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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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3-03-05 06:07본문
쏘련홍군과 함께 동북으로 돌아온 동북항일련군 장령들인 강신태
(좌), 주보중(중), 김광협.
연변인민민주정권의 건립
처음으로 연변인민대표대회 거행 민주정권 건립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결성 10대 시정방침 반포
연변인민주대동맹
“쏘련홍군이 연변에 진주한 후 얼마 안되어 ‘간도림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주석은 괴뢰만주국간도성 부성장이였던자이고 정부의 직원이란 모두 괴뢰만주국 간도성공서에서 일하던자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매국적, 주국, 간첩, 경찰 등 잔여세력들이 재생의 희망을 품고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중공연변위원회는 지희겸과 강동주에게 만주대동맹조직준비사업을 맡겼습니다. 1945년 10월 27일,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 3차위원회확대회의가 열리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총동맹을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재조직하였으며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하고 전상근 등 27명을 위원으로 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건립에 대한 연변대학 최홍빈교수의 력설이다.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가 해체된후 붉은 군대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그해 8월 24일, 지희겸, 강동주, 박동운 등이 룡정, 연길, 조양천 등지에서 선후하여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을 결성하였다. 혁명적군중단체를 더욱 단결시키고 통일하기 위하여 9월초에 여러 지방 군중단체 대표 20여명이 룡정에 모여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을 결성할 것을 협상, 토의하고 지희겸, 박근식, 남창수 등으로 총동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9월 19일, 연길에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대표대회가 열렸다. 연길과 화룡 두 개 현의 대표만 하여도 600여명이나 되었다. 회의에서는 지희겸, 박근식, 유일환, 강동주, 남창수, 전상근 등 30명의 위원을 선거하고 강동주를 위원장으로 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0월20일, 중공동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동북항일련군 연변분견대의 강신태를 서기(군사부장 겸직)로, 강동주(조직위원 겸직), 지희겸(선전위원 겸직), 전윤필, 박근식 등을 위원으로 한 중공연변위원회가 건립되였다. 동북위원회는 민주대동맹을 동북에서 군중을 조직, 동원하는 주요한 형식으로 삼으라고 연변위원회에 지시, 연변위원회에서는 민주대동맹이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보다 더욱 광범위한 군중성을 띄였다고 인정하였다. 동시에 연변위원회 선전위원 지희겸에게 민주대동맹조직준비사업을 맡겼다.
10월27일,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 제3차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을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재조직하고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에 따라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선거하고 전상근 등 27명을 위원으로 하는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회의에서는 민주대동맹선언과 강령을 토론, 채택했다. 강령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전국의 통일과 단결, 평화, 민주 및 진보를 수호한다.
2. 광범위한 민주의 토대우에서 국민대회를 소집하고 민주련합정부를 건립하기 위하여 분투한다.
3. 일치 단결하고 호상 협력하여 국제 평화와 안전을 조장하자는 유엔의 주장을 옹호한다.
4. 중쏘우의와 련맹을 공고히 한다.
5. 일본군국주의와 파쑈주의를 숙청하며 중국을 침략한 일제의 장여분자를 숙청한다.
6. 신민주주의적삼민주의를 옹호한다.
7.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및 남녀평등과 인권을 보장한다.
8. 각 시, 현 국민회의에서 민주선거로 민주자치정권을 건립한다.
9. 간첩과 매국적을 인민재판에 넘겨 처리하며 그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인민에게 분여한다.
10. 중국을 침략하고 략탈한 일제의 재산, 토지, 건물을 몰수한다.
11. “밭가는자에게 밭을 준다”는 구호밑에 농촌의 합작조직을 발전시킨다.
12. 감조감식을 실시하며 가렴잡세와 부역을 페지한다.
13. 교육을 보급시키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킨다.
14. 빈고농민과 리재민을 구제하며 로동자의 생활을 개선시킨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이 건립된 뒤를 이어 각 현에서는 민주대동맹본부를 설립하고 구와 촌에는 민주대동맹 지부와 소조를 두었다. 연변철도조합도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총부에 귀속되였다. 1946년 2월까지 각급 민주대동맹조직건설사업이 끝났는데 맹원 총수는 14만 5000명에 달하였다. 그중 조선족이 94%남짓이 차지했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건립된 이래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자기의 정치적주장과 투쟁강령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동맹은 중국공산당의 정치주장과 방침정책을 적극 선전했으며 인민의 자위무장대오를 건립하여 일제와 괴로만주국 잔여세력과 토비를 숙청하는 투쟁가운데서 적극적인 력활을 했다. 그리고 연변경내의 철도운수를 회복하고 관리하였으며 민주적으로 구, 촌의 림시정권을 세우고 매국적주구청산투쟁을 벌렸다.
중국공산당의 기층조직과 기층민주정권이 정식으로 건립되기전에 현, 구, 촌의 민주대동맹은 민주정권의 역할을 하였다. 민정을 관리하고 생산을 조직하여 교육사업을 강화하고 리재민을 구제하는 등 사업을 하였으며 군중을 발동하여 죄악이 극히 큰 매국적주구들에 대한 청산투쟁을 진행하였다. 화룡현 두도구민주대동맹에서는 만인대회를 열고 괴로만주국경찰서장 등 우두머리들을 공개재판하고 즉시 총살하였다. 룡정에서는 매국적을 정산하는 대회를 열고 정사빈, 리금석, 리수수 등 주구, 특ㅁ를 공개재판하고 총살하였다.
1946년 7월, 중공동북국의 결의정신에 따라 민주대동맹의 간부와 골간들은 농촌의 토지개혁 공작대와 민운공작대에 참가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민주정권이 보편적으로 건립되자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자기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1946년 8월 해체되였다.
민주정권 건립
1945년 11월, 중공중앙동북국과 길림성공작위원에서는 연안간부 옹문도 등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의 민주정권건설이 실제적으로 전개되였다. 1월 15일, 동북국과 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정신에 쫓아 중공연변위원회를 중공연변지방위원회로 바꾸었다. 연변지방위원회위원은 옹도문(雍文濤), 강신태(姜信泰), 박일우(朴一禹), 진탄(陳坦), 운청(雲靑), 구회괴(邱會魁) 등 7명이였고 옹문도가 서기를 맡았다. 지방위원회는 연길, 화룡, 훈춘, 왕청, 안도 등 5개 현을 관할했다. 지방위원회에서는 간부를 각 현에 파견하여 현당위와 인민정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5일, 중공연길현위원회와 연길현인민정부가 설립되였는데 옹문도가 서기를 겸하고 왕품일(王品一)이 현장을 맡았다. 역시 11월 15일, 연안간부 진탄, 주개문(周介文), 소춘선 등이 왕청에 파견되여 가 중공왕청현위원회를 새롭게 조직, 진탄이 서기를 맡았다. 이날 왕청인민민주대동맹대표대회를 열고 왕청현림시정부를 철소, 새롭게 왕청현정부를 건립, 주개문이 왕청현 현장으로 추천되였다. 역시 11월 15일, 연안간부, 운청, 진홍조 등이 화룡에 가 중공화룡현위원회를 설립, 운청이 서기를 맡았다. 11월 19일 첫 화룡현정무회의를 개최, 화룡현림시정부를 철소하고 새로운 화룡현정부를 성립했다. 김정계를 새로운 현장으로 추천했다.
11월 20일, 연변지방위원회의 령도아래 연변인민대표대회를 열고 민주정권건설사업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였다. 대회에서 지희겸이 대회준비경과보고를 하였으며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 정무위원들로 구성된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를 결성했다. 정무원 위원으로 관선정(서버족), 동곤일 등 3명이 선거되였는데 그중 강신태, 림계학, 지희겸, 박근식, 강동주 등이 조선인이였다. 관선정이 전원으로 동곤일이 부전원으로 선거되였다. 연변정무위원회에서는 간도림시정부를 철소했다. 대회에서는 일본인처리문제, 간도시 개칭문제, 왕청현 반동분자에 관한 문제와 괴뢰만주국시기에 건립한 충혼비, 기념비파괴문제 등 9개 의안을 채택했다. 대회에서는 또 “중한민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체 동포들이여! 이 위대한 명절을 기념하는 나날에 우리들은 쏘련홍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 자유와 행복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목전 중국의 정세를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목전 중국의 앞에는 두가지 전도가 놓여있다. 그 한가지는 국민당의 일당통치을 견지하며 민주개혁을 허락하지 않으며 중국으로 하여금 비독립, 비자유, 비통일, 비부강의 고통스럽고 암흑한 중국으로 나아가게 하는것이며 다른 한가지는 곤난을 극복하고 전국인민을 해방하며 일치단결하여 독재통치를 페기하고 민주개혁을 실행하며 민주력량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여를 철저히 숙청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독립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되고 부강하며 광명한 새중국으로 나아가게 하는것이다.
전 중국의 4억5000만 인민대중의 수백만 산업로동자, 수천만 수공업로동자, 3억6000만 농민 및 기타 광범한 자산계급, 게명신사, 애국인사들은 모두 두 번째 전도를 옹호하고있다. 중국공산당은 이 두 번째 전도를 위하여 옹근 24년을 분투하였다. 특히 항일전쟁에서 중국공산당 및 그가 령도하는 팔로군, 신사군은 9500만 인구를 해방하였고 강적의 압박과 국민당군대의 봉쇄하에서도 거연히 투쟁전렬에 서서 해방구를 발전장대시켰으며 적점령구를 축소시키고 해방구를 확대하고 민주개혁을 철저히 실행하였다.
중한민중들, 전국적범위에서의 민주개혁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른바 국민당독재란 그 실질은 국민당의 반인민적집단의 독재이다. 그들은 중국민중 대단결의 파괴자이며 중국인민이 민주개혁을 실행하는데서의 장애물이다. 국민다으이 일당통치를 철저히 페기하고 민주련합정부를 세워야 한다.
11월21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제1차정무위원회의가 열리였다. 동곤일, 류팽령, 림계학, 지희겸, 박근식, 강동주, 한운승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정무위원회회의에서는 “10대시정방침”을 채택, 공보했다. “10대 시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1. 지방자치안을 확보하며 훌률한 사회질서를 건립한다. 일본 잔여병과 토비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무기를 몰수한다.
2. 죄악이 극히 큰 밀정, 한간을 제외한 위만주국정부, 군대에서 일하던자로서 새정부를 향해 진정으로 뉘우치면서 새사람이 되려하는자에 대해서는 더는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
3. 극소수의 일본전쟁범을 제외한 일본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4. 민주정치를 실시하며 인권, 재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5. 공업, 농업, 상업을 부흥시키며 생산을 발전시킨다. 가렴잡세를 면제하며 인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
6. 민생을 개선하기 위해 감조감식하며 승낙한 말을 실천한다.
7. 로동자들의 임금을 높혀줌과 동시에 기업주의 합리한 리윤을 보장한다.
8. 신민주주의문화를 실행하고 노화교육을 배척한다. 교학을 진행하며 교원들에 대한 대우와 지위를 높혀준다. 실학청년을 구제하며 문화사업과 문화단체를 방조하여 건립, 발전시킨다.
9. 생활을 영위할수 없는 실업로동자, 중한피난민, 로인, 어린이, 불구자를 구제한다.
10. 민족단결과 민족평등을 실시하며 중한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평등을 보장한다.
이 시정방침은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포고(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布告)” 제1호 문건으로 작성되여 당날로 사회에 공포되였다.
11월 22일, 연변민보(延邊民報)에 전원공서의 성립을 열렬히 옹호하고 시정방침을 참답게 관철하여 연변을 훌륭하게 건설하자는 내용의 “위대한 발단”이라는 사설이 발표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연변지위와 각 현 당정지도기관들에서는 촌급선거공작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연변전원공서와 각 현 정부에서는 층층이 선거공작간부양성반을 꾸리고 촌급선거공작간부 2878명을 양성하였다. 선거공작대는 먼저 4개 가두, 89개 촌에 내려가 촌급선거공작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한시기 지나 경험을 얻은 뒤 보편적인 촌급선거와 민주정권건설공작을 진행하였다. 하여 1949년 3월에 전 연변의 촌급선거, 민주정권건설공작이 거의 끝나게 되었다. 뒤이어 각 현에서 구급, 현급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구, 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현, 구, 촌 3급 인민정권건설공작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연변군분구를 설립, 강신태가 사령원을 맡고 옹문도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은 박락권, 제2퇀은 박근식이 맡았다.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하는 조선의용군 교도대가 연변에 도착한후 연변군분구는 6개퇀으로 확대되였다. 병력은 1만 2000여명에 달했다.
12월 1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는 연변공안국을 설립할 것을 결정, 증흥무(曾興茂)를 국장으로 임명했다.
12월 5일, 강신태는 길동보안군사령원의 신분으로 훈춘에 내려가 훈춘현 현장 한석도(韓石濤)와 함께 위만경찰을 골간으로 조직되여있는 현공안국무장을 철소하고 길동보안군 훈춘경비대대를 세웠다. 리림수가 대대장을 맡고 한석도가 정위를 맡았다. 아래에 8개 중대를 두었는데 800여명 대원을 갖고있었다.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하는 조선의용군 선견부대 30여명이 연길에 도착했다. 선견부대는 관선정 등 전원공서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연길에 조선의용군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2월 12일,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박일우가 인솔하는 수백명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