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사장 맡은 홍명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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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0-07-21 11:23|본문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면 미국 가서 돈 많이 벌었거나, 자식 농사 잘 지어 하버드 같은 명문대에 보낸 경우를 말한다. 성공의 필수요소가 돈과 자식교육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은 아무래도 속물적이다.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 존경의 마음이나 감동의 기분이 우러나지 않는다.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은 그렇게 땀흘려 번 돈을 남을 위해 쓸 때 비로소 완성된다. 나눔의 실천이 없다면,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운 눈길을 받지 못한다면 돈도 지위도 다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
▲ 재미 동포사업가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부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시샘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미국에서 페인트 도료업으로 거부(巨富)를 일군 한 동포 사업가의 확고한 소신이다. 열심히 벌어서 뜻있는 곳에 쓰는 것, 그게 사업가의 할 일이라는 게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76)의 생각이다.듀라코트는 미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앨라배마에 지사를 두고 공업용 특수페인트를 생산하는 업체다. 우리나라에는 생소하지만 미국 업계에선 ‘세라나멜’이란 브랜드로 유명하다. 건축물을 지으려면 철근코팅이 필요한데 여기에 들어가는 제품이 세라나멜이다. 소비재가 아니어서 일반인에게 친숙하지는 않지만 이 부문에선 미국 내 시장점유율 1위다. 한 해 매출은 2억달러(2400억원). 몇 조원씩 하는 대기업 매출에 비할 수는 없지만 듀라코트는 홍 회장이 맨손으로 세운 사실상 1인 지배기업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규모다.
홍 회장은 미 로스앤젤레스(LA) 동포사회에서 든든한 재정 후원자다. 남가주한국학원이 폐교 위기에 처했을 때 기금모금위원장을 맡아 학원을 살렸고,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이 되던 해에는 기념사업회 전국총회 명예회장을 맡아 행사 추진을 도왔다.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을 건립할 때 결정적 기부를 했고,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대한인 국민회관을 복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행사와 사업에 돈을 내놓은 게 수십차례, 액수를 합하면 600만달러(72억원)에 이른다. 2001년 밝은미래재단을 세우면서 10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니 60%쯤 이행한 셈이다.
직함도 많다.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 재미한인교수협회 고문,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상임고문,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UCR) 총장 자문위원 등 현재 맡고 있는 것만 꼽아도 한 손으론 부족하다. 그런 그가 최근 “이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라며 새로 맡은 직책이 있으니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사장이다. 김영옥은 미주한인 2세로 미군 사상 최초의 유색인 야전대대장을 지낸 대령 출신의 전쟁영웅이다. 2005년 작고한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는 우리 정부와 미국 대학이 합작해 세우는 최초의 해외동포 연구기관이다.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이 300만달러를 UCR에 기부하면, UCR는 300만달러의 매칭펀드를 마련해 교수직 하나와 연구소 공간을 제공하고, 여기에 재미 한인사회가 9년간 총 100만달러를 모금해 UCR에 기부한다는 3자 약정을 맺었다. 이 동포사회의 모금운동을 홍 회장이 이끌게 된 것이다. 사안의 성격상 한국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재미동포사회에선 큰 의미를 두는 게 이 연구소 설립이라고 한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듣던 중 홍 회장이 사업차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간 좀 내달라”고 요청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9일 그가 머무르는 호텔에서 있었다.
- 연구소 이사장은 어떻게 맡게 되었습니까. 그보다 김영옥 대령은 어떤 분인가요.
“몇 년 전 한국에서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이 나왔죠? 얼마 전 미국에서 영어판 초본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책을 밤새워 읽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 후손들의 역할 모델이 될 사람이구나 느꼈죠. 흔히 그 분을 전쟁영웅이라고 하는데, 꼭 전투를 잘해서 영웅이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민족의 인권 신장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그 삶이 영웅적이라는 겁니다. 작년에 로스앤젤레스에 ‘김영옥 중학교’가 생겼을 때 행사에 참석한 일본계 2세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봤는데 자기는 세상에서 김영옥 대령을 가장 존경한다고 해요. 제가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리는 일을 그동안 해왔는데, 도산 선생이 동포사회의 1세대 영웅이라면 김영옥 대령은 차세대 영웅입니다. 그런 분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생긴다는데 후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 연구소에서는 무슨 일을 하게 되나요.
“지금 한인 2세들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피부는 노란색(동양인)인데, 속은 흰(백인), 바나나 같은 생활을 합니다. 노란 피부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거죠. 이런 젊은이들에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연구를 했으면 합니다.” 우리 식으로 치면 희수(喜壽), 비행기에서 내린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도무지 피곤한 기색이 없다. 하나를 질문하면 둘, 셋까지 힘주어 설명하는 데서 노익장이 느껴진다.
- 그동안 기부를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준 게 기부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빌 게이츠 같은 갑부가 엄청난 돈을 기부하기도 하지만, 전체 기부금의 70%가 개인에게서 나오는 나라입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테이크(take)만 있고 기브(give) 문화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사람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돈 벌었으니 돈 필요한 사람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돈 끌어안고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나이들면서 이런 저런 장례식에 많이 가보았지만 저승길에 돈 가지고 가는 사람은 하나도 못봤거든요.”미국에서 오래 산 노인인데도 평범한 한국말을 유머러스하게 하는 재치가 있다. 웃으면서 말하지만 실제 자기 돈 내놓을 때 아까운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처음에는 저도 힘들었죠. 어떨 때는 도와주고도 감사하다는 말조차 못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채리티(charity·자선)라는 말보다 필랜스로피(philanthropy·인간사랑)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남에게 뭔가 베풀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거든요.”
- 가족들은 뭐라고 합니까.
“겉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솔직히 아내나 자식들의 시선이 신경쓰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미국 와서 한 가지 분명하게 배운 게 독립정신입니다. 부모에 의지해 살게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자립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절대 재산 물려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설령 나중에 줄 때 조금 주더라도 그렇게 선을 그어놓아야 독립심이 생깁니다.” 그는 1남3녀를 뒀다.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두 딸(42세·40세), 지금 부인과 결혼하면서 생긴 입양아 둘이 있다. 입양아 둘 중 큰딸은 부인이 홍 회장을 만나기 전부터 입양해 살던 혼혈아(49)이고, 막내 아들(23)은 생후 1년 만에 부모 잃은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회계사, 대학교수, 치과대 학생으로 모두 제 몫을 하고 있다고 홍 회장은 자랑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1세대 이민자들이 그렇듯 홍 회장 역시 “미국 와서 무척이나 고생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부친 홍찬은 종합일간지 평화신문(훗날 대한일보) 대표이면서 수도극장(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바뀜) 주인이었고, 동양 최대 규모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한 영화인이기도 했다. 집에는 하인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당시 문화예술사업 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의 아버지도 굴곡진 인생을 살았고, 소년은 그런 집안 분위기가 싫었다. 13살 때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가출, 부산에서 40일간 숨어 지내다 아버지의 특명을 받은 신문사 취재망에 잡혀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은 대학시험에 낙방하고서였다.“서울대 문리대에 응시했는데 친구들은 다 붙고 나만 떨어졌어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도 떡하니 붙었는데 얼굴 들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요. 다른 대학에는 붙었지만 시시하게 느껴져 다닐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참에 미국 가자 마음먹었죠. 당시 미국은 헤븐(heaven·천국)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때는 아버지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할 때였다. MGM 영화사와 합작사를 만들려고 은행 융자를 신청했으나 정치깡패의 방해로 돈이 안 나오면서 망해가고 있었다. 미 콜로라도대 화공과에 등록을 마쳤을 때 그의 수중에는 500달러밖에 없었다. 당장 돈 벌 궁리부터 해야 했다. 고용센터를 찾아가 “아무 곳이나 좋다”고 해 얻은 일자리가 목장에서 말 타고 소 몰고 젖 짜는 일. 소 발길질에 채여 온몸에 멍이 들면서도 먹고 자고 하루 1달러 준다는 말에 참고 일했다. 그러나 우유통을 트럭에 싣다가 떨어뜨려 우유를 엎지르는 바람에 더는 할 수 없었다. 2주일 만에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임금 14달러에서 엎지른 우유값 7달러를 빼고 달랑 7달러를 주었다. LA 시내로 들어와 베벌리힐스의 한 유대인 집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갔다. 크고 사나운 개의 배설물 치우는 일이 좀 어려웠지만 먹고 자고 월 30달러를 받았고, 학교 식당에서 일하면 또 월 70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는 콜로라도대에서 UCLA 화학과로 전학한 뒤였는데, 주인이 “전기요금 나온다”며 불을 못 켜게 해 손전등 아래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렇게 근근이 버티며 학교를 다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았을 때 도저히 수업료를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백인 여성인 영어 교수에게 “이제 학교 못 나오게 됐다”며 이유를 설명하자 뜻밖에도 교수는 다음날 학교에 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은행에 데려가 만기전 채권을 환전, 200달러를 건네주며 등록하라고 했다.
- 굉장히 감동받았겠네요.
“말로 다 할 수 없죠.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습니다. 그때 ‘나도 나중에 돈 벌면 남을 꼭 돕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죠. 취직해서 첫 월급 탔을 때 그 여교수에게 찾아가서 돈을 내밀었더니 ‘아이 디든 익스펙트(I didn’t expect·기대하지 않았다)’라며 깜짝 놀라더군요.”
- 화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아버지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문화예술 분야는 안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과학기술로 나가야 먹고 살 수 있다, 그것도 이것 저것 말고 한 우물을 파자, 이렇게 생각했죠.”
처음부터 창업을 한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 후 자동차도료와 수지(樹脂)를 연구하는 회사에 취직해 몇 번 직장을 옮겨보았지만 그때마다 ‘유리 천장’이 있음을 느끼고 좌절했다. 그가 개발한 기술로 회사가 큰 수입을 올리는데도 그에게 돌아오는 보너스는 쥐꼬리만큼 적었다. 같이 들어온 백인은 부사장도 되고 사장도 되는데 그는 실장직에서 더 올라갈 수 없었다. “마이너리티(소수민족)라고 이렇게 대할 수 있나”라며 울분을 삼키고 있을 때 간호사인 부인이 큰소리를 쳤다. “당신 사업하다 망하면 내가 밥 먹여 살릴 테니 걱정 말고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 2만달러로 회사를 세운 게 지금의 듀라코트다. 그때가 85년, 보통은 모험보다 안전을 택할 51세의 나이였다.
“스미토모 철강이란 회사에 납품을 하는데 일본계 경영진들이 저만 보면 ‘유, 코리언스(You, Koreans)’ 하며 비하하는 투로 말을 해요. 그래도 꾹 참았죠. 5년 뒤 우리 기술이 인정돼 다른 대기업을 제치고 스미토모와 계약을 맺었어요. 25년간 스미토모에만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후 유 코리언스 어쩌고 하는 말은 싹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제공하는 기술로 스미토모는 떼돈을 벌었으니까요.”
- 경영상 어려움이 있어도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경기가 좋아지면 고용을 늘리고, 나빠지면 해고하는 게 미국 기업에선 보편적이죠. 하지만 저는 그런 미국식 가치에 반대합니다. 반대로 종업원을 임금님같이 모시고, 가족같이 대하자는 쪽이죠. 지난해 경기침체 때 해고 대신 근로시간을 줄였어요. 올해 경기가 좋아져 종전처럼 환원하면서 지난해 근로시간 감축에 따른 임금 삭감분을 전액 지급했습니다.”
- 종업원들이 놀랐겠군요. 회사 실적이 좋던데 주식시장 상장을 안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식을 공개하면 자금 조달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제약이 많이 따릅니다. 주주들 이익에 신경써야 하니까요. 내 마음대로 사회 기부하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안 하는 거죠.”
-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회사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언젠가 처분해야겠죠. 그땐 이미 약속한 1000만달러 외에 추가로 최소 1000만달러를 기부할 생각입니다. 그 돈이 재미동포 교육하는 데 쓰여져 이민 1세대가 못한 미 주류사회 편입이 많이 이뤄진다면, 언젠가 한인 대통령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듣다보니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사업하는 사람이 모두 홍 회장 같다면 세상은 단박에 밝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