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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이 아까워 못죽겠소이다" (이정숙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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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5-1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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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몇 년 동안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던 집을 대청소, 정리정돈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발 디딜자리 없던 곳도 두 손이 닿으면 말끔하게 질서정연하게 되고, 찌든때 묵은때들이 강력세제에 의해 자취를 감추고 집 세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끝내주게 일한다는 할머니의 칭찬보다, 두툼한 세종대왕보다 더 자랑스러운 것은 그래도 언제나 신나고, 즐겁게 움직이는 나의 두 발과 두 손이다. 요사한 마음에 때론 "머리쓰는 일은 더 빼어나게 할 수 있는데......" 하고 방황도 하지만 그래도 손으로 하는 일 만큼 속시원히 진전이 있고, 표가 확 나는 것이 없다. 마술같은 내 손이 신기하기도 하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도 한다.
 
머리가 나쁘면 몸뚱이가 고생한단다.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다 보니 자유가 없는 일상에 대뇌기능도, 입술도 별로 사용처가 없다. 실물경제가 금융경제를 이길 수 없듯이 몸으로 버티는 인생이 씽크탱크들의 신발로 밖에 쓰일 수 없지만 그래도 비애를 느껴본 적이 없다. 가사일 앞에서와 어린이들 앞에선 항상 당당하고 여유롭고 존재의 이유가 느껴진다.
 
글쎄 노동만 해야되는 것이 내 숙명이겠지만 처음부터 "일들아, 냉큼 내 앞에 대령했거라!"하고 호통친건 아니다.
 
"고중"(사실은 중딩)공부를 할 때, 400여 명의 학급생들 가운데 유일한 백점, 이과, 문과 모두 만점을 맞으면서 어리숙했지만 공부깨는 좀 할 때었다. 나에겐 꿈쩍도 안하는 수양버드를 북북 뽑아 대는 여동창생을 머리가 둔해서로 보았고, 일 못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모주석의 지시에 한겨울에 두메산골로 쫓겨가 그렇게도 "천한"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엄동설한 강바람을 맞받아 소를 끌고 두엄을 나르고 난 이튿날 나 혼자만 눈(眼)아주 붙어 버리는 여린 피부였다.
 
남들은 두엄을 멜대로 메고 쌩쌩 날파람을 일구는데 나는 겨우 쪽지게를 메고 엉기적 거렸다. 한여름 기음을 맬 때, 집 앞 채소밭 매듯 손으로 깔끔 떨다가 머리들고 보면 모두들 나보다 한이랑씩 앞섰다. 바지에까지 허옇게 소금이 뱄고, 눈물, 땀물이 범벅이 돼서 악을 썼지만 맨날 뒤처졌다. 나와 함께 막등 공수를 받은 사람들을 보면 생산대에서 머리가 제일 둔하고 어리버리한 사람들이었다.
 
날래게 일 잘 하는 사람들은 재간둥이로 막히는 일이 없었고, 똑똑한 아주머니들은 농사일도 잘하고, 살림살이도 똑 부러지게 하였고, 집엔 윤이 흘렀다. 단순한 두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놀라운 변화들을 보고 느끼면서 노동을 "경외"게 되었다. 바보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일년도 지나 않아, 나는 흑인 못지 않은 까만 피부를 갖게 되었다. 기공원, 회계로도 일했다. 두번째 해엔 많은 공수도 벌었고, 자랑찬 선진사원으로 당선 되어서 얇은 세수수건 한장을 탔다!
 
2년의 농촌생활은 나의 "세계관"을 확 뒤집어 놓았다. 일 앞에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가족들이 신나게 만리장성을 쌓고, 훙쓰를 웨쳐도, 그들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고, 설겆이 하는게 더 좋았고, 마작, 부커가 돈을 내민다 해도 눈길 한번 안 줄 자세였다.
 
만약 下鄕하지 않았다면 나는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먹고, 입고, 쓰고, 살면서 오히려 그들을 기시하고 거지, 바보취급을 했을 것이다.
 
그 후, 20여년은 몸뚱이 편한 삶을 살다보니 가늘어진 손목과 체력도 재간도 제로인 상태로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한달간 모텔청소를 하고 나니 손가락들이 뒤틀리기 시작했지만 침구를 팽팽하게 당겨 주름하나 없이 펴는 방법(세팅)을 배워 지금껏 써먹고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도 굵직한 통뼈로 척척 일하고도 밤이면 달게 쉬는데 나는 설치다가 데이고 다치고, 拉力, 牽力, 壓力, 浮力, 慣性등 온갖 물리력을 동원해도 밤엔 손과 팔이 너무 아프고 저려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입국후 2, 3년 동안은 지하철이나 어데서나 오직 여성들의 커다란 손과 굵직한 팔뚝만을 찾아 내 눈은 헤매이었다. 일단 포착하면 한없는 흠모와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오직 팔뚝을 살찌우기 위하여 아무 음식물이나 위안에 왕창 처 넣었고(뱃살만 올랐다.) 꼴찌를 탈출하기 위하여 남보다 더 열심히 묻고, 배우고, 일해서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일이 몸에 배게 되면서 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두 손이 거쳐간 자리가 신비롭게 보이고, 사람들에게 편함과 아늑함을 제공하면서 일에서 유혹을 받았다. 공부할때, 어려운 문제풀이 후의 희열, 실험이 원만한 결과를 얻었을 때의 희열, 아해들(어린이들)과의 교류에서의 희열 못지 않게 일을 끝낸 뒤끝의 희열은 짜릿했다.
 
그래도 때때로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생각은 버릴수가 없었다. 나보다 생김새도, 머리도 별로여도 시집도 잘 가고, 잘들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요모양, 요꼴로 살고 싶지 않아서 학원도 좀 다니고, 자격증도 따내면서 기회가 되면 "철장 없는 감옥"을 탈출하려 꿈꾸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 않는한 새로움에 도전할려는 용기가 없는데다가 애들이 그렇게 귀엽고, 가사일에 싫증대신 신바람이 나니 만년 부엌데기로 밖에 살 수 없다. 스스로에게 "다시는 방황말라! 네 천직은 엄마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엄마가 되는 조건은 머리보다 본능적인 모성애와 부지런한 두 손이라 생각한다. 반백이 지나면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증가로 생각이 바뀌어야 겠는데 여전히 母鷄의 사유로 모든 생물이 다 그렇게 애틋하게 보인다. 모두 내 날개로 감싸고 싶고 챙겨주고 싶다.
 
엄마가 직장인이어서 나는 8세 부터 밥을 지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부엌에서 해방 받은 적이 없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시기에도 엄마였기에 굳세게 살았다. 팔이 빠지게 장바구니를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한 상 가득 차리고 나서 달콤히 자는 성인이 된 딸애에게"일어나서 아침 먹으렴!" 할때가 제일로 행복했다.
 
10년 한국 생활에서 물론 연두색 세종대왕님 덕분이기도 하지만, 남들이야 어떻게 보던 상관없이 오직 못말리는 모성애로 즐거이 굽이굽이를 벗어났고, 버텨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40여년이란 긴 시간동안 해온 가사일이니 내가 제일로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유일한 자리는 모성애로, 두 손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다고 위에 계신 신께서 아시고 오직 이 길로만 인도하셨다고 생각한다.
 
스티븐 호킹박사는 머리가 아까워 어찌 눈 감을꼬?! 억만장자는 재산이 아까워 어찌 두 눈 감을꼬?! 세상을 하직하는 길이 편하겠지만 아직은 두 손이 아까워 못 죽겠다. 다시는 방황 않고, 내 두 손이 움직이는 한 일들을 쫓아 다니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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