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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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13-03-08 06:21본문
땅을 분배받은 조선인농민들 앞다투어 참군하였다.
자위전쟁으로 승리전취물 보위
장개석 전면내전 발동하여 해방구를 진공하자
조선인 향토 보위하기 위해 앞다투어 전선으로
조선인 향토 보위하기 위해 앞다투어 전선으로
장개석 전면내전 발동
항일전쟁이 승리한 그 시기 동북에는 국민당군대가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지지와 원조밑에 동북을 독점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부터 대량의 군대를 파견, 1946년 6월에 이르러 장춘-심양 철도연선의 심양, 사평, 장춘, 길림 등 중요한 도시들을 련이어 점령했다.
동북을 지키고있던 동북민주련군은 “북쪽으로 발전하고 남쪽으로 방어한다”는 전략방침에 좇아 심양 등 큰 도시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하여 동만, 서만, 북만에 분산되여 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동만근거지는 1945년부터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장개석은 160만 군대를 동원하여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진공을 발동하였다. 군민당 제71군은 교하일대까지 쳐들어온후 “일주일내에 두만강반까지 쳐들어가 전 동북을 수복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중공길림성위, 성정부, 성군구 지도기관은 길림시에서 철거하여 8월 17일 연길로 이동하였다. 성지도기관은 연길로 이동하던중이던 7월 10일, 돈화에서 현퇀급이상 간부가 참가한 성위확대회의를 열었다. 성위서기 진정인이 회의를 사회하고 담정이 동북국을 대표하여 회의에서 연설하였다.
회의에서는 당시 전 성의 정세를 분석하였다. 그때 길림성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해있었다. 성의 당정군지도기관은 길림을 떠나 류동하며 공작하였고 간부들의 사상도 불안정하였다. 돈화와 연변지구만이 안정하고 믿음직한 해방구였다. 연변인구의 80%를 차지한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을 견결히 옹호했으며 시련을 거친 상당한 수효의 간부들을 가지고있었다.
연길에 옮겨온 성당위, 성정부, 성군구는 길동분성위, 연변지위와 함께 사무를 보았다. 이렇게 옮겨온 성위, 성정부, 성군구 지도기관은 1948년 3월 9일, 길림이 해방될 때까지 연길에 있다가 3월 10일, 연길을 떠나 길림으로 돌아갔다.
참군참전 열조
1946년 6월, 국민당군대는 로야령을 넘어 교통요지인 신참과 랍법에 침입해 들어왔다. 연변인민들은 국민당의 진공앞에서 나약함을 보이지 않고 “자위전쟁으로 장개석의 진공을 분쇄하자!”는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참군고조를 일으키는 한편 연변경비려를 교하-랍법-신참 일선에 파견하여 적을 막아 완강하게 전투를 벌리게 했다.
당시의 참군열조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토지개혁을 한 결과 광범한 농민들은 토지를 분여받고 진정한 땅의 주인으로 되어 신세를 고쳤습니다. 이 승리의 열정으로 연변에서는 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어났습니다. 신세고친 조선인들은 향토를 보위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참군하였습니다.”
1946년 5월 17일부터 6월 8일까지 연변에서는 3659명이 참군하였는데 화룡 한 개 현에서만 하여도 1536명이 참군하였다. 이러한 참군고조가운데서 연변각지에는 아들을 참군시키거나 남편을 참군시키고 형제자매가 앞다투어 참군하는 많은 감동적인 사적들이 나타났다. 지어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참군하는 감동적인 일도 있었다. 그중 연길현 흥안촌 녀성 리옥금은 남편 림지용의 참군을 지지하였으며 미구에 또 세 시동생의 참군을 지지하고 자기가 집안팎의 일들을 도맡아하였다.
“해방을 맞던 해 팔월추석에 저희 남편은 50여명 청장년들을 조직하여 부대로 나갔습니다. 패장급으로 말입니다. 당시 우리 집은 식솔이 12명이였는데 시누이 넷, 시동생 셋, 시삼촌의 아이 둘이 있었으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계셨습니다. 저는 토지개혁 첫분배때 집과 소 그리고 소수레를 분여받았습니다. 과거 지주의 압박과 착취를 받을대로 받아오던 저희들이였기에 이 땅을 보위하기 위하여 남편과 친족들을 동원하여 부대에 입대시켰습니다. 시동생 둘은 연년생인데 당시 14살과 15살이였습니다. 남편의 렬사증은 1947년 5월 27일에 받았지요. 큰시동생은 1946년에 입대시켰고 둘째 시동생은 1947년 7월에 입대시켰으며 셋째 시동생은 1948년 3월에 입대시켰습니다. 남편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앞이 캄캄했지만 말못했습니다. 늙으신 시부모님도 그렇고 더구나 동네의 다른 집들에서도 렬사증을 받았는데 제가 어떻게 울고만 있겠습니까? 저보다도 남들의 고통을 리해해주는것이 더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부모님들은 모두 견강한 분들이였지요.”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에서의 리옥금녀성에 대한 인터뷰다.
리옥금의 남편과 마을의 적잖은 청년들이 희생되자 젊은녀성들은 자기 남편을 참군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을 본 리옥금은 부녀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우리 가난한 농민들은 남의 하늘아래 남의 땅에서 허리도 못펴고 살았어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어요. 우리가 이 땅을 보위하지 않고 누가 보위하겠어요. 참군하는 것은 반동파를 때려엎고 나라와 가정을 지켜 좋은 나날을 보내기 위한것이지요.”
“참군하면 영광스럽다!” 이는 당시 조선인들 가운데서의 사회적기풍으로 되었다. 연길현 세린하구 동불사에 살고있는 박씨성을 가진 한 할머니는 딸을 군대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세 아들을 전선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지금 나의 가장 사랑하는 딸을 부대에 보냅니다. 나에게는 또 18살나는 아들이 있습니다. 만약 전방에서 사람을 수요하면 이 아들까지 전선에 보내겠습니다.”
화룡현 숭선촌의 송씨댁 늙은 어머니는 아들 송기섭을 떠나보낼 때 아들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국민당반동파를 때려부시지 않고서는 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편안히 살수 없다. 너는 나의 아들이자 또한 공산당과 인민의 아들이다. 용감히 싸워 적을 많이 소멸하거라!”
왕청현의 금방 결혼한 한쌍의 부부는 서로 고무격려하면서 참군하였고 훈춘현 삼가자에 사는 60여세의 서군산부부는 외동아들을 군대에 보냈으며 훈춘현 밀강향에 사는 강병식, 강병국 형제는 서로 자기가 참군하겠다고 다투다 못해 나중에는 마을사람들 “재판”에 의해 형님인 강병식이 참군하였다.
농촌에서의 참군고조는 도시청년들과 학생들속에도 재빨리 파급되였다. 1947년 6월 4일, 연길시제2중학교에서는 131명의 남녀학생들이 참군할 것을 탄원하였고 민족간부양성을 위해 세워진 연변민주학원에서는 51명이 한꺼번에 참군하였다. 같은 해에 연길, 룡정, 도문 등지의 수천명 중학교졸업생들이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나갔다.
길림성군구의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참군정황통계자료에 의하면 전 성 참군자총수는 18만 9455명인데 그 가운데서 연변참군총수가 5만 2051명으로서 27.5%를 차지하였다. 당시 연변인구는 88만 9455명이였는데 참군자총수는 연변인구의 5.88%를 차지하였다. 이밖에 약 10만여명이 공안부대, 기간대, 무장민병 등 지방무장조직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참군한 조선인 대부분이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의 제28, 29, 30사와 조선인이 위주가 된 동북군구 소속 독립 제4, 6, 11 사에 편입되여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로 되어 동북해방전쟁과 전국의 해방하는 성스러운 싸움에서 영용히 싸웠다.
모든것은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하여!” 이는 연변인민들의 장엄한 구호였다. 이 구호의 고무하에 연변인민들은 전선지원을 위한 총력전을 벌리면서 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전선지원의 중요한 내용은 담가대나 운수대 또는 민부로 전선에 나가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부대를 따라 부상병을 구하거나 량식, 탄약을 나르고 철도나 도로를 수리하며 방어공사를 쌓는 등 일들에 직접 참가하여 전쟁을 위해 복무하는것이였다. 해방전쟁시기 연변에서 전쟁을 위해 근무한 연인원수는 30만 2300명에 달하며 동원된 차량수는 2만9200대에 달하였다.
나가자 전선으로
담가대와 운수대에
모두 나가
우리 상병 돕고 량식 나르자
보내자 전선으로
늙은 부모 어린 누나 동생도 같이
한알 두알 모아서
전선에 보내자
모든 것은 자위전쟁승리를 위해
나가자 전선으로
보내자 전선으로...
연변인민들은 목청높이 “전선지원가”를 부르면서 전선원호공작을 기세드높이 전개하였다.
담가대는 군대식으로 편성되였다. 담가 한 대에 대원 여섯명씩 배치되였고 담가 세대가 한 개 중대로, 세 개 중대가 한 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담가대원들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해방군전사들을 따라 화선을 넘나들면서 부상병을 구원하였다. 지어 화선 20메터 가까이까지 들어가서 부상병을 업어내왔다. 조선인담가대원들은 대부분 한어를 몰랐으나 부상병을 친절히 간호하여 상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담가대원들은 자기 돈으로 닭알과 과일을 사서 부상병들을 대접했으며 부상병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부상병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려 애썼다. 그들은 적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늘 담가를 나무로 위장하고 적기의 공습을 받을 때엔 자기의 몸으로 부상병을 엄호하였다. 연변담가대원들은 1948년 반년사이만 하더라도 화선에서 1600여명의 부상병을 구했다.
전선근무대에서 운수대의 공훈도 매우 컸다. 운수대는 기차, 자동차, 마차, 우차들을 망라한 운수기재들을 동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조선인으로 조직된 담가대, 운수대 등 전선근무대들은 전 동북이 해방된 뒤 산해관을 넘어 평진전역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천진, 당고를 해방하는 전역에서 새로운 공로를 세웠다.
후방인민들은 각종 형식으로 전선원호사업에 떨쳐나섰다. 연변의 각 현에서는 수혈대를 조직하여 자기의 피를 부상병에게 바쳤다. 조선인들은 수없이 많은 위문품과 수만통의 위문편지를 전선에 보내여 전사들을 고무격려하였다. 연변문공단은 전선부대의 전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제1선에 나가 로천공연을 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의 투지를 북돋우어주었다.
전쟁근무에 동원되고 참전임무를 집행하는 가운데서 각지에는 숱한 영웅과 모범이 나타났는바 립공수상자는 2700여명에 달하였다.
후방에서는 대생산운동을 전개하여 량식과 군수물자를 많이 생산하여 전선을 지원하였다. 청장년 대부분이 참군참전하다보니 후방보위와 생산은 녀성들과 로인들이 많이 하였다. 농촌녀성들은 “남성들은 군대로, 녀성들은 밭으로!”라는 호매로운 구호를 내걸고 농업생산의 주력군으로 되었으며 걷우어 들인 량곡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전선에 보냈다.
연변은 당시 대후방이였다. 훈춘, 도문 등지에 세운 제혁공장, 신공장, 방직공장, 염색공장, 옷공장 등의 군수품공장에서는 군수물자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전선에 보냈다. 또 광범한 녀성들은 천짜기와 형겊신만들기 운동을 벌려 전선의 수요을 충족시켰다.
1946년 6월, 중공동북국의 지시에 의해 훈춘에 병기공장이 세워졌다. 1947년 여름부터 동북야전군은 전략적후퇴로부터 전략적진공에 넘어갈 준비를 하였다. 부대가 끊임없이 확대되는바람에 무기장비의 수요량도 급증했다. 군사공업부의 지시에 의해 훈춘병기공장에서는 자체로 82밀리박격포를 연구제작하였다. 1948년까지 훈춘병기공장에서는 100여문의 박격포를 생산해냈다. 1948년말에 훈춘철길옆에 버려져있는 세 개의 차량을 뜯어다 녹이여 철판을 만들어 원재료로 삼고 시험제작에 성공하였다. 이밖에 훈춘병기공장에서는 1946년 8월부터 1947년 7월까지 1년동안에 82밀리박격포 포탄 5만 5000여발, 탄알 220여만개를 생산해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