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성공시대] ⑤ 법무법인 태평양 홍송봉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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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7-19 00:34본문
[중국동포 성공시대] ⑤ 법무법인 태평양 홍송봉 변호사
헤이룽장성 소도시 닝안 출신…미국 드라마 보며 법률가 꿈 키워
"조선족은 '액체화 근대성' 집단…물처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
"韓, 해외노동력 수입 불가피…단일민족국가 고정관념 벗어나야"
"조선족은 '액체화 근대성' 집단…물처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
"韓, 해외노동력 수입 불가피…단일민족국가 고정관념 벗어나야"
연합뉴스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홍송봉 변호사.
(흑룡강신문=하얼빈) 3D(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분야의 산업) 종사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던 재한 조선족(중국동포)의 직업 분포가 달라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엘리트 교육을 받은 동포 3세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학계, 금융계, 무역업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등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조선족 하면 식당 종업원, 가사도우미, 건설 현장 막노동자 등을 떠올린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만 10년을 일해온 동포 3세 홍송봉(39) 변호사는 아직도 가끔 "우리나라(한국)에 조선족 변호사도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15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자리 잡은 태평양의 접견실에서 홍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오는 8월 2일이면 한국으로 건너온 지 꼬박 10년을 맞는다. 이제는 주한 중국대사관에 들를 때를 빼고는 중국 국적의 외국인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 한국 생활에 동화됐지만 이따금 언론에 중국동포에 관한 부정적 보도가 나오거나 중국동포를 비하하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한국 대학생이 강연한 것을 보니 한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의 범죄율은 7위에 그치고 있고, 특히 살인 등 강력범죄의 비율은 비교적 낮더군요. 그런데도 어쩌다 조선족에 의한 범죄 사건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조선족 전체가 우범자 집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정적 보도를 쏟아냅니다. 전체 숫자가 많다 보니 범죄가 잦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요."
홍 변호사는 "조선족들은 한국의 법률·문화와 국민감정을 존중하며 모범적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국의 동포들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변호사는 세계 어디서나 엘리트 직업의 하나로 꼽히지만 홍 변호사는 중국의 최고 명문 베이징(北京)대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는 1977년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 중류의 소도시 닝안(寧安)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할머니는 평안북도, 외할아버지는 경상남도, 외할머니는 황해도에서 건너온 전형적인 동북 3성의 조선족 이민 가족이었다.
공무원인 아버지와 도시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그리고 함께 사는 외할머니까지 출근하면 문화대혁명 때 공무원이라는 신분 탓에 호되게 시달린 외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어린 그를 돌보며 한글과 중국어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는 TV에서 접한 클래식 선율에 매료돼 음악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부모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과 소수민족으로서의 한계를 들어 만류하자 꿈을 접었다. 중학교에 진학해 특별활동 시간에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고, 클래식 감상과 트럼펫 연주는 지금도 즐기는 취미 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에 매달린 홍 변호사는 1996년 헤이룽장성에 배정된 4명 안에 들어 베이징대 법학부에 합격했다. 2000년 졸업과 함께 변호사 시험도 통과해 법률사무소 천원(天元)에 취직했다.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도 어릴 적 TV에서 본 미국의 법정 드라마 때문이었습니다. 약자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모습이 영웅처럼 비쳤거든요. 원시적인 힘겨루기가 사라지고 이제는 논리와 정보로 대결하는 시대입니다. 제 체구가 작아 변호사에 더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닝안은 조선족이 많지 않은 고장이었지만 부모는 그를 조선족 중고등학교에 다니게 했고 집에서도 한국어만 쓰도록 가르쳤다. 그 덕에 한국어가 능통해 자연히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나 중국 기업의 한국 투자 관련 업무는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주로 맡아온 분야는 외국인 직접투자(FDI), 기업 인수합병(M&A), 국제중재 등이었다. 한국 로펌 태평양과 함께 몇 차례 소송을 처리한 것이 인연이 돼 태평양으로 직장을 옮겼다.
"2006년만 해도 홍콩을 제외하면 아시아 법률시장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었고 사법정보화도 잘 이뤄져 있었습니다. 태평양에 근무하며 한국의 성공 요인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리적으로도 한국은 동북아시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므로 제게 발전과 성공의 기회가 더 많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내는 베이징대 3학년 때 만났다. 춘절(설)을 맞아 너도나도 고향으로 향할 때 돈이 없어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남아 있다가 친구의 주선으로 무용학원에 다니던 여학생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때 눈여겨본 여학생과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으나 처음에는 한족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완강하게 교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남편보다 한 해 늦게 유학차 서울로 온 아내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자녀 계획은 아내가 공부를 마치고 자리를 잡은 뒤로 미뤄놓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언어 습관의 차이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다. 태평양에 출근하는 첫날에도 여비서가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그걸 왜 묻지?'라고 속으로 의아해하며 "택시 타고 왔는데요"라고 대답해 여비서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마트에 갈 때도 샴푸, 린스 등 일상용품에 온통 외래어가 쓰여 있어 전자사전을 갖고 다니며 일일이 뜻을 찾아봐야 했다.
법률 용어나 업무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어 곤혹스러울 때가 잦았으나 이제는 홍 변호사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그가 속한 로펌도 국제화가 가속화돼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태평양의 변호사 444명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외국인 변호사는 57명에 이른다.
(흑룡강신문=하얼빈) 3D(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분야의 산업) 종사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던 재한 조선족(중국동포)의 직업 분포가 달라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엘리트 교육을 받은 동포 3세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학계, 금융계, 무역업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등에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조선족 하면 식당 종업원, 가사도우미, 건설 현장 막노동자 등을 떠올린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만 10년을 일해온 동포 3세 홍송봉(39) 변호사는 아직도 가끔 "우리나라(한국)에 조선족 변호사도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15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자리 잡은 태평양의 접견실에서 홍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오는 8월 2일이면 한국으로 건너온 지 꼬박 10년을 맞는다. 이제는 주한 중국대사관에 들를 때를 빼고는 중국 국적의 외국인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 한국 생활에 동화됐지만 이따금 언론에 중국동포에 관한 부정적 보도가 나오거나 중국동포를 비하하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한국 대학생이 강연한 것을 보니 한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의 범죄율은 7위에 그치고 있고, 특히 살인 등 강력범죄의 비율은 비교적 낮더군요. 그런데도 어쩌다 조선족에 의한 범죄 사건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조선족 전체가 우범자 집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정적 보도를 쏟아냅니다. 전체 숫자가 많다 보니 범죄가 잦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요."
홍 변호사는 "조선족들은 한국의 법률·문화와 국민감정을 존중하며 모범적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한국의 동포들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변호사는 세계 어디서나 엘리트 직업의 하나로 꼽히지만 홍 변호사는 중국의 최고 명문 베이징(北京)대 법학부를 나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는 1977년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 중류의 소도시 닝안(寧安)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할머니는 평안북도, 외할아버지는 경상남도, 외할머니는 황해도에서 건너온 전형적인 동북 3성의 조선족 이민 가족이었다.
공무원인 아버지와 도시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그리고 함께 사는 외할머니까지 출근하면 문화대혁명 때 공무원이라는 신분 탓에 호되게 시달린 외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으로 어린 그를 돌보며 한글과 중국어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는 TV에서 접한 클래식 선율에 매료돼 음악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부모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과 소수민족으로서의 한계를 들어 만류하자 꿈을 접었다. 중학교에 진학해 특별활동 시간에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고, 클래식 감상과 트럼펫 연주는 지금도 즐기는 취미 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에 매달린 홍 변호사는 1996년 헤이룽장성에 배정된 4명 안에 들어 베이징대 법학부에 합격했다. 2000년 졸업과 함께 변호사 시험도 통과해 법률사무소 천원(天元)에 취직했다.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도 어릴 적 TV에서 본 미국의 법정 드라마 때문이었습니다. 약자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모습이 영웅처럼 비쳤거든요. 원시적인 힘겨루기가 사라지고 이제는 논리와 정보로 대결하는 시대입니다. 제 체구가 작아 변호사에 더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닝안은 조선족이 많지 않은 고장이었지만 부모는 그를 조선족 중고등학교에 다니게 했고 집에서도 한국어만 쓰도록 가르쳤다. 그 덕에 한국어가 능통해 자연히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나 중국 기업의 한국 투자 관련 업무는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주로 맡아온 분야는 외국인 직접투자(FDI), 기업 인수합병(M&A), 국제중재 등이었다. 한국 로펌 태평양과 함께 몇 차례 소송을 처리한 것이 인연이 돼 태평양으로 직장을 옮겼다.
"2006년만 해도 홍콩을 제외하면 아시아 법률시장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었고 사법정보화도 잘 이뤄져 있었습니다. 태평양에 근무하며 한국의 성공 요인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리적으로도 한국은 동북아시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므로 제게 발전과 성공의 기회가 더 많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내는 베이징대 3학년 때 만났다. 춘절(설)을 맞아 너도나도 고향으로 향할 때 돈이 없어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남아 있다가 친구의 주선으로 무용학원에 다니던 여학생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때 눈여겨본 여학생과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으나 처음에는 한족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완강하게 교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남편보다 한 해 늦게 유학차 서울로 온 아내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자녀 계획은 아내가 공부를 마치고 자리를 잡은 뒤로 미뤄놓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언어 습관의 차이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다. 태평양에 출근하는 첫날에도 여비서가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그걸 왜 묻지?'라고 속으로 의아해하며 "택시 타고 왔는데요"라고 대답해 여비서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마트에 갈 때도 샴푸, 린스 등 일상용품에 온통 외래어가 쓰여 있어 전자사전을 갖고 다니며 일일이 뜻을 찾아봐야 했다.
법률 용어나 업무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어 곤혹스러울 때가 잦았으나 이제는 홍 변호사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그가 속한 로펌도 국제화가 가속화돼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태평양의 변호사 444명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외국인 변호사는 57명에 이른다.
홍 변호사도 다른 중국동포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있을 때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한국에 살 때는 외국인이자 귀환 재외동포로 경계인의 삶을 살아왔다. 정체성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에게 이달 초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서 열린 제7회 중국조선족기업가 경제교류대회 겸 제1회 조선족청년지도자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들은 중국 중앙민족대 박광성 교수의 강연은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박 교수님께서는 '액체화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시더군요. 기존의 근대화는 부동산, 큰 공장, 대규모 기계설비 등을 통해 이뤄진 '고체적 근대화'이고, 이제는 물처럼 한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식으로 발전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그분의 이론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은 선천적으로 액체화 근대성을 지닌 집단입니다. 주변에도 제 또래 조선족 상당수가 중국 전역과 한국·일본·미국·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고 현지에서 가정을 이룬 사례도 많지요. 제 남동생은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통합되는 글로벌 시대인 만큼 나라의 구분이나 민족의 차이도 열린 관점으로 바와 합니다."
당초에는 2∼3년 정도 한국에 머물다 돌아가려고 생각했다가 어느덧 체류 기간이 만 10년을 맞았다. 아내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 중국으로 돌아갈 기약은 더 미뤄질 것이다. 그런 만큼 이제 재한 조선족의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고 자신의 문제가 됐다.
한국에 와서 모국의 동포에게 서운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지 묻자 즉답을 피한 채 "다른 외국인에 비해 같은 핏줄이니까 더 잘 대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 실망감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제는 한국도 단일 민족국가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추세에 따라 외부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유럽 여러 나라가 치른 홍역을 똑같이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가 통하고 핏줄이 같은 중국동포와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구현하는 제도와 관행을 확립해야지요. 나아가 주한 외국인들이 한국을 좋아하고 이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재한 중국동포 청소년들에게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을 들려 달라고 하자 홍 변호사는 '하늘의 도는 부지런함에 보답한다'는 뜻의 '천도수근(天道酬勤)'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었다. 부연 설명을 부탁하자 "아무리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도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보다는 못하다"며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지 말고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