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뚱보 김씨아저씨의 서울때밀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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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7-06 09:53본문
○ 김성호
2007년 나는 인터넷에서 중국 조선족 무연고동포를 대상한 첫 한국어능력시험이 곧 시작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제딴은 특대뉴스라고 여기고 친구 명철이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중학교를 다닐 때 나의 딱친구였는데 그때는 둘이서 하라는 공부는 뒤전으로, 자전거를 빌려가지고는 통화현 허자신이나 금두로 싸다니며 참외를 훔쳐 먹거나 평일에는 저녁 자습도 참가하지 않고 영화보러 다니기도 했다. 가정을 이룬 후에도 래왕이 있었는데 한번은 나에게 많은 자금을 꿔주어 내가 하는 장사에 큰 도움을 준적도 있었다.
근데 그는 내 전화를 받고 시큰둥한 반응이였다. 심양에서 6만원을 주기로 하고 한국행 수속을 다 밟았으니 곧 한국으로 나간다며 어디에 돈 안내고 한국 가는 일이 있느냐며 믿을수 없다는것이다. 내가 이것도 기회인만큼 놓치면 안된다고 수차례 설득을 했건만 막무가내였다.
이어서 나는 친척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며 신분증을 물어봐가면서 일일이 등록해주고 등록금까지 챙겨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다 시험에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 덩그러니 대련외국어학원에서 시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별로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 성사되여 추첨에까지 당첨되였다. 이윽고 비자도 바로 나와 2007년 음력설이 막 다가오는데도 마다하고 나는 《신나는》 한국 《나들이》에 나섰다.
정작 서울에 도착하니 앞이 막막해남을 어쩔수 없었다. 필경 외국이고 처음 하는 서울행이라 중국 대륙을 두루 다녀봤다는 나도 어리둥절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국어를 좀 한다는 나지만 한글간판의 뜻이 바로 알리지 않아 한참 쳐다보며 궁리해봐도 모르는것이 있어 망설일때가 많았다.
인천공항의 지하철역에서 녀직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동매표기에서 겨우 차표 한장 뽑은 나는 행인들에게 묻고 물어 서울남부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그때 나의 호주머니에는 달랑 떠날 때 집사람이 건네준 현찰 5만원(한화, 이하 전부 한화로 표기함)밖에 없었다.
식당일을 하는 처형이 약속된 롯데리아치킨점에서 기다리고있었다. 4500원짜리 치킨을 시켜 먹었다. 이는 내가 한국에서 처음 하는 식사였다. 이윽고 처형은 나를 데리고 다시 지하철을 타더니 영등포역에서 내려 한달에 19만원하는 다솜고시텔이라는 고시원에다 주숙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항상 일에 딸리는 처형은 다시 바빠라고 출근길에 나선다.
처형은 길림사람인데 가엾게도 30대에 남편을 잃고 고생을 많이 했다. 한국에서 식당일이 고달픈지 두 손가락 마다마디가 다 갈라터져 있었다. 처형은 가냘픈 혼자 힘으로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친정부모까지 모시고있다. 실로 존경이 가는 분이다.
고시원은 중국에는 아예 없는 개념이여서 조선족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단어다. 한국의 지방학생들이 서울에 올라가 시험을 치를 때 공부도 할수 있고 잘수도 있도록 편리하게 만든 시설로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려관과 비슷하다. 단지 매일 방세를 내는것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씩 결산한다. 내가 주숙하는 방은 두사람만 누우면 꽉 차는 단칸방이였는데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칠흙같이 캄캄하여 항상 전등을 켜고 있어야 했다. 다행히 난방이 잘되여 있어 좋았다. 밥과 국은 공짜로 제공되였다. 주방기구와 가스도 있기에 자기가 직접 만들수도 있었고 화장실에는 세탁기와 샤워시설이 마련되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