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Ⅰ)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Ⅰ)
최일 저 ◇ 조선인의 중국 이주 중국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민을 와서 정착하게 된 해외 이민인바 오늘의 조선족을 논할 때 한반도와의 관련성을 피해갈 수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인의 중국 이주는 19세기 중, 후반 시작되었다. 두만강, 압록강 연안의 조선인들이 개별적으로 강을 넘어 중국으로 이주를 한 것이 그 시작이다. 20세기 초 조선왕조가 일제에 병탄되면서 조선인들의 중국 이주는 첫 고봉을 이루었다. 1930년대 초에 이르러 일제는 중국의 동북지역을 점령하고 괴뢰 정권 ‘만주국’을 설립한 뒤 동북지역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강제, 반강제적인 수단으로 대량의 조선인들을 이 지역에 이주시킨다. 따라서 동북지역은 조선이주민들의 주요한 집거지가 되었고 그 중 당시 ‘간도(間島)’로 불리던 연변지역이 중심으로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이주민은 가장 많을 때 220만이 넘었는바 이는 전체 조선인의 10%로서 상당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 중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민의 목적과 경로에 근거하여 조선 이민을 대체로 아래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 ‘생계이민’19세기 말, 조선왕조는 정치, 경제, 외교 등 전방위적인 압력을 받아 급격하게 붕괴일로를 걷게 된다. 거기에 조선 북부 지역은 연이은 자연재해를 입어 북부지역의 농민들이 먼저 살길을 찾아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대안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거기에 일제가 동북지역을 점령하고 중국 침략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전략적 기획의 일부로 일제는 대량의 조선 농민들을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주시켜 ‘집단부락’을 설치하고 이 지역을 전면적인 중국 침략 전쟁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하였다. 자의, 또는 강제·반강제로 이뤄진 ‘생계이민’은 중국 조선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두 번째 유형: ‘문화이민’중국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 이민의 인구와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 이민 사회의 교육, 언론, 문학예술 등 문화 수요도 증가하게 된다. 동시에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뒤 문화 영역에 대한 통제 지어는 탄압이 날로 심화되어 조선의 지식인들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내, 외적 원인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 이주를 촉발시켰다. 한 통계에 의하면 동북지역에 거주하였거나 다녀간 조선인 작가들의 수만 해도 137명에 달한다. 『만선일보(滿鮮日報)』 편집국장을 지냈던 소설가 염상섭은 이들을 “문화부대(文化部隊)”라고 칭했다. 이들의 민족적 입장은 무척 복잡하여 적극적인 항일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친일파’들도 있었고 그밖에 중도적인 입장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다. 세 번째 유형: ‘정치이민’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조선왕조의 망국은 필연적인 결과가 되어 갔고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이 전면적으로 흥기하게 된다. 하지만 협소한 식민지 조선은 반일 운동의 전개에 불리했고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이주하여 조선이민사회를 기반으로 교육문화운동과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고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의 중심은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전이하게 되었다.
이들은 양적으로 소수를 차지하였지만 ‘반일구국’이라는 대의명분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조선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호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정치 입장도 서로 달라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으로 다양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반일운동은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는 ‘팔로군’, ‘신사군’, ‘동북항일연군’ 등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는 항일부대에 직접 참여하였다.
이들 중 엘리트들은 후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조선족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 핵심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 동북의 조선인 이주민들상술한 세 유형의 조선이민은 19세기 말에서 일제가 패망하기까지의 반세기가 넘는 과정에 ‘중국조선인’이라는 민족, 즉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을 형성하게 된다. 다양한 목적으로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조선인들은 이민역사의 진행과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아 정체성 인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된다. ◇ ‘망국노’와 ‘얼구이즈(二鬼子)’ 조선인들이 중국으로의 이민을 시간대별로 갈라 보면 19세기 말에서 1932년 ‘만주국’의 건립 사이의 이민은 자유이민이 강제이민보다 수적으로 더 많다. ‘자유이민’은 일제가 기획하고 실행한 ‘강제이민’과 구별된다. 19세기 말, 일제의 수탈과 연이은 자연재해로 곤궁해진 조선 농민들은 솔선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국가들의 압력을 받아왔던 청왕조는 동북지역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종전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개간국을 설립하여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폭 45리의 지역을 조선인 개간 구역으로 설정하고 조선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910년의 ‘한일합병’으로 조선은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1910 ~1918년)을 벌여 ‘토지소유권을 확정’한다는 등의 명목으로 수백만 조선인들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그 뒤로도 일제는 ‘산민증산계획’ 등 다양한 약탈성적인 정책을 동원하여 조선의 토지를 빼앗았다. 토지를 상실한 조선인들은 살길을 찾아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살길 찾아 남부여대하여 찾아온 동북지역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아니었다. 다수의 조선인들은 중국에 이주한 뒤에도 중국인 혹은 조선인 지주들의 땅을 소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왕조와 후일의 동북지방군벌, 중화민국정부 모두가 조선이민에 대하여 엄혹한 정책을 취하였다.
청왕조에서 실행한 ‘치발역복(剃髮易服)’이 대표적인데 조선이주민들이 청나라 사람들의 머리 모양과 복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토지 구매와 임대 등에서 불이익을 줬다.
그리고 중화민국정부에서 반포한 ‘한국인 토지 임대 규칙(韓國人土地賃貸規則)’(1927년), ‘한국 농민들을 구축할 데 관한 훈령(關於驅逐韓國農民的訓令)’(1927년), ‘한국 교민 토지 임대 회수령(韓國僑民土地賃貸回收令)’(1929년) 등 60 건의 법령들은 하나같이 조선이민들이 중국에서 토지를 획득한는 데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
중국 측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주요 원인은 조선이민의 특수한 신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이민은 망국하고 중국으로 이주한 ‘망국노’와 디아스포라인 동시에 반대로 또한 일제 식민지의 ‘신민(臣民)’이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후 조선인들은 명의 상 일본제국의 ‘국민’이다.
중국 측에서 경계하는 것이 바로 조선이민의 배후에 있는 일제였던 것으로 조선이민들이 들어오면서 뒤따를 일제의 개입이었던 것이다.
▲ 동북의 조선인 아이들중국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일제가 강대한 자본으로 중국 지주의 토지를 매수하여 다시 조선이민들에게 임대를 주어 벼농사를 짓도록 하는 행위만 보면 조선이민들은 일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토지를 강점하는 ‘얼구이즈(二鬼子)’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민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고 중국에 왔지만 중국에서 중일 간의 모순에 휘말리게 되어 그 틈새에서 힘들게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 ‘국민’과 ‘새로운 기원(起源)’ 1932년 ‘만주국’의 건립은 중국조선족의 정체성 인식에 중대한 영향을 일으켰다. 1931년 ‘9.18사변’ 즉 ‘만주사변’을 통하여 일거에 만주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완성한 일제는 1932년 ‘만주국’이란 허수아비 정권을 건립하여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집정’에 앉힌다. 직후 체결된 ‘일만의정서(日满议定书)’를 통하여 ‘만주국’은 전시기 청조와 일본 사이의 모든 불평등조약을 완전하게 승인한 동시에 ‘공동방위’의 명의로 일제 ‘관동군’의 주둔과 행동을 승인함으로 결국 실질적인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만주국’은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국가’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실행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 ‘국어’를 통한 민족적 통합이라는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지향과는 철저하게 위배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일제는 ‘오족협화(五族協和)’와 ‘낙토만주(樂土滿洲)’를 표방하면서 ‘만주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주국’의 ‘국민’으로 호명하여 제국의 질서 내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조선인들은 일찍 ‘한일합병’을 통하여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편입된 바 있기에 ‘2등국민’의 신분을 부여받고 “만주국의 중요한 구성분자임을 진실로 자각하면서 스스로 자질을 향상시키고 그 내용을 충실히 하며 기꺼이 만주국 국민의 의미를 이행하고 앞 다투어 만주국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요구받는다. 일제의 호명을 받아들이면 조선인들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망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 ‘만주국 국민’의 신분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이에 일부 조선인들은 ‘만주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자신들로 하여금 동북지역에서 ‘새로운 기원’으로 될 수 있게끔 하는 ‘공동체’로 상상하게 되었다. 중국 조선인 문단에서 활약했던 안수길 등 작가들과 조선인 중학교의 문학도들은 ‘북향(北乡)’이란 문학단체를 성립하였는데 ‘북향’은 바로 ‘한반도 북쪽의 고향’을 의미하였다. 소설가 안수길은 ‘북향’ 의식을 선전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자기의 소설 『북향보(北乡谱)』의 서문에서 “우리 부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이 고장(만주를 가리킴—필자 주)을 그 자손이 천대만대 진실로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백년대계를 꾸며야 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초기 조선이민의 꿈은 바로 “우리의 아들과 손자와 그리고 증손자, 고손자들을 위하여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일부 조선이민들은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불안감, 소외감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만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들은 ‘만주국’을 일본제국도 아니고 동시에 중국도 아닌 “새로운 고향”으로 상상하여 자신들로 하여금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국민 즉 ‘새로운 기원’이 되고자 하였다. ◇ ‘이중 혁명가’ 상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동북지역은 조선항일운동의 주전장이었다. 조선인의 항일운동은 대체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두 계열의 동질성은 ‘반제(反帝)’를 근본적인 사명으로 한다는 것이다. 두 계열의 이질성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대하는 입장에서 보이고 있는데 전자는 민족 모순의 해결 즉 ‘반제’에 치중하는 반면에 후자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유기적인 통일체로 파악하여 ‘반제반봉건’을 근본사명으로 삼았다. ▲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부대공산주의 계열의 조선항일운동은 ‘이중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바 일본제국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중국의 봉건계급을 소멸하여야 했다. 바꾸어 말하면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항일운동은 조선의 반제혁명을 완성해야 하는 동시에 중국의 반제반봉건 혁명에도 참여해야 했던 것이다. 공동한 입장을 가지고 있음으로 하여 조선의 공산주의계열의 항일운동은 자연스레 중국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계열의 조선항일무장은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에서도 “한국 민족해방운동이 만약 협애한 민족주의 위에 건축된다면 그것은 지대한 착오이다. 한국의 민족해방과 중국의 해방은 갈라놓을 수 없는 임무로 이는 한국의 노동 군중이 반드시 중국의 토지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에 참가하여야 함을 결정하였다.”고 인정하였다. 뜻인즉 중국의 조선인들은 이방인이고 이민족이긴 하지만 중국인과 동일한 역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바 중국에서의 생존은 반드시 중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인의 ‘이중 혁명가’ 신분을 인정한 것은 후일 ‘토지개혁’ 등 문제에 있어서 중국 조선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조치로 이어졌고 나아가 ‘중국조선족’의 형성에 근본적인 영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반제’ 투쟁은 완성되었지만 중국의 ‘반봉건’ 투쟁은 계속 진행해야 했고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항일 무장은 뒤이어 중국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의 국내 해방전쟁에 투입되었고 이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함께 싸웠다. ▲ 광복 전 용정의 조선인 시가지동일한 목적으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어깨 겯고 싸우는 과정에 조선이주민의 정체성 인식에도 점차 변화가 생겼다. 이방인의 신분에서 주인공적인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조선이주민은 점차 그렇게 '중국 조선족'으로 되어 갔다. 내, 외적 원인이 공동으로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Ⅱ)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