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2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2-12-07 05:50본문
1920년대 연변에 전파된 맑스주의 서적들
연변에서 공산주의운동 흥기
맑스주의사상 연변대지에 뿌리내리고
조선인들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궐기
아세아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1917년 11월 7일(로씨야력으로는 10월 25일) 로씨야 무산계급은 레닌의 령도하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게린스끼의 자산계급림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인 쏘베트정권을 성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는 동방 약소국 인민들에게 민족해방과 독립의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반일무장투쟁을 벌려오던 무장단체들과 반일조직의 간부들은 일제의 야만적인 “경신년대토벌”로 연변을 떠나 조선인이 많이 살고있는 쏘련 극동지방으로 넘어갔다. 진보적청년들은 빨찌산을 무어 쏘련 붉은군대와 배합하여 청소한 쏘베트정권보위전에 참가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사회주의10월혁명을 믿게 되었다. 중국에서 구민주주의의 쓴맛을 볼대로 본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난시기 민족해방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되였으며 맑스주의리론의 지도밑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로씨야 연해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인농민들의 실태를 조사하던 리동휘는 게린스끼림시정부의 헌병 구석성에게 “독일특무”라는 혐의로 체포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리동휘는 감옥에서 쏘련 볼쉐비크들과 사귀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게 되었고 10월혁명을 인식하게 되었다.
감옥밖에서는 김립, 리한영, 김하구 등도 10월혁명을 지지하고 볼쉐비크에 의거하여 리동휘를 감옥에서 구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리동휘의 사상은 진일보 전변되여 로농혁명을 주도하는 볼쉐비크와 쏘베트정권을 옹호하게 되었다. 리동휘는 쏘련공산당 하바롭스크당부의 비서이며 원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인 조선인 알렉싼드라 뻬뜨로브나 김의 도움으로 진일보 사회주의혁명에 전심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리동휘는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로씨야볼쉐비크당원들의 방조밑에 아세아지구에서의 첫 맑스-레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은 리동휘의 지도하에 쏘베트정권옹호, 외국무력간섭격퇴, 토지개혁실시, 세계무산계급과 약소민족해방진영과의 련대성 등 정강을 공포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그 약법 제3조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강령을 내세웠다.
1) 사회주의국가를 조직한다.
2) 일체 계급을 타파한다.
3)토지 및 일체의 생산업을 공유한다.
1920년 리동휘는 국제공산당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한 박진순 등과 함께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창시자인 리대소, 진독수, 일본의 사회혁명가들을 만나 동방 각국에서의 공산주의사상의 전파를 토론했다.
아울러 리동휘는 관내에 있는 조선청년들에게 10월사회주의혁명정황, 국제공산당에서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성원한 사례와 맑스주의와 로농혁명사상을 통속적으로 소개했다. 리동휘 등의 영향하에 일부분 조선인들은 중국의 사회주의신앙자들과 함께 “중한로농동맹련합회”를 성립, 두나라 로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하면서 어깨곁고 공동의 적과 투쟁할것을 결의하였다.
공산주의사상의 전파
리동휘 등은 조선인청년사회주의신앙분자들을 자신들의 주위에 굳게 뭉치게 한후 사회주의연구회, 조선인사회과학연구회 등 맑스주의연구소조를 성립하였다. 특히 북경의 조선인학생들은 맑스주의연구소조를 결성한후 맑스주의사상을 학습연구하는 한편 경상적으로 리대소 등 중국공산당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1921년, 상해에서 활동하던 리동휘 등은 국제공산당 원동부의 지원으로 조선문인쇄소를 세우고 《공산당선언》번역본을 비롯한 맑스주의서적을 출판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은 사회주의기치하에 로농혁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것을 선전하였다.
그해 1월 리동휘, 김립 등은 상해에서 한인사회당대표회의를 소집한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5월 23일부터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당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강령에는 장차 조선에서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하며 현단계에는 민족독립을 실현한다고 했으며 “조국광복은 본 당인 공산 및 로농집정의 전제”라고 천명했다. 회의에서 리동휘가 당위원장에 당선되고 김립이 비서장으로 선거되였다.
고려공상당중앙총감부는 상해에 있었는데 1921년 중앙위원 김하구가 돈화에 와서 원 국민회의 구춘선, 강구우, 마진 등을 회견하고 국민회성원들을 고려공산당에 흡수,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총감부를 건립하였다. 총감부에서는 안무와 최량을 쏘련에 보내여 국민회 전체 성원들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다는것을 동양비서부에 회보하고 1922년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할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만주총감부는 돈화를 중심으로 간도, 열하 등지에 공산당조직을 확대하였다.
1920년 7월 로씨야에 거주하고있던 김철훈 등 조선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부대표의 지지밑에 “전로한인공산당”을 창립하였다. 1922년 11월에 이 조직에 가입한 인수는 4433명에 달아였으며 중앙본부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모스크바, 찌따, 하바롭스크, 니꼴라스크, 우라지워스또크, 대흑하, 할빈, 액목, 상해, 북경, 장춘, 평양 등지의 련락소를 통해 “붉은기” 등 신문, 잡지를 발행하여 10월사회주의혁명의 경험을 소개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윤복송, 정치운, 리주화, 우룡선 등은 조선과 로씨야로부터 연변에 들어와 룡정과 화룡에서 김홍선, 로창률, 리영규, 류태순, 장시우 등과 련계하여 조기공산주의단체인 간도공산당을 성립하였다. 후에 그들은 이르쿠츠파와 련합하여 화요파로 형성되였다.
중로변경인 이만,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던 리중집, 남공선, 최경천 등은 당지에서 공산주의단체를 성립한후 림산, 동녕, 녕안고 훈춘에 공산주의 기구와 청년회조직을 세우고 활동했다. 1921년 니고리스크와 녕고탑에 총리부를 세운 한족공산당은 녕안, 돈화, 국자가, 투도구, 동녕, 훈춘, 대황구 등지에 많은 인원을 파견하여 공산당조직과 련락소를 세우고 사회주의간행물을 산포,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연변에 들어온 맑스주의 서적들
공산주의단체에서 산포한 서적과 간행물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과 동북의 여러곳들에 퍼져나갔다. 일본간도총령사관에서 초보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쏘련과 상해, 천진, 북경 등지에서 연변에로 전파되여온 신문, 서적과 간행물들은 매우 많았는바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몰수한 수자만 하더라도 아래와 같았다.
1922년 122종 4208건
1924년 164종 3450건
1925년 201종 4408건
1926년 259종 3606건
주요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자유보”, “새세계”, “로농세계”, “붉은별”, “붉은기”, “뭇별”, “로동신문”, “동아공산신문”, “투쟁보”, “대중시보”, “정보”, “화요”, “민언”, “경종”, “일세보”, “농민익보”, “로동보”, “농보” 등이 있었으며 잡지들로는 “서광”, “새사회 이르면”, “공산”, “효종”, “선구”, “광명”, “동우”, “홰불”, “붉은기 아래서”, “불꽃”, “로동자의 길” 등이 있었고 소책자로서는 《공산당선언》, 《로동조합이야기》, 《우리 무산계급이 나갈 길》, 《칼 맑스》, 《로씨야공산당 정치강령》, 《녀자해방》, 《로농! 공산당》 등 수십종에 달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상해, 북경 등지에서 출판된 “신청년”이나 “매주평론”과 같은 한문으로 된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들도 한족공산주의분자들의 손을 거쳐 길림, 연길 등지의 한족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조선인학생들속에 퍼졌다.
리봉, 관준언 등 한족지식인들은 연길에서 “신문서사”를 꾸려 학용품을 경영한다는 명의로 많은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구입하여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런 간행물들과 서적들을 통해 맑스주의 사상은 신속하게 연변조선인들에게 침투되였다. 이에 연변에 파견된 간도련락장교는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서 “적색의 거센 물결이 간단없이 간도를 적시고 있다. 심지어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에 경향하고있다”고 당황해했다.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통해 연변조선인들은 점차적으로 로씨야혁명길만이 살길이며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사회주의의 새국가를 창건하여 전세계인민들과 함께 영원토록 자유와 평등,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구미자본주의렬강들의 “공리는 강권을 이긴다”, “정의, 인도”, “민족자결” 등은 허위라고 인식하게 된다.
“연변에 전파되여 온 로씨야에서의 새로운 제도탄생의 소식과 더불어 전인류에게 새로운 인식을 안겨준 맑스-레닌주의사상은 일제와 봉건군벌의 야만적인 업압과 수탈로 허덕이던 연변조선인들에게는 해동을 약속하는 해볕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맑스주의전파와 더불어 조선인들의 혁명투쟁도 구민주주의혁명시기로부터 신민주주의혁명시기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맑스-레닌주의를 행동지침으로 삼게 된 조선인들은 조기공산주의단체의 령도밑에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기 궐기하게 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