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의 총성, 지키지 못한 세가지 유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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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6 23:23본문
세발의 총성, 지키지 못한 세가지 유언 안중근
기사입력 : 2016-03-26 07:51
기사입력 : 2016-03-26 07:51
3월26일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입니다.
[대한人] 12. 안중근 의사
한국에서 하얼빈까지는 919km. 머나먼 이곳에 당신은 어떤 꿈을 품고 가셨습니까? 그리고 왜 당신은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까?
1909년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봅니다.
조국을 잃은 비통함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슬픈 얼굴에 결연하게 보입니다.
새 옷을 한 벌 사 입었고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이제 준비는 끝났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10월 26일 당신은 기차역으로 향합니다.
탕! 탕! 탕! 세발의 총성. 소란스러운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은 당신은 크게 외칩니다.
까레야 우라!
무려 106년 전의 일입니다. 당신이 쏜 총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정확하게 명중됐고 그 자리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뤼순 감옥으로 이동했지요. 그리고 5개월 후, 그곳에서 처음 마음먹었던 그대로 결연한 마음을 품고 당신은 세상을 떠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서 만난 1909년의 안중근. 우리는 2016년을 살고 있지만 도마 안중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듯 회자되고 있습니다.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날, 대한人 열두 번째 주인공 도마 안중근을 만나 보겠습니다.
단지동맹, 약지를 잘라 조국에 받치다
1909년 3월 5일, 비밀리에 모인 12명의 동지들은 피의 맹세를 합니다. 나라를 되찾자, 친일파를 제거하자. 외마디 비명도 없이 왼손의 무명지를 잘랐습니다. 붉은 피 앞에서 대한독립을, 이 순간의 고통은 나라를 잃은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되새겼겠지요.
우리는 이들을 동의단지회라 부릅니다. 김기룡, 강기순,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조순응, 황병길, 백남규, 김백춘, 김천화, 강계찬… 안중근이 뤼순감옥에 체포되었을 당시 단지동맹 가담자를 자신 이외에 11명이라고 밝혔지만 죽는 그날까지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는 것이 단지동맹의 목표였습니다. 이들은 3년 이내에 이를 성사 시키지 못할 경우 자살로써 속죄할 것을 왼손의 약지에 걸고 맹세 한 것입니다. 그해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동맹의 목표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죠.
단지동맹이 이뤄진 곳은 연추 커리지역으로 현재는 러시아 크라스키노입니다. 2011년 동의단지회 12명을 기리며 기념비가 세웠지요.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단지동맹 후 7개월 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명의 장소 하얼빈으로 건너갑니다. 11명의 동지들과 피로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요. 그는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올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세계의 정세는 제국주의가 강했던 시기로 이토가 하얼빈에 온 까닭 또한 러시아로부터 한반도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수순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전 9시30분 정각. 경적을 울리며 이토 히로부미가 환영 인파를 받으며 기차에서 내립니다. 그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은 직감만으로 그의 존재를 눈치 챘고 서서히 이토의 근처로 다가갑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방아쇠를 당기자 정확하게 명중된 총알. 조선침략의 선봉자였던 이토는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단지동맹 피의 약속 하나를 이룬 안중근. 이토를 쓰러뜨린 총알은 단 세발이었지만 그가 조선인들의 가슴에 박은 슬픔의 총알은 셀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 헌병에 의해 붙잡힌 안중근은 일본 관헌으로 넘겨집니다. 아마도 이토라는 거물을 저격한 안중근을 재판한다는 사실이 러시아는 부담스러웠겠죠. 또 일본이 강력하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을 겁니다.
하얼빈에서 대련으로 옮겨진 안 의사는 뤼순감옥 독방에 갇힙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일본의 침탈과 동양 평화론을 주장하며 자신은 옳은 일을 했음을 세계에 알립니다. 안중근의 하얼빈 저격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주의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자 독립의식을 고취 시켜주는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것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그러나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듯 비극이었죠.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됩니다. 어머니가 지어 보낸 하얀 수의를 입고 교수대 앞에 섭니다. 두려움 없이 쏜 세발로 목적은 이뤘지만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만 32살이었죠.
안중근 뒤에는 그보다 더욱 굳건했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에서 보듯이 아들의 죽음은 나라의 공분이었기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세상을 떠나라 단호하게 그를 향해 순국할 것을 전합니다. 이토록 강인한 어머니와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를 이뤄낸 위대한 아들. 한 사람과 한 가족의 희생에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뤼순감옥에서 사망한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인도 받으러 정근과 공근 두 동생이 찾아가지만 일본은 끝까지 악랄한 태도를 보입니다. 시신을 돌려줬을 경우 하얼빈이 독립군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결과죠.
지금도 안중근 의사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매장지로 꼽히는 곳이 있으나 남한과 북한이 공조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유해발굴조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하얼빈에 묻어줄 것. 광복된 조국에 반장해 줄 것. 돌아가 국권 회복에 힘쓸 것. 끝내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세가지 유언을 모두 지키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만행 탓이었다 변명하기에 우리는 힘이 없었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편히 살게 두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독살 당했고 둘째 아들은 변절자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녔죠. 둘째 아들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에서 명복을 빌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안중근 의사의 아들이 변절자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1910년으로부터 106년이 흘렀습니다. 신실하게 천주교를 믿었고 세계정세에 해박했으며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만 31살의 청년이 이룩한 애국정신은 천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쏜 세발의 총알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고 그의 세가지 유언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눈 앞의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고,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든 목숨을 바쳐라.
가슴에 새겨 볼 말입니다. 3월26일이라면 더더욱.
최근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다루며 안 의사를 향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잠시 잊고 살았던 그의 일생을 되돌아봅니다. 감사한 마음보다는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저뿐이 아니겠지요.
동이 트는 아침, 안중근 의사를 향한 묵념 잊지 말아주세요. /이해미 기자
한국에서 하얼빈까지는 919km. 머나먼 이곳에 당신은 어떤 꿈을 품고 가셨습니까? 그리고 왜 당신은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까?
1909년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봅니다.
조국을 잃은 비통함과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슬픈 얼굴에 결연하게 보입니다.
새 옷을 한 벌 사 입었고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이제 준비는 끝났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10월 26일 당신은 기차역으로 향합니다.
탕! 탕! 탕! 세발의 총성. 소란스러운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은 당신은 크게 외칩니다.
까레야 우라!
무려 106년 전의 일입니다. 당신이 쏜 총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정확하게 명중됐고 그 자리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뤼순 감옥으로 이동했지요. 그리고 5개월 후, 그곳에서 처음 마음먹었던 그대로 결연한 마음을 품고 당신은 세상을 떠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서 만난 1909년의 안중근. 우리는 2016년을 살고 있지만 도마 안중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듯 회자되고 있습니다.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날, 대한人 열두 번째 주인공 도마 안중근을 만나 보겠습니다.
단지동맹, 약지를 잘라 조국에 받치다
1909년 3월 5일, 비밀리에 모인 12명의 동지들은 피의 맹세를 합니다. 나라를 되찾자, 친일파를 제거하자. 외마디 비명도 없이 왼손의 무명지를 잘랐습니다. 붉은 피 앞에서 대한독립을, 이 순간의 고통은 나라를 잃은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되새겼겠지요.
우리는 이들을 동의단지회라 부릅니다. 김기룡, 강기순,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조순응, 황병길, 백남규, 김백춘, 김천화, 강계찬… 안중근이 뤼순감옥에 체포되었을 당시 단지동맹 가담자를 자신 이외에 11명이라고 밝혔지만 죽는 그날까지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는 것이 단지동맹의 목표였습니다. 이들은 3년 이내에 이를 성사 시키지 못할 경우 자살로써 속죄할 것을 왼손의 약지에 걸고 맹세 한 것입니다. 그해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동맹의 목표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죠.
단지동맹이 이뤄진 곳은 연추 커리지역으로 현재는 러시아 크라스키노입니다. 2011년 동의단지회 12명을 기리며 기념비가 세웠지요.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단지동맹 후 7개월 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명의 장소 하얼빈으로 건너갑니다. 11명의 동지들과 피로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요. 그는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올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세계의 정세는 제국주의가 강했던 시기로 이토가 하얼빈에 온 까닭 또한 러시아로부터 한반도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수순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전 9시30분 정각. 경적을 울리며 이토 히로부미가 환영 인파를 받으며 기차에서 내립니다. 그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은 직감만으로 그의 존재를 눈치 챘고 서서히 이토의 근처로 다가갑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방아쇠를 당기자 정확하게 명중된 총알. 조선침략의 선봉자였던 이토는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단지동맹 피의 약속 하나를 이룬 안중근. 이토를 쓰러뜨린 총알은 단 세발이었지만 그가 조선인들의 가슴에 박은 슬픔의 총알은 셀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 헌병에 의해 붙잡힌 안중근은 일본 관헌으로 넘겨집니다. 아마도 이토라는 거물을 저격한 안중근을 재판한다는 사실이 러시아는 부담스러웠겠죠. 또 일본이 강력하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을 겁니다.
하얼빈에서 대련으로 옮겨진 안 의사는 뤼순감옥 독방에 갇힙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일본의 침탈과 동양 평화론을 주장하며 자신은 옳은 일을 했음을 세계에 알립니다. 안중근의 하얼빈 저격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주의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자 독립의식을 고취 시켜주는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것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그러나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듯 비극이었죠.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됩니다. 어머니가 지어 보낸 하얀 수의를 입고 교수대 앞에 섭니다. 두려움 없이 쏜 세발로 목적은 이뤘지만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만 32살이었죠.
안중근 뒤에는 그보다 더욱 굳건했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에서 보듯이 아들의 죽음은 나라의 공분이었기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세상을 떠나라 단호하게 그를 향해 순국할 것을 전합니다. 이토록 강인한 어머니와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를 이뤄낸 위대한 아들. 한 사람과 한 가족의 희생에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뤼순감옥에서 사망한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인도 받으러 정근과 공근 두 동생이 찾아가지만 일본은 끝까지 악랄한 태도를 보입니다. 시신을 돌려줬을 경우 하얼빈이 독립군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결과죠.
지금도 안중근 의사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매장지로 꼽히는 곳이 있으나 남한과 북한이 공조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유해발굴조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하얼빈에 묻어줄 것. 광복된 조국에 반장해 줄 것. 돌아가 국권 회복에 힘쓸 것. 끝내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세가지 유언을 모두 지키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만행 탓이었다 변명하기에 우리는 힘이 없었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편히 살게 두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독살 당했고 둘째 아들은 변절자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녔죠. 둘째 아들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찰에서 명복을 빌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안중근 의사의 아들이 변절자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1910년으로부터 106년이 흘렀습니다. 신실하게 천주교를 믿었고 세계정세에 해박했으며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만 31살의 청년이 이룩한 애국정신은 천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쏜 세발의 총알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고 그의 세가지 유언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눈 앞의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고,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든 목숨을 바쳐라.
가슴에 새겨 볼 말입니다. 3월26일이라면 더더욱.
최근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다루며 안 의사를 향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잠시 잊고 살았던 그의 일생을 되돌아봅니다. 감사한 마음보다는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저뿐이 아니겠지요.
동이 트는 아침, 안중근 의사를 향한 묵념 잊지 말아주세요. /이해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