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상해 홍구공원엔 붉은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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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작성일25-02-26 15:48본문
신지식장학회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중국 상해한국상회 8층 열린공간에서 '동학과 3.1운동의 시대정신'이라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신지식장학회(상임이사 백승기) 회원 20여명이 광복80주년을 맞아 지난 2월20일 중국 상해한국상회 8층 열린 공간에서 ‘동학과 3.1운동의 시대정신’이라는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신지식장학회(이하 장학회), 흥사단 상해지부, 재외동포신문이 공동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현지 교민 50여명 등 총 70여명이 참가했다.
백승기 이사는 인사말을 통해 “이번 세미나가 단순한 역사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을 오늘날 어떻게 계승‧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다”며 “동학은 민중이 중심이 된 사회개혁운동이었으며 3.1운동은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향한 거대한 외침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1919년 3.1운동을 대표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동학)가 15명, 천주교 16명, 불교 2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탁종한 한국상회(한국인회) 회장은 축사를 통해 “3.1절 106주년을 앞두고 상해 역사 문화 탐방 및 세미나가 우리의 역사와 독립정신을 되새기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며 “이번 기회를 통해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독립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첫 발제자로 나선 신동만 전 백제문화연구원은, ‘동학혁명의 사상적 배경과 의의라는 주제’를 통해 동학의 3.1운동과의 관계성을 설명했다.
그는 “19세기 조선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三政)이 문란하고 탐관오리의 발호와 폐악으로 백성의 고통이 극한 상태에서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그야말로 내우위기에 봉착했다”며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사상이 민중봉기로 이어지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탐관오리와 무능한 지배층에 항거한 반봉건운동이요, 신분철폐와 과부의 재가 등 사회개혁을 외친 근대화 운동이며,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맞선 외세 배격을 위한 자주화 운동이다”며 “이런 동학 정신이 곧 3.1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됐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인이 15명으로 이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고 모든 지도자의 활동비조차도 천도교의 성금으로 충당됐다”고 강조했다.
신지식장학회는 2월 20일 상해한국상회와 차세대 역사교육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두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선필 히어로고문은, ‘천도교와 상해임시정부’라는 주제 강연을 통해 “동학의 3대 교조인 손병희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했다”며 “이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정치에 되도록 관여하지 않고 종교와 교육 위주의 활동을 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됐지만, 1918년 윌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이를 지체없이 받아들여 3.1운동을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김 고문은 이어 “상해 임정에서 천도교인들이 다양한 보직을 맡아 폭넓은 활동을 하는 등 임정 내 위상이 크게 높아지기도 했지만 1921년 임정 내부갈등과 독립운동 방식의 차이, 1922년 손병희 사후 내부 분열 등으로 천도교는 임정과는 거리를 두게 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세번째 발제자인 고혜선 안중근전주기념관 관장은 ‘안중근 의거, 對3.1운동 영향과 현대적 교훈’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고 관장은 “어린 시절 말타기와 사격을 즐긴 명사수이기도 한 안중근은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 인재양성에 기여하는 등 교육과 민족계몽에 앞장섰다”며 “1909년 한일병합조약을 설계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조선 민족의 저항을 세계에 알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라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인용, 제국주의를 막기 위해서 국제적 연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며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북한의 도발 등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안중근 장군이 우리의 미래세대의 경종을 주고 있다”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
상해 루쉰공원 내 매헌 윤봉길 기념관 입구에 윤봉길 의사가 일제를 향해 수통폭탄을 던진 현장에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졌다.
장학회 탐방단은 이번 세미나에 앞서 윤봉길 의사가 일제를 향해 수통폭탄을 던진 홍구공원(虹口公園) 내 매헌 윤봉길 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둘러봤다. 홍구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난 4월20일. 윤봉길 기념관 주위는 홍매화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윤봉길의 혼이 담긴 피의 꽃이 아닐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윤봉길 의사가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촉시다.
이날 탐방단으로 참가한 한 일원은 “윤봉길 의사가 꽃다운 스물다섯의 나이에 저렇게 두 눈을 가린 안대와 사지가 묶인 채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한 장면의 사진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엄습해 온다”는 말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기념관은 한국인들로 추정되는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매헌 윤봉길 기념관과 대조를 이뤘다. 이날 오후 4시 기준, 탐방객이 850명이라고 밝힌 이명필 히어로역사연구회 고문은 1층 부엌으로 안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당시 조선은 유교영향으로 남자들은 아예 부엌에도 들어가지 않아 갖은 설거지를 여성들이 맡았다”며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뒷바라지 하는데 헌신한 여성들도 독립지사로 기억해 달라”는 말로 부엌에 들어온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이번 세미나에서 장학회는 상해 거주 교민과 한국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MOU를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