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발자취 ③육삼정 의거와 백정기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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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0-30 17:27본문
아나키스트 ‘백정기’는 누구인가
항일운동 발자취 ③육삼정 의거와 백정기 의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매진하라”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구파(鷗波) 백정기 의사가 일본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운명하기 며칠 전 함께 육삼정 의거를 도모했던 이강훈, 원심창 의사에게 남긴 말이다. 아나키스트 백정기는 육삼정 의거 이듬해 일본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나이 39세.
육삼정 의거가 상하이 3대 의거,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인 큰 사건인 것처럼 이를 주도한 백정기는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3의사’로 꼽힌다. 해방 후 1946년 3의사의 유해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정인보 선생 등의 노력으로 국내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영화 ‘아나키스트’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몇 있을 뿐.
상하이 '육삼정' 의거 직후 중일 경찰에 체포됐을 때 백정기 의사. 자료사진에는 백구파로 나온다. 백 의사가 구파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붙인 것으로 판단.
성공한 ‘윤봉길’ 실패한 ‘백정기’
육삼정 의거가 밀정에 의해 실패한 후 체포된 백정기, 그는 1년 전 또 다른 거사에서 실패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는 상하이 점령을 자축하는 일본군 관병식이 열렸다. 이날 백정기는 윤봉길보다 한발 앞서 거사를 준비했다. 1930년대 상하이에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했다. 이 둘은 소속이 달랐기 때문에 각자 거사를 계획했고, 서로 일본군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윤봉길은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이었고, 백정기는 정화암이 이끄는 남화한인연맹이었다. 두 단체의 대표로 뽑힌 그들은 홍커우 공원에서 각자 폭탄을 품었던 것.
그런데 그날 백정기에게 문제가 생겼다. 출입증을 전해주기로 한 중국인 동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던 순간, 공원안에서 폭탄이 터진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 대신 또 다른 조선인이 거사를 성공했다는 안도감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갔을 백정기. 그리고 그는 다음 거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매년 4월이면 홍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갖고, 거사에 성공한 윤봉길 의사를 추모한다. 만약 출입증이 제대로 전달됐다면 매년 4월 29일은 백정기 의사를 기억하는 날이 됐을 지도 모른다.
10만 중국인이 따랐던 백정기
백정기는 일제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친일파 이규서 연충열 이종흥을 처단해 ‘특급 테러리스트’로 분류돼 있었다. 28세에 일본 수력발전소 파괴와 일왕 암살을 기도하며 동경에 밀입국 했다가 대지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암살 대상으로 삼았던 프로 저격수였다.
이처럼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내던졌던 백정기. 그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7세부터 정읍에서 성장했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기 2년 전 동학농민혁명 발발했던 지역으로 동학혁명의 여운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1905년 13세에 결혼하고 미래를 꿈꾸던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맞게 되면서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독립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예 백정기는 자연스럽게 민족과 역사, 조국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역사전문가들은 설명한다.
24세 되던 해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에 직접 행동을 취할 것을 결심하고, 인천에서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중국 선양으로 피신한다.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정화암, 신채호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1926년 상하이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공단연합회를 연결시켜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지도에 나선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당시 그를 따르는 군중이 12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육삼정 의거를 함께 도모한 원심창, 이강훈 의사(체포 직후 모습)
‘3의사’ 중 교과서에 빠진 백의사
정열과 목숨을 바쳐 독립활동을 해온 구파 백정기, 왜 3의사 중 유일하게 교과서에서 빠졌을까. 아나키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전문가들은 실제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일본 도쿄대학의 한 교수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서 왜곡이 시작됐다고 전한다. 이러한 번역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독립군과 식민지배를 당하는 사람들, 제3국에게 ‘무정부주의’를 마치 정부조직없이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을 심어 분열과 혼선을 조작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주장한다.
또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 이념의 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제가 식민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을 무정부주의자라는 덫에 걸어둔 것을 광복 후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아예 교과서에서 배제해 버렸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심지어 ‘3의사’에서 제외시켜야 된다는 얘기마저 나온다고 하니 비운의 혁명가가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 하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진정한 독립을 지향하고자 했던 아나키스트들의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 봐야 할 것이다. 또 상하이 거리를 거닐며 조국의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의사의 목숨을 내건 희생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수미 기자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매진하라”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구파(鷗波) 백정기 의사가 일본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운명하기 며칠 전 함께 육삼정 의거를 도모했던 이강훈, 원심창 의사에게 남긴 말이다. 아나키스트 백정기는 육삼정 의거 이듬해 일본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나이 39세.
육삼정 의거가 상하이 3대 의거,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인 큰 사건인 것처럼 이를 주도한 백정기는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3의사’로 꼽힌다. 해방 후 1946년 3의사의 유해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정인보 선생 등의 노력으로 국내로 봉환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영화 ‘아나키스트’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몇 있을 뿐.
상하이 '육삼정' 의거 직후 중일 경찰에 체포됐을 때 백정기 의사. 자료사진에는 백구파로 나온다. 백 의사가 구파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붙인 것으로 판단.
성공한 ‘윤봉길’ 실패한 ‘백정기’
육삼정 의거가 밀정에 의해 실패한 후 체포된 백정기, 그는 1년 전 또 다른 거사에서 실패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는 상하이 점령을 자축하는 일본군 관병식이 열렸다. 이날 백정기는 윤봉길보다 한발 앞서 거사를 준비했다. 1930년대 상하이에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했다. 이 둘은 소속이 달랐기 때문에 각자 거사를 계획했고, 서로 일본군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윤봉길은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이었고, 백정기는 정화암이 이끄는 남화한인연맹이었다. 두 단체의 대표로 뽑힌 그들은 홍커우 공원에서 각자 폭탄을 품었던 것.
그런데 그날 백정기에게 문제가 생겼다. 출입증을 전해주기로 한 중국인 동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던 순간, 공원안에서 폭탄이 터진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 대신 또 다른 조선인이 거사를 성공했다는 안도감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갔을 백정기. 그리고 그는 다음 거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매년 4월이면 홍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갖고, 거사에 성공한 윤봉길 의사를 추모한다. 만약 출입증이 제대로 전달됐다면 매년 4월 29일은 백정기 의사를 기억하는 날이 됐을 지도 모른다.
10만 중국인이 따랐던 백정기
백정기는 일제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친일파 이규서 연충열 이종흥을 처단해 ‘특급 테러리스트’로 분류돼 있었다. 28세에 일본 수력발전소 파괴와 일왕 암살을 기도하며 동경에 밀입국 했다가 대지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암살 대상으로 삼았던 프로 저격수였다.
이처럼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내던졌던 백정기. 그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7세부터 정읍에서 성장했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기 2년 전 동학농민혁명 발발했던 지역으로 동학혁명의 여운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1905년 13세에 결혼하고 미래를 꿈꾸던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맞게 되면서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독립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예 백정기는 자연스럽게 민족과 역사, 조국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역사전문가들은 설명한다.
24세 되던 해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에 직접 행동을 취할 것을 결심하고, 인천에서 일본인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중국 선양으로 피신한다.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정화암, 신채호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1926년 상하이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공단연합회를 연결시켜 노동운동을 조직하고 지도에 나선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당시 그를 따르는 군중이 12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육삼정 의거를 함께 도모한 원심창, 이강훈 의사(체포 직후 모습)
‘3의사’ 중 교과서에 빠진 백의사
정열과 목숨을 바쳐 독립활동을 해온 구파 백정기, 왜 3의사 중 유일하게 교과서에서 빠졌을까. 아나키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전문가들은 실제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일본 도쿄대학의 한 교수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서 왜곡이 시작됐다고 전한다. 이러한 번역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독립군과 식민지배를 당하는 사람들, 제3국에게 ‘무정부주의’를 마치 정부조직없이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을 심어 분열과 혼선을 조작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주장한다.
또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 이념의 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제가 식민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을 무정부주의자라는 덫에 걸어둔 것을 광복 후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아예 교과서에서 배제해 버렸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심지어 ‘3의사’에서 제외시켜야 된다는 얘기마저 나온다고 하니 비운의 혁명가가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 하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진정한 독립을 지향하고자 했던 아나키스트들의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 봐야 할 것이다. 또 상하이 거리를 거닐며 조국의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의사의 목숨을 내건 희생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수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