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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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3-03-06 06:08본문
로흑산일대의 토비숙청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동만에서의 토비숙청투쟁
4000여 명 토비 숙청 대량의 군수물자 로획
동북근거지창설의 크나큰 장애와 우환 제거
우환을 없애기 위해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의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빼앗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하에 륙, 해, 공 3로로 동북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일본군과 괴로군 패잔병, 경찰, 헌병, 특무, 일제의 앞잡이들과 토비들을 규합하여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진공하는 이른바 “지하군”, “선견군”, “정진군”을 편성하였다. 동북경내에는 갈래가 복잡한 정치토비가 무려 9만여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동북에서의 국민당의 사회적기초가 되어 국민당의 조종밑에 도처에서 살판치면서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뒤엎고 교통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재물을 로략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의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빼앗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하에 륙, 해, 공 3로로 동북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일본군과 괴로군 패잔병, 경찰, 헌병, 특무, 일제의 앞잡이들과 토비들을 규합하여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진공하는 이른바 “지하군”, “선견군”, “정진군”을 편성하였다. 동북경내에는 갈래가 복잡한 정치토비가 무려 9만여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동북에서의 국민당의 사회적기초가 되어 국민당의 조종밑에 도처에서 살판치면서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뒤엎고 교통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재물을 로략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정권을 적대시하면서 때만 오기를 기다리는 일만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해버리지 않는다면 농민대중을 폭넓게 발동할수 없을 것이고 근거지의 안정이 있을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국민당이 대거 진공해오면 정면과 배후의 량면협공을 받는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것이였다. 때문에 일만잔여세력과 정치토비는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하는데 있어서 크나큰 장애와 우환이였다. 이리하여 동북에서는 “근거지를 건설하며 토비숙청을 다그치자”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1945년 겨울부터 기세드높은 토비숙청투쟁을 벌리였다.
연변에서의 토비숙청은 전 동북적으로 제일 먼저 시작되였다. 중공연변지방위원회와 연변군분구에서는 동북국의 지시와 “군대를 건설하는 한편 토비를 숙청하자”는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정신에 쫓아 군분구 사령원 강신태와 정치위원 옹문도가 몸소 책임지고 토비를 숙청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비숙청에 동원된 병력은 군분구의 경비부대와 각 현 보안퇀 및 조선의용군 제5지대였는데 병력은 1만1천여명, 절대다수가 조선인들이였다.
삼도만을 두 번 치다
1941년 가을, 연길현 삼도만 평강촌에는 지방인민정권수립을 반대하는 한무리의 토비들이 있었다. 위만퇴역기병소좌 진보흥을 두목으로 하는 토비들이였다. 이자들은 지방인민정권을 반대하면서 백성들을 략탈하고 유린했다. 전보흥은 위만 군사부 삼도만 평강촌림대 부대장이였는데 해방후에도 계속 반동립장을 견지하면서 원 촌림대의 무기와 병마를 그러모아 토비대를 세웠다. 전호흥은 인민정권이 나날이 발번공고화되는것을 보고 한때 명월구경비퇀의 개편을 접수하였으나 다시 배반을 시도하였다. 하여 경비퇀 영장 손장상이 가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외면하면서 같이 간 30여명의 무장인원을 억류하였고 두 번째로 권유하러 간 팔도구민주대동맹 위원장 최학성 등도 억류하였다. 경비퇀에서는 몇 번이나 서신으로 억류된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전보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완강하게 대항할 주비를 하였다.
이에 경비퇀 퇀장 남창수가 2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평강촌을 포위하였다. 토비들은 통제고지를 차지하고 포대에 숨었거나 토성화구에 매복하면서 아군의 진공에 맞섰다. 아군은 진지를 리용하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서 전투를 벌리였다. 결과 2시간 남짓 격전을 벌리였지만 적을 무찌를수가 없었다. 도리여 40여명 전사자를 냈을뿐이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평강촌포위토벌은 실패하고말았다.
1946년 1월, 연변경비 1퇀과 3퇀이 련합하여 두 번째로 삼도만토비를 포위토벌하였다. 1퇀은 직접 삼도만을 공격하고 3퇀은 삼도만 서북쪽에 있는 인삼장부근에서 퇴로를 막았다.
1월 27일 새벽, 드디여 전투가 벌어졌다. 자지러진 총소리속에서 아군의 땅크가 토성대문을 들이밀자 부서져버렸다. 이에 당황망조한 토비들은 북산길로 하여 평강으로 도망쳤다. 토비두목 전보흥과 오건은 도망직전에 억류하고있던 팔도구인민민주동맹 위원장 최성학, 명월구수비영 영장 손장상 등 9명을 삼도만 평강촌 북쪽 오품엽자 골짜기에서 살해하는 “오품엽자구참안”을 빚어냈다.
곽영춘토비무리를 격멸
송하평탄광을 일명 “만탄”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화룡시가지에서 2.5킬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있다. “9.18”사변후 일본이 “만주탄광주식회사”를 운영하였는데 수천명의 중국인탄부들이 이곳에서 잔혹한 압박과 착취를 당했으며 무고하게 목숨을 앗기였다.
곽영춘은 탄광의 경찰이였는데 후에는 로동자들을 때려죽이고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는 4대십장의 하나로 되었다. 1945년 9월, 송하평탄광 “보안대” 두목자리를 차지한 곽영춘은 인차 안도의 선병균, 오도양차의 단수림과 결탁하였다. 그는 100여명의 병사에 100여자루 보총, 2정의 기관총을 가지고있었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이 대오를 개조해보려고 했다. 현당위 서기 운청, 현보안퇀 부정위 장보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송하평에 가 귀순할 것을 권고하였다. 2개월 남짓이 공작한 결과 곽영춘은 자신의 대오를 동북인민자치군 화룡보안퇀 독립영으로 재편성하고 영장이 되는것을 조건으로 귀순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군대가 기세사납게 장춘과 길림을 공략하자 그는 선병균, 단수림과 반변을 밀모하면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장개석을 옹호해나섰다.
곽영춘은 사람을 보내여 길림에 가서 국민당의 위임장을 얻어온후에는 위장을 벗어버리고 공공연히 공산당을 원쑤로 대했다. 그는 무장대오를 거느리로 화룡시가지에까지 와서 시위하였고 기관총을 가지고 현정부에 들어가 식량과 돈을 내라고 강박하였다. 그는 또 퇀광주위에 방어공사를 설치하고 초소를 증설하면서 “화룡거리를 밀어버리고 공산당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떠들어댔다.
1945년 12월 24일, 룡정의 보안 4퇀과 쏘련홍군 20여명이 지원하러 왔다. 25일, 화룡의 보안6퇀에서는 날자를 정하고 곽영춘에게 련장이상간부를 데리고 회의하러 오라고 명령했다. 곽영춘이 정한 날자에 오지 않으니 4퇀과 6퇀은 쏘련군과 함께 탄광으로 출발하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곽영춘은 한창 술판을 버리고 질탕 먹고 마시고있었다. 아군이 초소를 지나 곧바로 영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자 곽영춘 등은 술좌석에서 뛰여나와 저항하였다. 총소리는 송하평하늘가에 자지러지게 울려퍼졌다. 적들이 저항은 완강하여 좀체로 누구러들려 하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전투는 2시간 남아 끌어 3시경에야 끝났는데 적 43명이 격살되고 48명이 생포되였다. 곽영춘과 나머지 놈들은 포위를 돌파하고 안도로 도망쳤다. 아군은 곽영춘의 집에서 국민당 퇀장위임장을 사출해냈다.
1952년 곽영춘은 화전현에서 체포된후 처형되였다.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격멸
오도양차는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위만경찰 경위 로진이 여기에 “보안대”를 세웠다. 그해 11월초에 “보안대”를 “안도현공안대대 고동하3중대”로 고치고 단수림이 중대장으로 되었는데 ㄹ병력은 100명좌우였다. 단수림은 안도현 반동두목 선병균의 문객이였다. 단수림은 화룡현을 누비면서 살인, 략탈, 강간을 일삼았으며 때로는 교통을 차단하고 우리 군을 매복습격하였다. 곽영춘이 무리가 소멸된후 단수림은 더욱 기고만장해 미쳐날뛰였다.
1946년 음력설직전에 화룡현보안 6퇀 퇀장 박근식은 일부분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오도양차에 둥지를 틀고있는 있는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공격했으나 2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적 11명을 소멸했을뿐 토비소굴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에 3월 15일, 연변군분구 부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6퇀과 8퇀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였다.
단수림이 거점을 잡고있는 마을은 2메터 높이의 담장과 화점으로 둘러쌓여있었고 경비가 삼엄하였다. 마을뒤의 산에는 또치까까지 높이 솟아있었고 마을안에는 적들이 우글거리고있었다. 주밀한 정찰을 거친후 구회괴는 8퇀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마을을 진격해들어가고 6퇀은 서북산의 또치까를 치고 포병련은 마을 동남에 있는 산의 진지를 차지하고 기회를 엿보아 싸움을 돕기로 하였다.
전투는 아침 7시경에 시작되였다. 적들은 마을안팍의 방어공사에 의지하여 밀집화력으로 아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면적인 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후 3시까지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때 6퇀은 서북산 또치까에서 가까운 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또치까에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들은 차츰 기가 죽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치까가 파괴되고 적의 화력이 갑자기 즘즉해졌다.
구회괴는 단신으로 동남쪽담벽을 넘어들어갔다. 전사들도 잇따라 구회괴의 뒤를 따라 담을 넘어들어가 단숨에 전 촌의 적을 제압할수 있는 또치까를 탈취하였다. 마을의 적들은 배겨내지 못하고 서북쪽으로 빠져나가 안도방향으로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80여명을 소멸하고 총 40여자루 로획했다.
필서문의 끝장
필서문은 두 번 혁명대오에 기여들었다가 두 번 변절하여 적에게 항복한자이다. 필서문은 하북성사람으로서 안도현 처창즈에 와서 토비질하다가 1932년 항일대오에 기여들어 구입원, 유격대 중대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2퇀 퇀장, 군부 부관장 등 직무를 맡았다. 후에 일본헌병대 나가지마공작반에 투항하여 대전자특수반에 편입되였고 항일군민을 해치였다.
항일전쟁은 승리하였으나 안도현소재지가 아직 해방되지 못하고있을 때 필서문은 선병균도당에 빌붙어 치안유지회의 반동무장공안대를 조직하고 제4중대 중대장을 담당하였으며 우리 경비부대가 안도를 해방하는것을 여러번 저애했다.
1946년 3월, 연변경비부대가 선병균비적을 치고 안도를 해방할 때 필서문은 대오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4중대는 길동군구보안3퇀 1영 4련으로 재편성되였다. 필서문은 또다시 혁명대오에 기여들어온후 적극성을 보이면서 공산당을 옹호한다고 표시하였다. 필서문은 1946년 4월에 현대대장이 되기까지 했다.
대대장이 된후 반동본성이 재발한 필서문은 반란을 일으킬 꿍꿍이를 하였다. 5월 19일, 1영 4련이 명령을 받고 훈춘으로 갔을 때 필서문은 심복을 보내여 4련의 사무장 조개선, 패장 곡화림 등과 반란을 밀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련의 많은 사병들이 6월 13일 밤에 도망쳐버렸다. 필서문은 또 여러번 사람을 림강, 돈화 등지에 보내여 토비들을 그러모으고 무기를 수집하게 하였다.
중공안도현위 서기 겸 현대대 정위 박덕흠은 필서문의 음모활동을 료해한후 길동군구에 보고하였다. 군구에서는 보안3퇀이 1련의 무기를 해제하도록 결정하였다.
1련은 지도원을 내놓고는 다 필서문의 심복들이며 반란의 주력이였다. 군구에서 파견한 선견부대 리자상영장이 거느린는 2영이 6월 29일, 안도에 도착하였다. 현위에서는 즉시 전화로 대전자에 있는 필서문에게 현에 돌아와 회의에 참가하라고 통지하였다. 교활한 필서문은 요긴한 일이 있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에 문득 현에 와서 방정위를 찾았다. 그는 낌새를 노리다가 현장의 첩이 죽어서 조문을 간다면서 자리를 떠버렸다.
간부들이 현대대부에서 행동계획을 짜고있는데 필서문이 또 대대부에 갑자기 뛰여들었다. 이때 리자상이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하였다. 그를 1련에 압송하여 심복들더러 무장을 내놓도록 명령하게 했으나 심복들의 완고한 저항을 받아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에서 필서문은 다리를 상했으나 혼란한 틈을 타서 담을 넘은후 도망치고 그 외의 비적들은 격살되였거나 포로되였다.
장백산밀림으로 달아난 필서문은 다시 120여명의 비적을 그러모아가지고 9월에 길림에 가서 장백군에 투항하여 제1퇀 3영 소좌 영장으로 되었다. 1948년 해방군이 길림을 포위하였다. 길림성군구 사령원 주보중, 길림시경비구 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쓴 명령을 필서문에게 보내여 투항할것을 권고했으나 필서문은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방군에 포로되였고 1949년 3월 안도현에서 처단되였다.
토비를 치고 안도를 해방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후 연변의 대부분 지구는 해방되였으나 안도현에서는 1945년 8월 20일, “림시유지회”를 내오고 후에는 또 괴뢰림시현정부를 내왔다. 대악질지주 선변균 삼형제가 조직한 무장은 이 정권의 기둥이였다. 그들은 이도백하, 송강, 량강구, 만보 등 교통요지를 지키면서 우리 군의 안도해방을 극력 저지하려 시도하면서 국민당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946년 3월, 동북민주련군은 안도현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갈래는 남만의 양정우지대 즉 료남독립 2사 3퇀과 1퇀(1개영) 그리고 리홍광지대 한 개 패로서 이도백하를 치기로 하였으며 다른 한갈래는 길동군분구 부사령 구회괴가 길동군분구 경비려 2개 퇀을 거느리고 화룡을 거쳐 오도양차와 대전자를 치기로 하였다.
오도양차에는 토비 한 개 대대의 병력이 지키고있었다. 3월 6일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리하여 안도를 해방하는 돌파구가 생기게 되었다. 3월 8일 밤. 부대는 대전자에서 1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십기가 서남툰일대에 주둔하면서 적정을 분석한후 투항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구회괴부사령원이 직접 적의 주둔지에 가서 담판했다. 적들은 하는수 없이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총 한방 쏘지 않고 대전자를 해방했다.
이도백하에서는 선병의의 한 개 중대가 지키고있었다. 대장 강승무는 완고분자로서 투항을 거부하였다. 남만부대와 동만부대는 이도백하에 집결하여 남북에서 협공할 태세를 취하였다. 3월 16일 점심때 공세를 발동하여 12시간의 격전을 벌려 비적을 전부 섬멸하고 그길로 안도현소재지 송강진을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선가의 지주무장을 전부 소멸하고 림시현정부도 뒤엎어졌다.
3월 18일, 제1임 현장 주유숭이 해방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안도현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마희산비적집단의 괴멸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400여명의 대오를 확대하였다. 이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동북정진군 제1련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었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을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었다.
마희산비적단은 구성된 그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감행했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해 3월에 마희산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사람을 쏴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략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페), 입쌀 16만3500킬로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 마리, 이주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략탈해 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하에 마희산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주력부대는 쥐도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린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후 그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 녕안에서 총살당했다.
왕경운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경찰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락후한 군중 40여명을 롱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이 되었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해 10월 15일, 일본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지하건군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자들을 그러모으고 청년들을 롱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1퇀, 묘령에 2퇀, 대흥구에 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의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자엥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1영은 묘령에 2영은 계관라즈에, 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무기는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중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있었다.
1948년 8월, 토비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탹탈하다가 김태길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략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군도로 찍어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1, 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되여 처형당했다.
안진유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현주 위만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0 라자구일대에서 600여명을 그러모아 자위대를 조직한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었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건군조직에서 련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중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있엇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여 토비들이 미처 손쓸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외에 나머지들은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 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1영은 미처 막을사이 없이 흩어지고말았고 소영장은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은 전사하였거나 포로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인군중을 죽였고 조선인여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인의 재산을 략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도 64명 조선인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인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격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시켰다. 부퇀장 류방무는 토지개혁때 붙잡혀 총살당했다.
돈화의 토비숙청투쟁
일본이 무조건투항한후 쏘련군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제때에 일본군을 집중시키지 앟아 흩어진 패잔병들이 돈화의 산야에 숨어 늘 부근의 마을을 습격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한달 남짓한 사이에 이런 대오가 각지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 때 지주, 위만관리와 경찰, 자위단 및 오랜 비적들은 갖은 애를 써서 이런 대오의 령도권을 탈취하였다. 그들로는 앵목의 리충옥, 성서의 당옥, 대석두의 리옥보, 대포시하의 장영춘, 관지의 장진호, 태평령의 등진상, 삽어하의 주흥복, 남항니어의 왕대법사 등이였다. 이자들은 오로지 국민당을 동경하고있었고 무장을 쥐자 극력 세력을 늘이였다.
1945년 8월 19일, 동북항일련군 소분대 리문장 등이 쏘련군과 함께 돈화에 왔고 얼마후에 또 류건평이 왔다. 9월초, 류건평을 사령으로 하는 돈화현보안사령부가 건립되자 자연발생적인 무장대오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1월, 양상규 등 연안간부들이 와서 중공돈화현위와 현림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공산당원이 현장이 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위만군 소좌군의 출신인 류화일이 현장으로 되었다. 그는 국민당돈화현당부의 려명과 언녕부터 배짝이 맞아 들락날락 하는자였다. 그는 수하에 수백명의 공안대를 두고 보안대와 엇섰다.
보안사령부는 먼저 교도대를 조직하고 4개 향의 8개 대대를 받아들여 재편성, 간부를 파견하였다. 국민당은 각종 수단으로 이런 지방무장을 끌어당겼으며 보안사령부에서 재편성하여 임명한 대대장을 국민당의 상좌퇀장으로 위임하였다.
11월 하순부터 류화일은 공개적으로 국민당간판을 내걸었고 향의 대대들을 국민당에 기울어지게 하였으며 항일련군간부였던 리문장을 대포시하에서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양상규는 미리 기미를 알고 관지를 떠났기에 살해당하지 않았다.
돈화주둔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중공돈화현위에 즉시 현소재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전을 담보할수 없다고 통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현위는 교도대대와 함께 현소재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는데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겨우 륙과송까지 왔다. 때마침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길방면으로 가는 도중에 돈화를 지나다가 양상규를 만나 돈화의 정황을 듣고 그들을 반격하기로 하였다. 하여 교도대대와 부근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두 개 중대가 합쳐 800여명이 쏘련홍군과 련계짓고 돈화로 쳐들어갔다.
5지대의 지원을 받아 요충지를 점령한 리공발이 류화일을 사로잡고 무장해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길가에서 류화일이 마차를 타고 온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공발은 마차를 가로막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류화일의 호위병 서규영 등이 무장해제를 거절하면서 보안사령부 전사 2명을 쏘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리공발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하면서 마차에 뛰여올라 류화일을 끌어내리고 호위병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보안사령부에서는 뒤이어 쏘련홍군의 지지하에 류화일이 통제한 공안대대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돈화림시정부의 대권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4개 향은 여전히 토비가 통제하고있었다.
1946년 2월, 동북민주련군에서 파견한 득극명려가 돈화경에 왔다. 부대의 선견대가 서관툰 가까이에 왔을 때 갑자기 토비의 습격을 받았다. 격전 끝에 토비를 물리치고 진지를 점령하였다. 나흘후 대황툰에서 토비를 타승하고 말을을 점령하였다. 아군은 정치적공세를 들이대여 대포시하의 장영춘, 혹석의 석덕진 등을 항복시켰다. 기타 토비들은 혼란에 빠져 장춘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후에 장춘에서 전부 소멸되고 돈화의 잔여비적들은 산속으로 도망쳤으나 선전교양을 거쳐 대부분이 항복하였고 완고분자들만이 포로되였거나 진압당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겨울부터 시작한 토비숙청투쟁은 1946년 7월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이번 투쟁을 통하여 동만근거지건설의 우환을 제거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보호하였다. 이번 토비숙청에서 아군은 4000여명 토비들을 소멸하고 각종 포 24문, 중경기관총 76정을 포함한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로획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