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된장 명맥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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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21 10:59본문
"전통된장 명맥 이어가겠다"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이면 꼭 된장을 끓여 아버지 밥상을 챙겨 놓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라온 한 녀인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전통된장 연구,생산에 조예가 깊은 연변록천음식문화연구원 원장 리미선 씨이다.
리미선 씨는“어떤 때는 어머니가 일하러 가면서 오빠한테 부탁해 아버지 점심상에 된장을 끓여 놓으라 해서 저도 오빠와 함께 화로불을 함께 지핀 기억이 생생한데 그 때가 바로 다섯살 때라 기억됩니다”고 설명하면서 “한번은 오빠가 놀음에 탐해 저보고 곱돌장이 끓어 넘쳐나지 않는가를 잘 살펴보라고 당부했으나 저도 그만 놀음에 탐해 곱돌장을 태워버린 일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한마디 꾸중이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어릴적부터 된장에 밥을 먹으면서 자란 리미선 씨,이것이 바로 오늘의 된장담그는 고수로 된 원초적인 힘일 것이다.
“그젯날에는 하찮은 음식으로 치부되었지만, 먹고 살기 힘들 때 조선민족의 잔뼈를 굵게한 것이 바로 된장이다. 된장이 산해진미가 몸을 감싸고 있는 오늘에 와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고, 음식분야에서 건상식품이라고 정평이 나게 되었는데 우리 조상들이 그 얼마나 지혜로웠는가 하는 것을 재삼 인식하게 된다”고 리미선 씨는 말하고 있다..
리 씨는 일찌기 연변중공업국에서 비서로 사업하다가 1997년에 연길시 흥안향 정부 선전위원으로 발령받게 된다.촌마다 사업차로 방문하게 되면서 조선족은 고유의 우세로 치부의 길을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판단하고 아낙네들에게 된장담그기,찰떡,송편,시루떡 등 전통음식을 만들어 판매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당시 행정상의 통합으로 연길시의 흥안향,연집향,의란진이 통합되어 의란진으로 개편되면서 리미선 씨는 진 부녀련합회 주임으로 발령받게 된다.
무려 30여개촌의 부녀주임들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이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그는 거기에서 촌의 녀성들과 함께 된장을 손수 담그는 한편 그젯날 어머니의 어깨넘어로 배운 된장비법을 전수하기에 이르게 되었고 또 마을 안노인들에게서도 된장 담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익히기도 했다.
2001년도에 연변민족종교국 민족경제과 과장으로 재차 발령 받은 리미선 씨는 전 주적으로 되는 민속활동조직에 몸을 담그게 된다.
즉 조선민족전통음식 전시,노인집단회갑연,민속전통체육,민족복장 전시 등 굵직한 행사조직에 심열을 몰붓게 된다.그러나 매번 행사들을 치르고 나서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즉 이러한 행사들은 일년에 한두차씩 일회성으로 치르고 나면 마치도 “꿩구워먹은 자리”처럼 후속 라인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퍼그나 안타까웠다. 한마디로 정부차원의 민속발전은 한계가 있음을 깨닳았다. 비록 정부차원의 호소로 전통민족기업들이 동원되었고 또 자금지원도 했지만 그 효과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함을 절감했다.
그는 “오직 민간단체를 세워 우리민족전통을 살려야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2006년에 ‘연변민속전통음식문화연구회’를 발족했다. 그러나 호응도는 높지 못했다. 모든 정력을 연구회에 솥아붓으려고 20012년에 사표를 내고 사회에 진출했다.
뜻있는 사람은 꿈을 현실로 되게 한다.그는 본격적으로 된장 담그기에 나섰다.지금도 그렇지만 그젯날 된장은 산발적인 가정형 생산으로 되어있다.그래서 된장이 연변지역은 물론 전국각지로 파급되자면 한계가 있다.그는 전통된장담그기 류수작업을 시작하는데 성공했고 그가 생산하는 된장은 동북3성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매년 10톤의 된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된장은 발효식품이어서 당연히 오래 담근 된장이 더 잘 숙성되어 몸에 리롭다”고 설명하고 있는 리미선 씨는 현재 건평 300평방미터의 면적에 된장전시구역,체험구역을 분류해 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약선연구회 상무리사,중국식문화연구회 리사로 활약하고 있는 리미선 씨는 “서민들이 반기는 전통음식을 많이 개발해서 건강을 챙겨드리는 것이 목적이다”며 “전통된장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은 민족의 얼 살리는 길이므로 그 어느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기에 우리민족이 지혜를 모아 함께 손에 손잡고 이 사업을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이면 꼭 된장을 끓여 아버지 밥상을 챙겨 놓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라온 한 녀인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오늘날 전통된장 연구,생산에 조예가 깊은 연변록천음식문화연구원 원장 리미선 씨이다.
리미선 씨는“어떤 때는 어머니가 일하러 가면서 오빠한테 부탁해 아버지 점심상에 된장을 끓여 놓으라 해서 저도 오빠와 함께 화로불을 함께 지핀 기억이 생생한데 그 때가 바로 다섯살 때라 기억됩니다”고 설명하면서 “한번은 오빠가 놀음에 탐해 저보고 곱돌장이 끓어 넘쳐나지 않는가를 잘 살펴보라고 당부했으나 저도 그만 놀음에 탐해 곱돌장을 태워버린 일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한마디 꾸중이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어릴적부터 된장에 밥을 먹으면서 자란 리미선 씨,이것이 바로 오늘의 된장담그는 고수로 된 원초적인 힘일 것이다.
“그젯날에는 하찮은 음식으로 치부되었지만, 먹고 살기 힘들 때 조선민족의 잔뼈를 굵게한 것이 바로 된장이다. 된장이 산해진미가 몸을 감싸고 있는 오늘에 와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고, 음식분야에서 건상식품이라고 정평이 나게 되었는데 우리 조상들이 그 얼마나 지혜로웠는가 하는 것을 재삼 인식하게 된다”고 리미선 씨는 말하고 있다..
리 씨는 일찌기 연변중공업국에서 비서로 사업하다가 1997년에 연길시 흥안향 정부 선전위원으로 발령받게 된다.촌마다 사업차로 방문하게 되면서 조선족은 고유의 우세로 치부의 길을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판단하고 아낙네들에게 된장담그기,찰떡,송편,시루떡 등 전통음식을 만들어 판매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당시 행정상의 통합으로 연길시의 흥안향,연집향,의란진이 통합되어 의란진으로 개편되면서 리미선 씨는 진 부녀련합회 주임으로 발령받게 된다.
무려 30여개촌의 부녀주임들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이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그는 거기에서 촌의 녀성들과 함께 된장을 손수 담그는 한편 그젯날 어머니의 어깨넘어로 배운 된장비법을 전수하기에 이르게 되었고 또 마을 안노인들에게서도 된장 담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익히기도 했다.
2001년도에 연변민족종교국 민족경제과 과장으로 재차 발령 받은 리미선 씨는 전 주적으로 되는 민속활동조직에 몸을 담그게 된다.
즉 조선민족전통음식 전시,노인집단회갑연,민속전통체육,민족복장 전시 등 굵직한 행사조직에 심열을 몰붓게 된다.그러나 매번 행사들을 치르고 나서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즉 이러한 행사들은 일년에 한두차씩 일회성으로 치르고 나면 마치도 “꿩구워먹은 자리”처럼 후속 라인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퍼그나 안타까웠다. 한마디로 정부차원의 민속발전은 한계가 있음을 깨닳았다. 비록 정부차원의 호소로 전통민족기업들이 동원되었고 또 자금지원도 했지만 그 효과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함을 절감했다.
그는 “오직 민간단체를 세워 우리민족전통을 살려야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2006년에 ‘연변민속전통음식문화연구회’를 발족했다. 그러나 호응도는 높지 못했다. 모든 정력을 연구회에 솥아붓으려고 20012년에 사표를 내고 사회에 진출했다.
뜻있는 사람은 꿈을 현실로 되게 한다.그는 본격적으로 된장 담그기에 나섰다.지금도 그렇지만 그젯날 된장은 산발적인 가정형 생산으로 되어있다.그래서 된장이 연변지역은 물론 전국각지로 파급되자면 한계가 있다.그는 전통된장담그기 류수작업을 시작하는데 성공했고 그가 생산하는 된장은 동북3성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매년 10톤의 된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된장은 발효식품이어서 당연히 오래 담근 된장이 더 잘 숙성되어 몸에 리롭다”고 설명하고 있는 리미선 씨는 현재 건평 300평방미터의 면적에 된장전시구역,체험구역을 분류해 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약선연구회 상무리사,중국식문화연구회 리사로 활약하고 있는 리미선 씨는 “서민들이 반기는 전통음식을 많이 개발해서 건강을 챙겨드리는 것이 목적이다”며 “전통된장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은 민족의 얼 살리는 길이므로 그 어느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기에 우리민족이 지혜를 모아 함께 손에 손잡고 이 사업을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