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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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3-03-01 11:58본문
하바롭스크에서의 동북항일련군 장령들.
앞줄 왼쪽 두번째로부터 리조린, 왕일지, 주보중, 김일성.
앞줄 왼쪽 두번째로부터 리조린, 왕일지, 주보중, 김일성.
쏘련에서의 야영훈련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 설립 항일련군 재편성
야영지에서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훈련 강행
야영지에서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훈련 강행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 설립
우세한 적들과의 끊임없는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항일련군은 무모한 희생을 피면하고 유생력량을 보존하며 정치, 군사적 자질을 높이는 한편 력량을 부단히 장대시켜 항일투쟁을 끝까지 견지하기 위하여 1940년말부터 대부대를 륙속 쏘련경내로 이동시킨후 야영훈련을 조직하였다. 야영훈련에는 동북항일련군 각 군에서 사업하던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 강신태 등 많은 조선인 지휘원들과 전투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다른 항일련군대원과 함께 남북 두 개 야영지에 나뉘여 훈련하면서 수시로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하였다.
우세한 적들과의 끊임없는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항일련군은 무모한 희생을 피면하고 유생력량을 보존하며 정치, 군사적 자질을 높이는 한편 력량을 부단히 장대시켜 항일투쟁을 끝까지 견지하기 위하여 1940년말부터 대부대를 륙속 쏘련경내로 이동시킨후 야영훈련을 조직하였다. 야영훈련에는 동북항일련군 각 군에서 사업하던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 강신태 등 많은 조선인 지휘원들과 전투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다른 항일련군대원과 함께 남북 두 개 야영지에 나뉘여 훈련하면서 수시로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하였다.
“쏘련으로 들어가 두곳에 야영훈련기지를 설치했는데 한곳은 A영(북영), 다른 한곳은 B영(남영)이라고 불렀습니다. 먼저 들어간 곳이 북영인데 나꼬롭스크의 중간지에 있는 지방이였습니다. A영은 흑룡강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흑룡강을 로어로 아무르강이라고 부르기에 그 첫 자를 따다가 A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제2로군의 총부와 제3로군의 총부가 들어와 밀영을 세웠습니다. 제1로군은 쌍성자와 울라지보스또크 중간지대에 있는 곳에 가 밀영을 잡았는데 그곳 이름을 부쉬로부라고 불렀기에 첫 자를 따서 B영이라고 불렀습니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앞으로의 반공(反攻)을 준비하여 일반군사활동뿐만아니라 공중락하, 무선전 등 선진적인 특수기술도 학습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야영훈련에 대한 소개였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속에서》에서 “그 당시 내가 들은데 의하면 1로군의 500여명과 2로군의 일부를 합하여 700여명이 제1야영훈련소로 가고 2로군의 대부분과 3로군 도합 1000여명이 제2야영훈련소로 갔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야영훈련에 참가한 장병들중 절반이 조선인이였다고 한다.
연변의 아들딸들로 조직된 남야영에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제3방면군, 경위려가 배속되였는데 “실력을 집중시키고 간부를 보존하며 정돈을 진행하고 부대를 분산시켜 활동한다(收縮實力, 保存干部, 進行整頓, 化整爲零, 分散活動)”는 방침을 시달하기 위하여 남야영의 부대를 재편성하고 당조직을 완벽하게 했다. 1941년 3월, 국경을 넘어온 1로군부대를 1로군 제1지대로 개편, 김일성이 지대장을 맡고 안길이 참모장을 맡았다. 아래에 두 개 대대를 두었다. 남야영에 함께 주둔하고있던 2로군 5군을 2로군 제5지대로 개편, 시세영에 중공남아영위원회를 건립하고 리청을 서기로, 시세영, 김일성, 박덕산을 위원으로, 최현, 김윤호를 후보위원으로 선거하였다.
북야영에서도 당조직을 새롭게 건설하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1941년 4월 13일, 쏘련과 일본은 “쏘일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중국경내로 들어가 활동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쏘련측의 요구에 의해 항일련군은 소부대를 동북에 파견하여 임무를 집행하게 하는 외에 대부대는 남북야영훈련소에 남아 정치, 군사 훈련을 하게 했다.
1942년 8월, 남북야영훈련소와 동북에서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부대를 통일적으로 항일련군교도려로 개편, 명의상에서는 쏘련극동군에 예속시켰다. 정식번호는 쏘련극동홍기군독립88려(蘇聯遠東紅旗軍獨立88旅)였고 대외번호는 8416보병특별려였다 그러나 내부로는 의연히 항일련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있었다. 주보중이 교도려 려장을 맡고 장수전(리조린)이 정위를 맡았다. 아래에 4개 영과 2개 련을 두었는데 1로군을 기간(基干)으로 제1영을 편성, 김일성이 영장을 맡고 안길이 정위를 맡았다. 2로군 제2지대를 기간으로 제2영을 편성, 왕효명이 영장을 맡고 강신태가 정위를 맡았다. 3로군을 기간으로 제3영을 편성, 허형식이 영장을 맡고 김책이 정위를 맡았다. 제2로군 제5지대를 기간으로 제4영을 편성, 시세영이 영장을 맡고 리청이 정위를 맡았다. 려, 영의 부직(副職)은 쏘련측에서 파견한 인원들이 담임했다.
1942년 9월 13일, 중공동북항일련군전당대회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을 설립하였다. 회의에서 특별지부국 제1기 집행위원과 후보위원을 선거하였다. 주보중, 장수전, 최석천(최용건), 김일성, 김경석, 팽시로, 왕명귀, 김책, 왕효명, 안길, 리청이 집행위원으로 당선되고 왕일지, 심태산이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서기에 최석천, 부서기에 김일성, 김경석이 당선되였다.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은 중공항일교도려위원회와 동북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이였다. 이로부터 동북당조직은 통일령도가 있게 되었고 동북항일련군은 통일적인 지휘가 있게 되었다.
야영정치군사훈련
전투가 빈번하여 여태까지 군사훈련과 정치, 문화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항일련군 대원들에게 있어서 이번의 야영훈련은 참으로 뜻깊은 나날이 아닐수 없었다. 야영에 참가한 대부분 대원들의 문화수준은 높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는 문맹과 겨우 자기 이름자나 쓸줄 아는 사람이 30%나 되었다.
야영지는 심산밀림속에 건설되여있었다. 전사들은 자기들 손으로 병영을 짓고 훈련장을 닦았으며 량식창고, 피복창고, 병원, 재봉소, 강의실, 병기수리소 등을 꾸려놓았다. 밭을 일구어 남새도 가꾸고 사냥, 고기잡이도 하여 식생활을 개선하였다. 본격적인 야영훈련에 들어서자 전사들은 일과표에 따라 긴장하면서도 유쾌하게 군사훈련과 학습, 문화오락활동을 했다.
정치학습은 대원들의 문화수준에 따라 두 개조로 나누어 했는데 문화수준이 높은 대원들은 자체로 학습하고 토론을 위주로 했으며 문화수준의 낮은 대원들은 위주로 강의를 들었다. 장기간은 유격전쟁가운데서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라 대원들은 가물에 단비를 만난 듯이 학습에 열성을 올렸다. 주보중, 장수전, 풍중운 등 항일련군 지도자들은 무시로 야영훈련소에 찾아와 보고회를 조직하고 관내에서 싸우고있는 팔로군, 신사군의 전투적위훈을 소개하기도 하고 1941년 1월 7일에 발생한 환남사변의 경과와 환남사변후의 중국공산당의 태도를 상세히 알려주어 대원들의 항일투지를 더욱 북돋우어주기도 했다.
전사들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원리와 《쏘련공산당(볼쉐위크)력사》, 모택동의 《지구전을 론함》, 《당의 작풍을 바로잡자》, 주은래의 《쏘독전쟁과 반파쑈투쟁을 론함》, 주덕의 《동방민족반파쑈통일전선을 건립하자》 및 1936년의 《쏘련헌법》 등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으며 “중국민족해방전쟁의 력사적단계 및 승리의 조건”, “전국항일전쟁의 형세”, “동북유격운동의 발전전도” 등 문제를 놓고 열렬한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김일성은 조선인장병들에게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제목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학습을 거쳐 대원들은 맑스-레닌주의리론수준을 높이였으며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정신을 발양하여 반파쑈전쟁의 종국적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몸바쳐 싸워야 한다고 인식했다.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식자반을 꾸려 문맹퇴치를 하는 한편 한어를 잘 모르는 조선인전사들에게 조선말정치과목특별반을 꾸려 조선말로 정치과를 강의하였는데 김일성 등 고위급간부들이 친히 강의했다. 그리고 한어조를 꾸려 한어를 가르쳐주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로어를 배워주기도 하였다. 전사들은 벽보를 꾸리고 강연회를 조직하고 오락만회를 벌리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여 “계급각오”, 문화수준을 높여주었다.
군사과목은 주로 대렬훈련, 사격, 창격술, 정찰, 보초, 전달 등 내용이였다. 부분적대원들은 항공과 무선전 기술을 학습하였으며 락하산, 스키타기, 도강, 폭파 등 훈련도 하였다.
1941년 6월 22일, 파쑈독일은 신의를 저버리고 쏘련을 불의에 진공하였으며 12월 7일에 일본은 진주항을 불의에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 12월 8일,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월 11일,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세계대전은 더욱더 확대되였으며 선후하여 60여개 나라와 지구, 20억명 이상에 달하는 인구가 이 전쟁의 도가니속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직면한 항일련군장병들은 쏘련홍군과 어깨겯고 독일침략자와 일본침략자를 물리치는 전쟁에 뛰여들것을 강력히 탄원해나섰다. 야영당위원회에서는 “원쑤를 소멸할 기량을 더 잘 닦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하고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그리하여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등 과목을 더 늘이고 매일 8시간씩 꼬박 훈련에 돌입했다.
교도려에서는 소부대를 무어 동북지방에 계속 대원들을 파견하는 한편 쏘련원동군사령부에서 반포한 “보병훈련대강”에 좇아 전시의 수요와 동북유격전쟁의 실제에 결부시켜 체계적인 현대화군사훈련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으며 일부 특수기술과 기능도 배웠다.
1942년 9월말부터 10월초까지 교도려에서는 항공륙전대훈련을 조직하여 조선인전사들을 망라한 많은 남성대원들과 20여명 녀성대원을 참가시켰는데 특히 녀성대원들이 침착하고 용감하게 훈련에 림해 총교관의 칭찬을 늘 받았다. 주보중려장은 자기의 일기에 이들 녀전사들을 중국항공락하산기술력사의 중요한 한페지에 적힐것이라고 밝히면서 그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중에 조선인 녀대원이 10명 있었다. 그녀들로는 김창옥, 리명순, 김옥순, 김백문, 류명옥, 정만금, 김순희, 장경숙, 박경옥, 리영숙 등이였다.
여름철에는 수영도 배우고 도강훈련도 강행했으며 겨울철에는 스키타기를 익혔는데 꾸준히 노력한 보람으로 물에 들어서면 누구나 날래게 헤염을 칠수 있게 되었고 스키를 탈라치면 50킬로메터쯤은 손쉽게 달릴수 있게 되었다. 부대는 100여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정하고 스키를 타고가면서 수색, 매복, 불의의 습격, 부대내부에서의 호상정찰, 실탄사격 같은 종합군사훈련도 늘 했다.
야영정치군사훈련을 거친 동북항일련군의 조선인 지휘원과 전투원들은 그후 항일투쟁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