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유전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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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5-28 01:55본문
한국어의 유전자를 찾아서
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어웡크족·다구르족 언어에서 고대 한국어와 고구려 언어 흔적 발견
대흥안령 지역에는 어웡크족, 오룬춘족, 다구르족 등 여러 몽골로이드계 소수민족의 언어가 남아 있다.
우리는 흑룡강성과 대흥안령 지역의 여행을 계속했다. 2007년 7월 21일 우리는 하일라얼(Haila’er)에 있는 어웡크(鄂溫克, Owongku, 혹은 에웽키, 에벵키)족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나는 그 박물관의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어웡크어로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런 연습을 하는 까닭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언어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어체 언어를 내 귀로 직접 듣기 위한 것이다. 그 젊은 어웡크 여성은 1~5까지 셀 줄 알았으며, 모르는 나머지는 휴대전화로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다구르민족박문관에 전시된 사진(위)과 모리다와 시내에서 열린 다구르족 행사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킨다.
이틀 후인 23일 우리는 알리사(Alisa)에 있는 오룬춘(鄂倫春, Orunchun)족 박물관을 방문했다. 거기서 나는 한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역시 오룬춘어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숫자 세기가 어렵자 자기 친구에게 달려가 조그만 오룬춘어 어휘 책자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 책자에 있는 숫자들을 그대로 읽었으며, 발음은 그 책자에 나와 있는 간단한 표기보다 훨씬 나았다. 분명 언어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인 24일 우리는 다우얼(達斡爾, Dawoer, 혹은 다구르, 다후르) 민족 문화 공원과 박물관을 방문했다. 모리다와 다우얼 자치구(Molidawa Dawoer Autono-mous County)의 장이라는 한 노인이 나에게 다우얼어 숫자 1~10을 말해주었다. 그는 숫자 세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며, 중간에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 10 이상의 숫자를 셌다.
현장에서 이런 자료들을 분석해보다가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즉 몽골어와 퉁구스어 양자의 원래 파열음 체제(plosive systems)에서 유성/무성 대응(the voiced/voiceless contrast)은 대체로 북부 중국어 파열음 체제의 대기음/비대기음 대응(the aspirated/non-aspirated contrast)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몽골어에서 d:t 대응을 가진 4 dorb: 5 tap가 다우얼어에서는 t:th 대응을 가진
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그 80대 노인이 말하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지난 100년에 걸쳐 채집한 모든 언어학적 자료들은 비교 자료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주의 깊게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은 다수 민족의 합중국
이제 에벵키족이나 다구르족 아이들이 자기들 언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외국 학자들이 쓴 책과 논문들을 찾아봐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 같다. 만일 이 민족 언어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면, 민족 집단과 그 문화는 곧 사라질 것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다구르족 노인 아르다합씨는 다구르어로 1~10까지 어렵지 않게 말했다.
이 언어들에는 먼 옛날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해온 흔적과 고구려 제국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모두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나는 26살 때 내가 자란 곳을 떠나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의 밤은 어두웠지만, 검은 아프리카인들은 어두운 밤보다 검었고, 오로지 눈의 흰자위와 웃을 때 보이는 이만 하얄 뿐이었다. 과거 500년 간의 아프리카 역사는 그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노예 무역과 식민 통치로 파괴됐다.
아프리카 민담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친절하게 대해도 불친절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대흥안령 지역 소수민족 박물관 또는 기념관의 동상들. 다구르족, 어웡크족, 오룬춘족 전사의 모습이다(위부터)
하지만 타인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즐거이 하면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온 아프리카인들은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과거 식민 지배를 한 서구제국 팀들을 격파했다. 한국인의 ‘할 수 있다’ 정신이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자신들의 과거 영광을 일깨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제 그들의 신체적 역량은 스포츠와 같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아시아 역시 어두운 역사를 가졌지만, 아프리카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족감(自足感)과 타인에 대한 친절함은 아시아인에게로 유전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래로 한국에는 조선이라는 하나의 왕조가 있어왔으며, 중국에는 명(明)과 청(淸)이라는 두 왕조가, 그리고 소아시아에는 투르크족의 오토만 제국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듣고 유럽의 지식 계층들은 놀라워 했다.
유럽인들이 침입해오기 전에 아프리카 역사는 밝고 평화로웠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는 이집트 문명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을 때 종말에 이르렀다. 이집트는 동방으로부터 힉소스(Hyksos)라고 불리는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은 짧은 기간(BC 1670~1570) 외에는 거의 3000년 동안어두운 시기를 겪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그리고 수메르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 집단이 셈어계(Semitic) 민족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중국에서는 한민족(漢民族)과 알타이어계 민족 집단들이 거의 교대로(송, 원, 명, 청) 지배해왔다.
커다란 혼란기(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 하나로 통일된 평화로운 시대(진, 한)가 이어졌다. 알타이어계, 한족(漢族)계, 그리고 다른 계열 문화들이 하나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오고(5호16국),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렇게 중국은 한족계(당, 송)나 아니면 알타이어계(요, 금, 원)에 의해서 다시 통합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EU가 유럽인 국가들의 연합인 것처럼, 현대 중국은 56개 소수 민족 집단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몽골로이드 여러 민족 집단의 합중국(合衆國)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동적인 알타이어계 민족들은 창조적이지만, 정적인 한족계 민족은 알타이어계의 모든 것을 부수어 삼켜버리고 있다. 한족들은 북동부 중국에 있는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 역사가 한족 역사라는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중국 전체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민족들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북동부 중국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합중국의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의 역사다.
황하문명은 몽골로이드 문명
중국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그 문자 전통에 있다. 이집트 신성문자가 이집트 문명의 기초적 요소였듯이, 중국어 글자는 역시 중국 문명의 기본이다. 이 두 글자 모두 상형문자이므로, 일(日, sun), 구(口, mouth), 목(目, eye), 인(人, person) 같은 비슷한 형태의 문자가 많다.
그러나 상·하 이집트가 BC 2850년에 통일된 직후 이집트 신성문자가 만들어졌고, 반면에 가장 오래된 중국어 글자인 갑골문자는 BC 1300년쯤 이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집트 신성문자는 중국어 글자보다 1500년 이상 오래 되었다. 이런 시간적인 차이는 이집트의 필기 체제나 그 기본구조가 중국이나 고조선을 포함한 기타 알타이어계 지역들에 도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골문자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꼭 중국인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본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연대가 BC 5000년대까지 올라가는 내몽골에 있는 홍산문화 지역과 기타 고고학 유적지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랜 연대와 비교되는 것으로, 우리는 우랄-알타이어계, 시노-티베트어계, 남아시아어계(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어계, 그리고 몽골로이드들이 사용하는 기타 어족의 조상들이 모두 이 오랜 문화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은 또한 고조선의 영역이기도 하면서 발해만과 서해(황해)와 마주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곳 바다를 ‘고조선의 지중해’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 본토 서쪽까지 포함하는 일명 황하 문명이 분명 순전한 중국인 문명이 아니라, 고조선인들을 포함한 알타이어계 민족들이 한족과 기타 몽골로이드 민족들과 함께 만든 몽골로이드 문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미즈 키요시 : 순천향대 초빙교수, 극동대 겸임교수·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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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루트 1만㎞ 대장정
어웡크족·다구르족 언어에서 고대 한국어와 고구려 언어 흔적 발견
대흥안령 지역에는 어웡크족, 오룬춘족, 다구르족 등 여러 몽골로이드계 소수민족의 언어가 남아 있다.
우리는 흑룡강성과 대흥안령 지역의 여행을 계속했다. 2007년 7월 21일 우리는 하일라얼(Haila’er)에 있는 어웡크(鄂溫克, Owongku, 혹은 에웽키, 에벵키)족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나는 그 박물관의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어웡크어로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런 연습을 하는 까닭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언어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어체 언어를 내 귀로 직접 듣기 위한 것이다. 그 젊은 어웡크 여성은 1~5까지 셀 줄 알았으며, 모르는 나머지는 휴대전화로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다구르민족박문관에 전시된 사진(위)과 모리다와 시내에서 열린 다구르족 행사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킨다.
이틀 후인 23일 우리는 알리사(Alisa)에 있는 오룬춘(鄂倫春, Orunchun)족 박물관을 방문했다. 거기서 나는 한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역시 오룬춘어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숫자 세기가 어렵자 자기 친구에게 달려가 조그만 오룬춘어 어휘 책자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 책자에 있는 숫자들을 그대로 읽었으며, 발음은 그 책자에 나와 있는 간단한 표기보다 훨씬 나았다. 분명 언어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인 24일 우리는 다우얼(達斡爾, Dawoer, 혹은 다구르, 다후르) 민족 문화 공원과 박물관을 방문했다. 모리다와 다우얼 자치구(Molidawa Dawoer Autono-mous County)의 장이라는 한 노인이 나에게 다우얼어 숫자 1~10을 말해주었다. 그는 숫자 세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며, 중간에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 10 이상의 숫자를 셌다.
현장에서 이런 자료들을 분석해보다가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즉 몽골어와 퉁구스어 양자의 원래 파열음 체제(plosive systems)에서 유성/무성 대응(the voiced/voiceless contrast)은 대체로 북부 중국어 파열음 체제의 대기음/비대기음 대응(the aspirated/non-aspirated contrast)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몽골어에서 d:t 대응을 가진 4 dorb: 5 tap가 다우얼어에서는 t:th 대응을 가진
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그 80대 노인이 말하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지난 100년에 걸쳐 채집한 모든 언어학적 자료들은 비교 자료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주의 깊게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은 다수 민족의 합중국
이제 에벵키족이나 다구르족 아이들이 자기들 언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외국 학자들이 쓴 책과 논문들을 찾아봐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 같다. 만일 이 민족 언어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면, 민족 집단과 그 문화는 곧 사라질 것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다구르족 노인 아르다합씨는 다구르어로 1~10까지 어렵지 않게 말했다.
이 언어들에는 먼 옛날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해온 흔적과 고구려 제국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모두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나는 26살 때 내가 자란 곳을 떠나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의 밤은 어두웠지만, 검은 아프리카인들은 어두운 밤보다 검었고, 오로지 눈의 흰자위와 웃을 때 보이는 이만 하얄 뿐이었다. 과거 500년 간의 아프리카 역사는 그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노예 무역과 식민 통치로 파괴됐다.
아프리카 민담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친절하게 대해도 불친절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대흥안령 지역 소수민족 박물관 또는 기념관의 동상들. 다구르족, 어웡크족, 오룬춘족 전사의 모습이다(위부터)
하지만 타인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즐거이 하면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온 아프리카인들은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과거 식민 지배를 한 서구제국 팀들을 격파했다. 한국인의 ‘할 수 있다’ 정신이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자신들의 과거 영광을 일깨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제 그들의 신체적 역량은 스포츠와 같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아시아 역시 어두운 역사를 가졌지만, 아프리카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족감(自足感)과 타인에 대한 친절함은 아시아인에게로 유전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래로 한국에는 조선이라는 하나의 왕조가 있어왔으며, 중국에는 명(明)과 청(淸)이라는 두 왕조가, 그리고 소아시아에는 투르크족의 오토만 제국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듣고 유럽의 지식 계층들은 놀라워 했다.
유럽인들이 침입해오기 전에 아프리카 역사는 밝고 평화로웠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는 이집트 문명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을 때 종말에 이르렀다. 이집트는 동방으로부터 힉소스(Hyksos)라고 불리는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은 짧은 기간(BC 1670~1570) 외에는 거의 3000년 동안어두운 시기를 겪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그리고 수메르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 집단이 셈어계(Semitic) 민족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중국에서는 한민족(漢民族)과 알타이어계 민족 집단들이 거의 교대로(송, 원, 명, 청) 지배해왔다.
커다란 혼란기(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 하나로 통일된 평화로운 시대(진, 한)가 이어졌다. 알타이어계, 한족(漢族)계, 그리고 다른 계열 문화들이 하나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오고(5호16국),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렇게 중국은 한족계(당, 송)나 아니면 알타이어계(요, 금, 원)에 의해서 다시 통합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EU가 유럽인 국가들의 연합인 것처럼, 현대 중국은 56개 소수 민족 집단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몽골로이드 여러 민족 집단의 합중국(合衆國)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동적인 알타이어계 민족들은 창조적이지만, 정적인 한족계 민족은 알타이어계의 모든 것을 부수어 삼켜버리고 있다. 한족들은 북동부 중국에 있는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 역사가 한족 역사라는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중국 전체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민족들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북동부 중국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합중국의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의 역사다.
황하문명은 몽골로이드 문명
중국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그 문자 전통에 있다. 이집트 신성문자가 이집트 문명의 기초적 요소였듯이, 중국어 글자는 역시 중국 문명의 기본이다. 이 두 글자 모두 상형문자이므로, 일(日, sun), 구(口, mouth), 목(目, eye), 인(人, person) 같은 비슷한 형태의 문자가 많다.
그러나 상·하 이집트가 BC 2850년에 통일된 직후 이집트 신성문자가 만들어졌고, 반면에 가장 오래된 중국어 글자인 갑골문자는 BC 1300년쯤 이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집트 신성문자는 중국어 글자보다 1500년 이상 오래 되었다. 이런 시간적인 차이는 이집트의 필기 체제나 그 기본구조가 중국이나 고조선을 포함한 기타 알타이어계 지역들에 도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골문자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꼭 중국인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본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연대가 BC 5000년대까지 올라가는 내몽골에 있는 홍산문화 지역과 기타 고고학 유적지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랜 연대와 비교되는 것으로, 우리는 우랄-알타이어계, 시노-티베트어계, 남아시아어계(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어계, 그리고 몽골로이드들이 사용하는 기타 어족의 조상들이 모두 이 오랜 문화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은 또한 고조선의 영역이기도 하면서 발해만과 서해(황해)와 마주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곳 바다를 ‘고조선의 지중해’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 본토 서쪽까지 포함하는 일명 황하 문명이 분명 순전한 중국인 문명이 아니라, 고조선인들을 포함한 알타이어계 민족들이 한족과 기타 몽골로이드 민족들과 함께 만든 몽골로이드 문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미즈 키요시 : 순천향대 초빙교수, 극동대 겸임교수·언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