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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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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2-12-1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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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 은진중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투쟁 기념사진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반일학생들 무장한 일제 경찰과 적수공권으로 박투

폭동위원회 민중단체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

 

 

연변을 휩쓴 반일학생시위

 

1929년 1월, 조선 광주에서 대규모적인 학생반일투쟁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들이 지펴올린 반일의 봉화는 료원의 불길마냥 서울, 대구, 부산, 평양 등지에서 세차게 타올랐으며 연변에도 파급되여왔다. 연변 각지 조선인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서 광주학생들을 성원하는 반일시위투쟁을 단행했다.

 

11월 26일(1929년) 화룡사립약수동학교의 학생들은 사립룡평학교, 두도구의 사립신흥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단행, 두도구거리에 떨쳐나섰다. 학생시위대는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 “조선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한다!”는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연변학생운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약수동청년회 책임자인 손철운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청년들을 휘동하여 시위물결에 뛰여들었다. 아동의 사립협동학교, 장인강의 사립일신하교, 세린하의 사립와룡동학교 등 학교의 학생들도 시위운동에 호응해 나섰다.

 

시위대렬은 거리를 메웠고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급해맞은 두도구일제령사분관의 무장경찰들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물호스를 내저으면서 시위대렬을 해산시키려고 날뛰였다. 적지 않은 시위골간들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굴함없이 시위운동을 계속 단행했다. 이날 대동구, 룡두산 등지의 사립학교 학생들과 명성촌, 내풍동, 신풍동 등지의 학생들은 놈들이 저애하는 바람에 미처 두도구에 이르지 못하고 개척리에 모여 시위를 단행했다.

 

1930년 1월, 대립자의 현립1교와 사립명동학교의 학생들은 대립자현소재지(당시 화룡현소재지는 대립자에 있었음)의 거리를 메우며 지나갔다. 수십명학생들이 민국경찰에게 체포되자 《민성보》사장이며 화룡현 교육국장인 관준언이 나서서 교섭하여 구출하였다.

 

1930년 1월 23일, 룡정의 각 중학교에서도 동맹휴학을 단행, 거리로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적인 지휘밑에 살을 에일듯한 풍설을 무릅쓰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학생들은 태극기와 수기를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광주학생사건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멸시를 반대한다!”, “노예교육을 반대한다!”는 등 구호를 높이 웨쳤다.

 

시위행렬이 일본령사관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경찰들이 총칼을 휘두르면서 적수공권인 학생들에게 덮쳐들었다. 대성, 동흥, 은진 등 중학교의 학우회간부들인 리영식, 김창준 등 50여명 학생들이 당장에서 체포되였다.

 

이에 분노한 학생 1000여명이 은진중학교 운동장에 다시 모여 성세호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은진중학교는 영국조계지안에 있었으므로 일제경찰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동흥중학교, 명신신녀자중학교,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의 학생들은 앞다투어 일제의 야만적만행을 규탄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들리였다. 일제 기마병 10여명이 조계지 철조망밖에 다달아서 호각을 불어대면서 시위대오를 해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보는체만체하면서 계속하여 구호를 웨치면서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일제 기마병들이 계속하여 호각을 불면서 야단치자 학생들은 철조망을 사이두고 경찰들과 항변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서 철조망을 뛰쳐나가 기마병에게 덮쳐들어 박투를 벌리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말에서 끌여내려 엎드려놓고 반주검이 되도록 두둘겨팼으며 놈들의 군도를 빼앗아 끊어놓고 옷과 모자를 찟어놓았다. 이것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무장한 일본경찰드로가 맞다들어 박투한 반일행동이였다.

 

1월 28일 룡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중학교을 중심으로 한 수백명의 학생들은 수기를 들고 다시 영국조차지에 모여 반일성토대회를 가지였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 거리에 몰려나가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는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자각적으로 이 시위대오에 가담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투쟁은 2월달에도 계속 일어났으며 뒤이어 전 연변에 파급되였다.

 

1930년 2월경에 사립어랑학교, 수성촌의 사립영동학교, 명암의 사립보진하교의 학생들은 베자루에 자갈돌을 넣어가지고 가서 이도구 구산장의 일제보통학교의 창문유리를 모조리 깨여버렸다. 이날 어랑하교의 한 학생은 종이로 만든 삼각기에 “일제는 중국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가지고 내려왔다. 분노한 학생들은 이도구경찰분서를 짓뭉개려 했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학생들의 반일시위가 있은후 일본경찰들은 수시로 각 중학교에 뛰여들어 학생들을 잡아다가 주모자를 사출해내려고 심문을 들이댔다. 허나 아무런 단서도 잡을수 없었다. 오히혀 학생들의 지대한 분노를 자아냈을뿐이였다.

 

2월 5일, 룡정의 각 학교의 학생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전동만학생폭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삐라를 살포하여 “전 동만학생들은 깨여일어나 적나라의 아성에 들어가 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동포들과 함께 전투를 하자!”고 호소하였다.

 

대규모적인 민중시위

 

얼마전부터 조선공산당조직과 련계를 가지게 된 중국공산당만주성위에서도 반제투쟁에 결부시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반일투쟁에 궐기시키기 위해 조선의 “3.13폭동”11주년을 계기로 각지 당조직의 지도밑에 집회 또는 시위운동을 거행하여 민중들의 항일운동을 제고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에서는 1930년 1월에 “3.1폭동”11주년을 계기로 농민, 학생과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적인 민중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만과 북만에 “ ‘3.1폭동’11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각기 조직하여 시위운동을 령도하기로 결정, 선전부장 장주련(장시우)을 연변에 파견했다. 장시우는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현재 화룡시 동성향 명풍촌)에 있는 조선공산당 평강구역국 책임비서인 유태순(후에는 중공 연화현 평강구위 조직부장)의 집에서 동만도(화요파) 책임비서 윤복송, 조직부장, 강석준, 선전부장 한별 그리고 연변학생련합회의 간부인 리동선 등과 함께 동만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동만의 각 군중대표자들로 “ ‘3.1폭동’11주년기념준비위원회” 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2월 20일경 “준비위원회”는 연변학생련합회, 동만조선인청년총동맹 등 대표 5명을 구성, 리동선이 총책임을 지교 표면지도를 하기로 하였다.

 

준비위원회에서는 각지의 민중들을 조직동원하는 한편 시위하는 당날 살포할 선전삐라와 수기 등을 만드느라 바빴다. 군중선동에 사용할 견문은 주로 장시우와 윤복송이 기안한것을 선전부장 강시준의 책임아래 3월 1일 전야까지 몇십종 약 30만장을 인쇄하였는데 장시우, 강석준, 윤복송, 한별 등은 유태순과 강만홍(박봉남 후에는 제1대 중공밀산현위 서기)네 집에 기숙하면서 낮이면 움속에서 밤이면 뒤방에서 등사기와 씨름했다. 유태순과 강홍만의 가족들은 붉은천과 흰천으로 수기를 만드느라 바삐돌아쳤다. 그들이 작성한 선전문 가운데 중요한것을 보면 “나가자 만세시위장으로!”, “선언”, “전 조선학생혁명자의 혁명적투쟁에 대하여 피압박대중에게 다시 고함” 등이였다. 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지금 조선에서 우리의 형제자매, 학생들은 개와 같은 일제놈들에게 몇만명이 체포되였고 구타, 살해되였다. 개와 같은 일본강도의 참을수 없는 학대와 학살을 반대하여 일어나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만세!

3.1폭동11주년기념일은 다가오고 있다. 이날 전 간도는 광범히 일어나서 적과 싸우자! 적기(赤旗)를 높이 들고 만세시위장으로 나가자! 무장폭동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과 간도에서 일제에게 체포된 혁명자를 탈환하라!

 

동지들이여, 우리의 혁명가들은 우리의 혁명적투쟁, 희생적혈투를 바라고있다. 동지들이여, 일제히 일어나서 투옥된 우리의 혁명적학생들을 탈환하자! 우리에게 고통과 압박을 가하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우리의 무장폭동을 련합하여 그놈들을 끝까지 박멸하자! 모든 방법을 다 리용하여 투쟁을 확장하고 폭동을 일으키자! 그리하여 즉시 로동자, 농민, 병사, 도시빈민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 ...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30여만장의 삐라와 수천폭의 수기를 동만 각지의 당, 단 세포에 배포하는 한편 직접 구두를 통하여 민중을 선동, 조직하게에 힘썼다.

 

그리하여 1930년 2월 28일 소오도구, 개척리, 대동구,수평동, 이도구, 장인강 등지의 농민들은 두도구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만세!”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검은 글씨로 쓴 붉은색, 흰색의 작은 기를 흔들면서 성세호대하게 시위운동을 벌리였다. 이튿날(3월 1일)에도 련속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룡정, 두도구를 비롯한 전 간도는 마치 무장폭동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두도구일본령사분관 경찰들은 룡정총령사관의 군경들의 도움밑에 민중시위를 해산, 탄압하려고 미쳐날뛰였다. 3월 1일 일제경찰들은 시위군중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하여 두도구령사관 마당에는 체포된 농민과 학생들로 꽉 차게 되었다.

 

“체포된 시위군중 가운데 문두찬이라는 장인강에서 온 15살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일제 경찰놈들은 소녀를 얕잡아보고 주모자가 누구냐고 따졌으나 입을 꾸 다물고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성난 일본경찰은 소녀의 머리태를 거머쥐고 흔들면서 위협공갈했지요. 이에 문두찬소녀는 ‘새벽닭은 누가 시켜 우나요? 우리들도 때가 되니 일떠섰어요!’ 라고 야무지게 대답하여 일본경찰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고’를 받고 석방되여 나온 문두찬소녀는 놈들이 감아쥐였던 자기 머리태를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가위로 뭉청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를 만들었습니다. 소녀는 계속 혁명의 앞장에 서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한 소녀의 생동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시 군중들의 혁명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시위에 동원된 군중들이 많고 기세가 대단한 것을 관찰한 “3.1”운동11주년기념준비위원회에서는 보다 규모가 큰 민중폭동을 계획하였다.

 

3월 5일 강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유태순, 리동선 등은 래풍동에서 희의를 소집하고 이번 시위투쟁을 총화하였다. 결과 민중들을 궐기시켜 무장폭동을 일으킬수 있다고 결정하고 준비위원회를 “전동만폭동위원회”로 성격전환하였다.

 

폭동위원회에서는 조직, 선전, 규찰대, 경리, 출판 등 부서를 설치하고 조직책임에 리동선, 선전책임에 리철한, 규찰대책임에 김상근, 경리책임에 리병식, 출판부책임에 안평을 가기 임명하고 행동에 돌입하였다.

 

폭동위원회의 활약부서가운데 규찰대가 있는것은 주목할만한 점이였다. 규찰대는 중앙대, 지방에는 지방대, 구역에는 구역대, 각 촌에는 분대를 설치하고 중앙대로부터 촌분대의 책임자는 모두 해당 당조직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지고 령도하기로 하였다. 규찰대 성원들은 민중단체의 골간분자들로 구성하고 각 촌 분대성원들로 하여금 각지의 지하조직과의 통신련락을 담당하는 동시에 반동분자, 일제경찰과 그들의 앞잡이들의 행동을 정찰, 감시하고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폭동위원회는 민중혁명단체를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하고 5월 1일에 폭동에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심간부들인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만폭동”계획은 3월 하순 일제의 간도총령사관에 포착되여 검거되기 시작하여 5월 중순까지 130여명이 체포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3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체포된 사람중 49명은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1931년 2월 5일부터 서울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위반의 “죄명”으로 공판을 받았는데 장시우는 10년, 윤복송은 9년, 강석준은 6년, 리병식은 8년6개월... 언도 받았다. 리동선, 한별은 검거선풍에 걸리지 않았으나 후날 “5.30폭동”, “추수폭동”에 앞장서서 투쟁하다가 체포되여 한별은 혹형으로 사망하고 리동선은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에서 피살되였다.

 

“한마디로 그번 폭동준비는 ‘좌’경모험주의의 그릇된 견해에 의해 지도된 행동이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관내 토지혁명전쟁의 경험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맹동주의적인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연변대학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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