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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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2-12-14 06:29본문
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
약수동쏘베트정부기념비.(2004년 사진)
약수동쏘베트정부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첫 반제 반봉건투쟁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 탄생
유서깊은 약수동
투도진을 떠난 취재차는 누른색을 띠게 시작한 8월(2004년)의 룡문벌을 누비면서 달렸다. 화룡시 아동저수지에 채 닿기전인 나지막한 언덕우로 뻗은 오른쪽 길로 가면 약수동이라 한다. 언덕길에 올라서니 생각밖에도 꽤 널직한 산벌이 펼쳐졌다. 농한기여서인지 밭에도 마을에도 사람그림자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길가에 나타난 짙은 농부차림의 사람과 “약수동쏘베트유적지”가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 ‘쏘베트’ 라는 것이 뭠두?” 하고 눈이 둥그래진다. 구구히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지라 기념비같은 것을 세운 곳이 어디 없는가고 물으니 손가락질로 마을밖을 가리킨다. 바라보니 좀 멀리 눈에 확 띄우는 버드나무 한그루가 보이고 그 주위에 하얀 비석으로 보이는 물체가 알렸다. 거기까지 풀이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올퉁불퉁한 수레길이 뻗어있었다.
농부가 가리킨쪽으로 간신히 차를 몰아가니 아닌게 아니라 약수동쏘베트유적지였다. 기념비는 두곳에 세워져있었다.
먼저 오래 된 기념비를 가보았다. 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데 앞쪽것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석비이고 한자쯤 뒤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래된 목비였다. 석비엔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약수동항일기념지 화룡인민정부 1985년6월1일”이라는 조한문으로 된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금방 뒤에 세워진 목비는 이미 거묵하게 썩기 시작하고있었는데 손톱으로 뜯어보니 나무보풀이 쉽게 떨어졌다. 앞면에는 조한문으로 “약수동항일기념지”라고 씌여져있는데 짙은 옥색만은 색바래지 않고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역시 조한문으로 씌여져있었다.
1930년 5월 27일 이곳에서 동북에서의 첫 번째 쏘베트정부가 성립되였다. 1930년 6월 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성립되고 서기로서는 리봉삼이였다. 1930년 7월 10일 중공평강위워원회가 성립되고 서기는 주현갑, 조직부장은 리주헌, 선전부장은 황룡문, 비서는 윤준걸, 유일환이였다. 아래에 12개 지부가 있었다. 평강구위는 선후로 약수동-어랑촌-마고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전부 파괴되였다. 1930년 8월 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성립되고 서기로는 김창일, 조직부장은 정만준, 선전부장은 한별, 군사부장은 박윤세였다. 1932년 음력 11월 4일에 항일녀영웅 김순희와 호조회장 정태준 등 13명 동지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였다.
목비 왼면에는 “一九八六年九月三日”이라고 씌여져있고 오른쪽면에는 “화룡시인민정부”(조한글자)라고 씌여져있었다. 글자가 희미하고 어떤 것은 지워져있어서 조한글자를 대조해보면서 겨우 이만큼 맞출수가 있었다. 기념비뒤에는 한그루의 오얏나무가 휘여지게 자라고있었는데 색고운 오얏들이 얼핏얼핏 눈에 띄였다. 그뒤로는 해바라기밭이 펼쳐져있는데 둥실한 해바라기꽃들이 환히 웃고있었다. 해바라기밭은 살구나무과원과 잡목으로 우거진 산자락을 배경하고있어 한결 우아해보였다.
금방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고있었는데 개울물소리가 가을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한결 정다왔다. 한길가량 되어보이는 얕은 골짜기를 건너뛰여 이번엔 새롭게 세운 기념석비를 가보았다.
화강암으로 다듬은 2메터남짓 되어보이는 기념석비정면에는 “약수동항일기념비(조한문)”, “순난렬사만세!(조한문)”라는 짙은 붉은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약수동쏘베트정부 탄생
1930년 5월에 진행된 “붉은 5월 투쟁”은 5월 23일부터 부분적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에로 넘어갔다. 약수동, 투도구, 달라자, 삼도구 등지의 농민들은 공산당조직의 령도밑에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료계약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버렸다. 그들은 또 지주, 토호렬신 및 친일주구들의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1930년 4월말 황포군관학교출신인 조선족공산당원 신춘(申春)을 혁명군중기초가 좋은 약수동일대에 파견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하도록 했다. “붉은 5월 투쟁”속에서 약수동의 농민들은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지주의 장원으로 쳐들어가 지주의 고리대문서를 태워버리고 량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 5월 27일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농민군중들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약수동 상촌의 팔간집마당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신춘은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이는 동북에서의 첫 민중정권의 탄생이였다. 그것도 일제치하와 봉건통치배들의 코앞에서 벌어진 력사적장거였다.
신춘은 쏘베트정부의 창립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창립의 력사적의의와 그 사명에 대하여 얼음에 박밀 듯 피력했다. 신춘의 열정적인 연설은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켜주기에 족했다. 대대손손 착취와 빈궁의 멍에에 짓눌려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온 가난한 무권리 농민들로 놓고보면 이건 크나큰 경사였다. 군중들은 쏘베트정부의 성원들을 선출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정부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자!”
“토지혁명을 실행하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수백명 군중들은 목터져라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약수동학교의 소선대원들은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구호와 노래소리가 삽시에 약수동 하늘가를 진감하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은 여지없이 하노라
시위대 군중들은 지주와 일제주구놈들의 집앞에서 더 힘차게 구호를 웨치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 시위는 사흘동안 계속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일제주구 몇놈을 붙잡아 처단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를 들춰내여 불태워버렸다. 리경천 등 10명으로 조직된 농민적위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하면서 농민들의 시위투쟁을 보위하였다.
약수동의 농민들은 쏘베트정부창립대회의 결의에 따라 “5.30”폭동의 거세찬 투쟁에 뛰여들었다. 폭동후 일제경찰들은 약수동에 덮쳐들어 100여명의 청년을 체포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제의 련속부절한 탄압으로 활동을 전개할수 없게 되었다. 하여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창립되여 3일만에 부득불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같은해 8월말 중공평강구위에서는 약수동의 농민들을 령도하여 재차 토지혁명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약수동 웃마을의 약수동쏘베트가 창립되던곳에서 또다시 쏘베트대표대회를 열고 “쏘베트건립대회결의안”을 채택하고 평강구쏘베트정부의 창립을 선고했다. 대회에서는 리봉삼(李鳳三)이 구쏘베트정부 주석으로 당선되고 정부내에는 선전, 행정, 경제, 군사 등 부서를 두었다. 같은해 10월 중공평강구위는 투쟁의 수요에 따라 약수동을 떠나 장인강쪽으로 이동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잠시 취소하고 농민협회가 쏘베트정부의 사업을 대체하게 하였다.
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에서의 하나의 큰 사변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의 “좌”경로선의 산물이였다. 이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붉은 5월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여 일으킨 첫 번째 반제반봉건투쟁입니다. 이 운동을 통하여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투쟁이였지만 이번 투쟁은 거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조선인군중가운데 파급시켰습니다. 이번 투쟁을 거친후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의 교훈은 ‘좌’경이였습니다. 경황없는 상황에서 진행하였기에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키지 못한 오유를 피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
약수동은 또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던 고장이기도 하다. 회의장소는 쏘베트정부가 있던 마을(지금의 약수동마을 서북쪽 1.5킬로메터되는 산기슭) 한가운데 자리잡고있던 70여평방메터되는 조선식초가집이였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집터자리가 약간 남아있을뿐이다.
1930년 7월,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인 왕경(조선인)은 중공만주성위 비서장 료여원과 함께 연변으로 되돌아왔다. 료여원은 성당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원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을 심사하러 왔던 것이다. 료여원과 왕경은 친히 각 현에 가 원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사업을 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연변의 중공당조직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런 토대에서 7월하순 료여원과 왕경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건립준비사업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6일간 열렸는데 도합 15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동북에서의 조선인농민투쟁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데 관한 지시정신을 학습하고 구당위를 건립하고 당원대표대회를 선거하는 등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회의후 회의에 참석했던 당간부들은 각지에 내려가 연화중심현위의 건립을 위한 준비사업을 하게 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은 친히 약수동에 내려가 평가구당원대표회의를 열고 주현갑을 서기로 한 중공평강구위를 건립하였다. 공산당조직에서는 약수동을 당사업의 토대가 매우 좋아 당의 회의를 열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지목하고있었다.
1930년 8월 13일, 각지에서 온 당원대표들은 약수동 웃마을에 모였다. 대표대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의 책략과 총로선을 관철할데 대한 조치를 세우고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한 사업을 총결하였으며 7명의 위원과 2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를 선거하였다. 이들가운데는 원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 마준, 원 조선공산당 당원이였던 김성도, 한별, 리용국의 전(全, 양말제조로동자), 최(건축로동자), 리(빈민)씨 성을 가진 당원대표도 있었다. 중공연변연화중심현위 위원회 부서와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았다.
서기 왕경(조선인), 조직부장 마준(조선인), 선전부장 한별(조선인), 군사부장 박윤서(조선인), 청년부장 리용국(조선인), 녀성부장 김여신(녀, 조선인)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산하 직속인 연변에서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였다. 중심현위 산하에는 개산툰구위 등 10개 구당위와 61개 기층당지부가 있었으며 당원은 도합 480명 있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농민운동을 힘껏 발전시키였으며 공산당조직과 공청단조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하여 토지혁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적위대, 유격대 등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혁명위원회를 건립하여 지방폭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리하여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연변지구의 당산당원, 공청단원들은 근 천여명이나 되었고 여러 대중단체들에는 5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이런 조직영향하의 군중들은 5만여명에 달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