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 운동은 범민족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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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2-28 23:20본문
3 · 1 운동
3 · 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이다.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으로 조선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 정책을 펴 우리 민족이 온갖 굴욕과 고통을 받게 되자 온 민족이 들고 일어선 독립 운동이다.
1. 배경
1910년에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무단 정치를 실시하여 온갖 탄압과 착취를 일삼았다. 일본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고, 국내에서는 지식인과 종교인을 비롯해 학생 · 농민 ·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반일 감정이 더해 가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민족 자결 원칙은 항일 독립 투사들에게 크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게다가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이 일본인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2. 전개
온 국민의 항일 감정이 극도에 이르렀을 즈음, 일본에 유학 중이던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조선에서도 3월 1일에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같은 시간에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고,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졌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투옥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3. 의의
3 · 1 운동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자주민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고, 세계 여러 나라에게 조선의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보다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 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로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 모습
탑골 공원. 1919년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 독한 곳이다.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 1919년 3월 3일 서울 종로
3 · 1 운동 때 배포된 독립 선언서
태극기 목각판. 3 · 1 운동 때 만세 시위에 쓸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태극기 목각판. 3 · 1 운동 때 만세 시위에 쓸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