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초원에 울리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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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3-25 14:39|본문
“아리랑”, 초원에 울리는 노래
김호림
흰 양떼가 구름처럼 흐르고, 마두금(馬頭琴, 몽골족 악기) 소리가 “둥기당당” 울린다. 진짜 한 점의 산수화와 같은 초원의 목가적인 풍경이다…
흰 양떼가 구름처럼 흐르고, 마두금(馬頭琴, 몽골족 악기) 소리가 “둥기당당” 울린다. 진짜 한 점의 산수화와 같은 초원의 목가적인 풍경이다…
바로 이곳에 1천여년 전 벌써 발해인들이 살았다고 하니 진짜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발해국은 200여년 존속한 후 기원 926년 거란(契丹)에 멸망된다. 거란은 포로한 발해인을 현재의 내몽고 동부지역에 위치한 요(遼)나라 중경(中京) 대정부(大定府)에 끌어가며, 이곳에 삼한현(三韓縣)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때 이 지역에 사는 한인은 약 5천 가구 되었다고 한다.
내몽고 소재지인 훅호트시에서 지인의 소개를 받아 김일권(남, 68세)옹을 만났다.
“지금도 동부 지역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아요. 우리 내몽고에서 제일 집중된 곳이죠.” 김일권옹은 손을 꼽아가면서 이렇게 필자에게 해석을 했다. 반세기를 내몽고에서 지질탐사로 살아온 그는 내몽고의 산 “지도”나 별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 내몽고 동부에서 사는 조선족들은 발해유민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후 조선족농민들은 만주 땅을 거쳐 직간접적으로 대흥안령 남쪽기슭에 찾아온다. 그들은 강을 따라 벼 재배에 적합한 곳을 찾았으며, 이런 곳에 논을 풀고 한데 모여 살았다. “수림이 서면 새가 날아드는 법”, 지금 조선족농민의 약 97%는 내몽고 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내몽고초원의 일점홍(一點紅)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조선족향과 25개의 조선족촌 역시 이곳에 위치한다.
“조선족들은 황하 상류에도 논을 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없어졌어요.” 김일권옹은 이렇게 한마디 보탠다.
지난 세기 40년대, 조선족들은 개척민으로 내몽고 중부에 이주하여 논을 수만 정보 풀었다. 그러나 개답 후 토지의 알칼리성화 등 현상이 심각했으며, 또 일제 치하에 벌렸던 공사였던지라 이들은 광복 후 모두 현지를 떠나갔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들을 앞선 20세기 이전에 내몽고 지역에서 생활한 조선족들은 아직 소상하게 기재된 게 없다. 약 1천년의 역사가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이야기이다.
10여년 전, 내몽고 조선족 유지들은 더는 이런 유감을 가지지 말고자 책자 “내몽고 조선민족”을 펴낸다.
“한마디로 어려움 그 자체였죠. 경비가 부족했고, 전문 인력도 없었잖아요.” 책자 저술인의 한사람이었던 오성건(남, 47세)씨는 그때의 어려움을 이렇게 호소하였다.
전문인원이 아니었던 그들은 전부 여가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경비를 아끼느라 웬만한 곳은 두발로 걸어 다녔고, 조금 멀면 자전거로 이동했다고 한다. 5년여의 산고를 겪으며 묶은 이 책은 내몽고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되고 있다.
이 책자에 따르면 일찍 100년 전에 내몽고 지역에는 벌써 수렵꾼, 벌목공, 철도부설 인력, 만주국 정부의 직원 등으로 살고 있은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다. 내몽고와 러시아 접경지대인 만주리에도 조선족이 여러 가구 살았다고 한다. 10여년 전까지 생존해있던 노인들의 경력을 인터뷰한 이런 내용은 신빙성이 자못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화국 창건 후 내몽고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의 숫자는 급상승을 한다. 이때 몽골포만 있던 초원에 건설현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굴지의 철강기업인 포두철강회사를 비롯하여 대형 벌목장, 종이공장이 나타났으며 이어 부근 동북3성 지역에서 살던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지원되었다.
10대의 김일권옹은 바로 이맘때 내몽고 지질탐사대에 지원된다. 그때 지질탐사대에 지원된 중국 북부지역의 인원은 약 500명으로, 조선족은 그중의 70%를 차지하는 291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족들의 문화정도가 상대적으로 높은데서 기인된 것이었다. 이때 내몽고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들은 대개 비슷한 사정이었다. 그런 원인을 증명이라도 하는 걸가, 말짱 지질탐사대 조선족대원으로 무어진 아마추어 축구팀은 프로팀인 내몽고자치구 축구팀을 제압하는 에피소드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동북 각 지역에서 내몽고에 졸업배치를 받았거나 모집, 전근된 사람들은 거개 내몽고 각 지역 도시에서 여러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내몽고의 조선족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차츰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지난 세기 90년대 사막지대와 이웃한 서부의 아라산맹(盟)에는 조선족이 불과 10여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서 길이가 2400킬로미터, 남북 최장 길이가 1700킬로미터나 되는 내몽고 전역에 두루 널려 있다는 게 참으로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내몽고자치구는 면적이 100여만 평방킬로미터로, 현재 49개 민족의 2천여만명 인구가 살고 있다. 와중에 조선족은 전체 인구의 천분의 1에 해당한 2만여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지난 100년동안 조선족들은 내몽고의 땅위에서 벼 재배 역사를 썼으며, 다른 민족들과 함께 내몽고를 건설했다. 광복 전에 항일투사로 있은 유명인물이 있는가 하면 공화국 창건후 내몽고자치구 정부의 국장 등 고위직에 근무한 사람도 있다. 전인대에 출마한 대표가 있으며, 자치구 인민대표로 있은 인물은 선후로 수십명 된다.
개혁과 개방 후 인구유동이 보다 자유롭게 되었다. 훅호트시에만 해도 외지에서 들어와 무역업, 식당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신 연해지역으로, 큰 도시로 이주하는 내몽고 원주민들도 줄을 잇는다.
“어제 오늘이 달라요. 내몽고에 사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변화가 참 많아요.” 오성건씨는 이렇게 감탄을 연발한다.
진짜 이 몇해가 이전의 몇십년에 맞먹는 같다고 한다. 그래서 책자 “내몽고의 조선민족”을 수정, 보완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이 일은 내몽고 재정경제대학 당지부서기 등 현직으로 일하는 오성건씨에게 실로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몽고 조선족연구회” 현임 회장으로 있는 그는 조선족과 관련한 일 역시 밀어놓을 수 없는 책임이라고 말한다.
1988년에 발족한 조선족연구회는 내몽고 조선족들의 명실상부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족연구회는 해마다 음력설과 5~6월 두 번에 걸쳐 조선족 행사를 개최하며, 운동회, 노래경연을 벌리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산재지역에서 조선족풍속을 이어가고, 언어와 문자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족행사는 갈수록 노인축제가 되고, 젊은이들은 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훅호트시에서 조선족소학교로 간주되는 흥안로민족소학교에는 현재 조선족 학생이 1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세기의 전성기에 학생이 무려 70여명에 이르렀다는 게 거짓말처럼 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조선족교원은 1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제 학교에 홀로 남아있는 조선족교원인 오대춘(녀, 43세)씨는 이 화제가 나오자 도리머리를 저었다. “많은 분들은 조선어를 배워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몽고자치구에 조선족이 상대적으로 집중된 아영기(旗)에서도 조선족학교의 사정은 별로 나은 게 없는 듯 했다. 학생원천이 고갈되는 등으로 아영기 조선족중학교는 지난 세기 중반부터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2년 전 중학교와 소학교가 합병하여 아영기조선족학교로 명명하는 등 집중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다.
민족어의 상실은 금방 가시적인 효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1991년 전국 인구 전면조사에 따르면 그때 포두(包頭)시에는 조선족이 도합 44가구 있었는데, 제1세대 가정에서 6가구가 두 민족으로 구성된 가정이었다. 제1세대 가정에서 파생된 63가구의 제2세대 가정에서 31가구가 두 민족으로 구성된 가정이었으며, 일부 가정은 지어 4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가정이었다고 한다.
초원에 별무리처럼 나타나 빛나던 “아리랑”의 춤사위는 그렇게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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