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주 "중국 동포 애환 담은 인천개항박물관 전시 <만주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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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13 18:01본문
오연주 "중국 동포 애환 담은 인천개항박물관 전시 <만주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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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연주 인천개항박물관 학예사, PBC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윤재선입니다> 인터뷰
[발언 전문]
`조선족` 하면 한반도를 떠나 중국 동북부로 이주해 간 우리 동포를 이르는 말이죠.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간 동포들은 독립 운동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요.
하지만 이런 역사적 의미는 희미해지고 중국 동포가 아닌 조선족이라 불리며 편견과 오해가 여전히 남아있는 게 지금의 현실인데요.
광복 71주년을 맞아 인천개항박물관이 우리 중국동포, 조선족의 역사를 다룬 전시회 `만주 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오연주 학예사 연결해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 학예사님,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 우선 제목이 눈에 띕니다.
어떤 뜻을 담고 있는 제목인가요?
▶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사는 곳 어느 곳에서나 불리우는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인데요. 이런 아리랑에는 아리랑이 만들어졌던 장소와 시대,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왔던 민중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주아리랑 역시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나셨던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나 외세에 맞섰던 민족 투쟁의 모습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노랫말과 노랫가락을 통해서 당시 만주 지역 한인 이주민들의 삶을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전시 제목을 만주아리랑이라고 지었습니다.
본토를 떠나서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 관습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민족집단을 뜻하는 것인데요.
그런 삶과 기억을 기획하신 거네요.
이 조선족, 중국 동포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흔치 않은 것 같은데, 어떤 이유로 이런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신 거예요?
▶ 우선은 저희가 운이 좋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조선족에 관련된 사진 작업을 해오신 작가인 류은규 선생님을 만나게 됐는데요. 그때 보여주시는 자료들을 보면서 `이 전시는 꼭 한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객관적인 사료, 조선족에 대한 사료와 연결된 사진 작업을 같이 한 자리에 모아서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고요.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하는 작가도 굉장히 드문데요. 이분하고 만났기 때문에 이런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 그랬군요.
전시가 총 2부로 나뉘어져 있다고 하던데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이 돼 있는 건지 설명을 해 주시면요?
▶ 1층은 우선 조선족이 만주로 이주해간 19세기 말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사진을 통해서 조선족의 정착사와 항일운동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지식을 전달하고 있고요.
2층은 류은규 작가가 찍은 항일지사들의 유가족과 후손, 그리고 평범한 지금 시대를 사는 조선족들의 모습을 찍은 포트레이트 작품 사진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고 객관적 사실과 정서적인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런 전시로 만들어봤습니다.
▷ 그렇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수많은 사진, 또 자료가 있을 텐데요.
혹시 `이것만은 꼭 봤으면 한다`거나 오연주 학예사님 보시기에 `이 사진은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하는 사진이 있으면 설명을 해 주시죠.
이게 저희가 텔레비전 같으면 사진을 보여드릴 텐데요.
어떤 게 있어요?
▶ 1, 2층에 한 점씩 꼽고 싶은데요.
1층에 액자로 원본을 전시한 사진 중에 1910년대에 찍힌 가족사진이 있어요. 이 가족사진은 만주로 이민을 떠나기 직전에 한 가족이 고향집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래서 고향과 조국을 떠날 당시의 착잡한 심정과 새로운 땅에 대한 두려움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거든요. 이 사진이 당시 만주 이민자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진이라고 생각이 돼서 하나 꼽고 싶고요.
그리고 2층 류은규 작가님 사진 중에서 `노은 김규식` 선생이라고요. 저희가 잘 알고 있는 임시정부의 김규식 선생 말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하고 함께 했었던 동명의 김규식 선생이 한 분 더 계십니다. 이 분의 따님을 김규식 선생님이 돌아가셨던 자리에서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이 할머니가 된 따님의 표정과 황량한 벌판에 선 모습이 해방 후에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던 항일독립투사들의 쓸쓸한 사후와 우리의 모순된 근대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굉장히 인상적인 사진이었고요. 이 작품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 꼭 가서 좀 보고 싶네요, 말씀만 들어도.
항일지사 후손들의 사진 수집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어떤 분들의 협조가 있었던 겁니까?
▶ 이번 전시회에 나와 있는 사진 자료, 그리고 사진 작품들은 아까 말씀드렸던 류은규 선생님께서 전적으로 다 제공해 주신 사진들입니다.
▷ 그러셨군요.
▶ 네. 이분이 8년간 중국 동북 지역에 머무시면서 직접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수집한 게 한 5만여 점 된다고 하십니다.
▷ 대단하네요.
▶ 그리고 여기에 후손이나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뵙고 사진 작업을 지금까지도 꾸준히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요즘 우리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조선족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중국 동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어떤 역사 속에서 살아온 것인지 오연주 학예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 조선족들이 일제강점기에 만주가 해외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와 있고 잘 알려져 있죠. 그런데 실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몇몇 분의 항일지사 외에 우리가 조선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당시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보호받을 장치도 없이 독립투쟁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요. 그런 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게 바로 만주지역 조선족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독립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양민을 일제가 학살하는 만행을 종종 저질렀는데요. 이런 일들이 한인사회와 독립군 조직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것이었고요. 이것은 역으로 만주지역 한인사회와 독립군 조직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겪고 해방을 맞았는데도 이분들이 그렇게 넉넉한 삶을 살지 못하셨어요. 중국근대사, 그리고 한국근대사, 우리 분단 현실. 그리고 여러 가지 격변의 근대사 속에서 어려움을 계속 겪으면서 살아오셨는데요.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조선족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 한 가지 궁금했던 부분이요. 근대사, 현대사 중에 당시 동포들이 광복을 맞지 않았습니까?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뭘까 궁금한데요.
이유가 뭐였어요?
▶ 사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이분들은 대개 일제에 의해서 반강제적으로 만주 개척을 위해 보내진 분들이었고요. 남았던 분들은 경제적 이든 정치적이든 그 이전에 일제가 강제적으로 집단적으로 이주시키기 이전에 자발적으로 만주로 가서 정착하셨던 분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때는 이미 이분들한테는 만주가 제2의 고향이 돼버렸고요.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이 지역이 사회주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이 영향을 받았던 이들이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그곳에 경제적 기반까지 확보되게 되면서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더 어려워지는 현실이 됐던 거죠.
▷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간도 지방 같은 경우도 실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 아니겠습니까?
최근의 현대사를 보면 조선족이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받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지금의 우리 조선족 중국 동포들, 중국 현지에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 중국 소수민족 중에 조선족은 그래도 이른 시기에 인정을 받았던 편이기는 해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들어서면서부터 정식으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인정을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후에 중국 개방되기 전까지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보다 우리의 옛모습을 더 잘 간직하고 살아오셨어요.
지금은 중국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가운데서 조선족 사회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부분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조선족의 역사를 잘 모르듯이 그들도 세월의 풍파 속에서 그들의 역사이자 우리의 역사였던 과거를 잊어가는 모습들이겠죠.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타국에서 조국의 문화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점이 인천에 자리잡은 화교들과 비슷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그래서인지 인천에서 이번 전시가 열리는 점이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 예. 그 점이 또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던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화교 사회가 형성돼 있는 곳이 바로 인천이잖아요. 그래서 인천은 더욱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지역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들에 대한 이해는 그들에게 공감하려는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봤을 때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동포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공감대가 쉽게 더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런 전시를 마련하게 됐죠.
▷ 안타깝게 요즘 우리 중국동포들 바라보는 국내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우리가 지금은 역사적 용어로 조선족이라고 부르지만 어떻게 보면 중국동포를 비하하는 그런 용어이기도 해서 이런 점에 대한 개선, 우리가 고쳐나갈 점은 고쳐나가야 되겠다는 이런 생각을 해보네요.
오늘 [문화라운지]에서는 중국으로 건너간 우리 동포들의 삶과 애환을 사진과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 `만주 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을 기획한 인천개항박물관의 오연주 학예사와 말씀 나눠봤습니다.
학예사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예, 감사합니다.
PBC 김영규 기자 | 최종업데이트 : 2016-08-13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