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은 (3) 한국 가는 카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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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9-03 21:47본문
여호길의 조선족시대
위동훼리는 인천과 중국을 잇는 첫 카페리다. 위동훼리는 당시 홍콩을 거쳐 한국을 방문하던 조선족들의 한국방문의 여정을 단축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비도 대폭 줄여줬다. (물론 그때는 조선족들이 가난하여 한국에서 친척친우들이 항공권을 보내왔다.) 그러나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위해까지 가려면 기차를 타고 먼저 대련에 도착하여 국내여객선을 타고 발해(渤海)를 건너 위해(威海)까지 가야하는데 성수기에는 당일 배표를 구하기 어려워 연태(烟台)와 청도(青岛)로 가는 배를 타고 다시 현지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위해로 가야 했다.
간신이 배에 오르면 8시간에서 10여 시간 배에서 곤혹을 치러야 한다. 당시 중국의 여객선은 배수량이 작은 선박으로 일색을 이루다 보니 배 멀미를 각오하지 않으면 아예 배타기를 포기해야 한다. 나는 일찍 대련에서 연태, 청도, 상해(上海), 하문(厦门), 광주(广州) 등 도시로 갈 때 자주 배편을 이용하여 국내 여객선에 익숙했다. 바다사정이 좋지 않을 때면 배 멀미는 물론, 구토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는 배는 엄청 큰 물건이어서 마치 안방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시설도 웬만한 여관급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대련~광주간 여객선의 시설이 괜찮은 편이였지만 위동훼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조선족들은 여객선에 오르면서부터 자본주의 교육을 받는다. 편리한 시설에 적응하는 방법, 한국인들이 어울리는 모습에서 그들의 인간관계를 보아낼 수 있었으며 가판대에서 쉽사리 집어볼 수 있는 신문, 잡지와 안내책자들에서 ‘부패한 자본주의’ 진면목을 관찰하고 철저한 금전거래와 편리한 서비스정신, 중국에서는 변태라고 할 만큼 여자를 밝히고 남자를 밝히는 추잡한 한국인들의 인간성도 동시에 느껴볼 수 있었다.
내가 위동훼리를 탄 것은 1992년 5월 말쯤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해가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갑판에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바다만 보였다. 갈매기들이 없는 것을 보니 내해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나기 시작했다. 어제 위해에서 사들고 올라온 덕주 구운닭(德州扒鸡)에 청도맥주를 마신 것이 마지막 음식이었다. 그리고 나서 하루가 다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갑판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구수한 장국냄새가 주린 창자를 자극하여 와 허둥지둥 장국냄새를 따라 가보니 식당이었다. 식당카운터에서 의외로 식당직원을 둘러싼 한 무리 조선족들과 맞닥뜨렸다. 그중 나이 듬직한 아저씨를 붙잡고 영문을 물어보니 아저씨는 어이없다며 혀를 끌끌 찬다.
“글쎄, 밥 한 끼에 5달러씩이나 하니 어떻게 사먹겠소.”
보나마나 중국인민들이 남조선인민들과 흥정을 붙은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민들의 양호한 전통이다. 비싸다싶으면 사람을 모아서 많이 사는 명목으로 사게 사는 수완이다. 하기야 5불이면 당시 인민폐로 40원이다. 대학을 졸업한 나의 월급이 80원 가까이 되었으니 누군들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포분들.”식당경리로 보이는 한국인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가면 모두 이 가격입니다. 대신 일하면 하루 일당이 3만원(당시 인민폐로 환산하면 240원.)이상으로 나오고요.”
그러나 조선족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박리다소(薄利多销-많이 팔고 이윤을 적게 보다)가 통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빠 맞은 식당경리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까지 맺혔다. 그러면서 주변을 기웃거리며 누가 거들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을 요해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찔러온다. 반갑게도 심양에서 설계사로 일하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자연 화제를 5불짜리 점심식사에로 돌렸다. 동창은 이미 여러 번 위동훼리를 타고 인천을 다녀왔는데 5불이 좀 비싸긴 해도 한국인들의 경우 말없이 먹어준다는 것이다.
결국 동창이 나서서 독특한 관료주의 작법으로 좌중의 조선족들을 몰아붙였다. 이게 중국이냐, 왜 외국에 나와서 중국에서처럼 행동하느냐. 그러면서 중국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야단을 친다. 좌중의 조선족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우르르 식당으로 쓸어 들어갔다. 나도 동창의 엄포에 덩달아 주눅이 들고 말았다.
좀 있다 경리가 희색이 만면해서 나와 동창이 식사하고 있는 테이블에 찾아와 사의를 표하자 동창은 그제야 “이게 뭐가 먹을 게 있다고 5달러씩이나...”하면서 퉁을 놓는다. 그리고는 다시는 경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평소 집에서 젓가락이 가지 않던 시시껄렁한 음식을 비싼 값을 주고 사먹었다. 그것도 고양이 밥상처럼 한 저 가락에 집을 수 있는 양이다. 그리고 흐지부지한 장맛 때문에 집에서 어머니가 만든 조선된장을 갖고 올 걸 그랬다고 못내 후회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9-04 08:38:22 在中한인소식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