식민당국에 끌려 참군한 조선인은 36만 4,000여인으로서 그중 태평양전쟁시기(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참군한 사람만 해도 11만 6,294인이다.또 600만 조선인이 로력자로 끌려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전쟁가운데서 목숨을 잃었거나 제명에 죽지 못했다. 적지 않은 《행운자》들은 또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1945년 일본투항때 재일조선족은 약 200만인좌우였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르면 1939년 구쏘련경내에 거주한 조선족인구는 18만 2,300여인으로서 1926년에 비해 1.1배 늘어났다. 《9.18》사변후 쏘련에 이주한 조선족들은 일본식민주의통치와 일본의 강제이민에 못이겨 구쏘련에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다. 해당 서적,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조선광복까지 세계 각국에로 이주해간 조선족은 무려 당시 조선반도 총인구의 15%좌우 차지하는 400만인이나 된다. 그중 중국동북에 정착한 사람이 대략 160만, 중국내지에 대략 10만, 구쏘련 씨비리아와 극동 지역에 대략 20만, 일본에 대략 210만, 기타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략 3만인 이주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종말후 조선족의 대량적 이주는 거의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