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류학생2] 일본에 조선족축구를 자리매김한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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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9-04 10:47|본문
[재일류학생2] 일본에 조선족축구를 자리매김한 유공자
인물이름 : 정걸
재일 조선족류학생1세들을 만나본다 (1)
편집자의 말:오기활선생은 2008년부터 올해 7월까지 3차에 걸쳐 근 8개월간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류학생 1세 30여명을 취재하였다.
오기활선생은 중국조선족의 외국 이동사에서 처음으로 류학생이란 신분으로 일본에 진출한 1세들의 현장을 찾고 그들의 모습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사업, 생활, 사회활동에서의 스토리, 그들이 사업,생활, 활동에서 조선족이란 요소를 어떻게 작용했는가? 이 세대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조선족의 발전에 있어서 현재의 위치와 일본진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등 문제점들과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본지는 오기활선생이 취재집필한 재일 조선족류학생1세들의 삶의 현장을 륙속 련재하게 된다.
-일본중앙문화원 정걸사무국장 인터뷰
지난 7월 11일 일본의 오오미야겐포그랜드 재일조선족컵 축구경기장에서 일본에서 조선족축구를 발족하고 자리매김시킨 유공자이며 6년째 일본중앙국제문화학원 사무국장을 맡고 류학담당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정걸(鄭杰)씨를 만났다.
이번컵 경기에 일본관동지역의 SKYNE, 백두산팀, 하나팀, 동청련팀, 오아시스팀, 쉼터, 녕고탑팀, 가나가와팀 등8개 조선족팀과 재일 한족팀인 호운(Good Luck)팀까지9개 팀이 출전했다. 소개에 따르면 재일 조선족축구경기는 해마다 3.4차씩 조직된다.
정걸씨와는 비록 첫 만남이였지만 우람진 체구와 늘찍하고 어리무던한 말투에서 믿음직한 인상이였다.
중국 《8.1》팀 선수가 일본 《건강체육전문학교》류학생 담당으로
축구는 그의 운명이였다. 훈춘태생인 정걸(1966년생, 말띠)씨는 심양부대 《8.1》팀 꼴키퍼로 활약하다가1986년에 퇴역하자 연변대학축구팀에 입대하여 축구전문대학공부를 하였다. 1992년에 대학을 졸업한후 한동안 주대외무역분야에서 근무하다가 1994년에 일본류학생으로 일본 릿쇼(立正)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2001년에 일본건강체육전문학교(日本健康体育专门学校) 류학생담당으로 근무하다가2009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중앙국제문화학원에서 류학담당일을 맡고있다.
그가 일본스포츠전문학교에서 류학담당부장으로 근무할 때 중국과 기타 여러 나라와 지구에 다니며 많은 선수와 운동애호가들을 유치하였다. 그때 중국 광주태양신축구팀에 입적하고 간염병으로 잠시 휴식하는 연변의 축구명장 김광주도 정걸씨가 일본스포츠학교에 입학시켜 학교축구팀 코치로 활약, 1년후 당년의 연변팀 리호은감독이 이를 알고 김광주를 챙겨갔다.
《모이면 할 일이 생긴다》
《모이면 할 일이 생긴다》는 말은 정걸씨의 생활신조다.
1994년에 일본 땅을 밟자 발빠르게 《조선족 만남의 마당》ㅡ 《천지협회》에 창회자의 일원으로 4.5년간 회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을 때라 우리는 편지로 련계하며 <교류 협력 공동발전》의 <천지협회>취지를 지켰습니다.》
《천지협회》초창기를 회포하며 후에는 학생모집으로 해외출장이 많아서 《천지협회》사업에 무심해졌다며 정걸씨는 자책했다.
《모이면 할 일이 생긴답니다…》
정걸씨는 《천지협회》로부터 화두를 돌려 이렇게 말하며 일본에서의 조선족축구 발족사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천지협회》로부터 인맥을 넓혀《백두산》축구팀을 조직한 후 일본서 조선족축구를 자리매하게 되기까지는 재일 조총련의 덕을 많이 보았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아직 언어관도 못 넘긴 형편에 정걸씨는 조선족들이 모여 뽈을 차자고 해도 운동장을 빌리는 등 여건으로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생각하고 찾은 것이 재일 조총련이였다.
일본 조총련산하에는 조선인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43개의 학교가 있다.
정걸씨는 피는 물보다 짙다는 것을 이국 땅에서 피부로 느꼈단다.
그때 조총련축구단의 이청경교육국담당 오배근, 및 많은 감사한 분들이 발벗고 나서 운동장을 제공하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준 외 맛있는 김치, 된장국, 불고기 등 음식까지 부담없이 제공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도움을 받고있다고 한다.
축구는 뽈 하나로 사람들간의 마음을을 접촉할수 있는 첫 보이며 서로간의 믿음을 기본으로 한다》 정철씨는 이국 땅에서 타오르는 축구사랑을 말릴수가 없어 당년에 《동북아청년련의회》(이하 동청련으로 칭함)의 멤버들과 함께 조총련을 찾아가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조총련축구단의 관심과 지도하에 정걸씨네《백두산축구팀》과《동청련》축구팀은 매달마다 축구훈련과 경기를 통해 서로간 정보와 우정을 교류하며 재일 조선족축구를 부상시켰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하여 달마다의 축구경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정걸씨는 조총련의 선배들로부터 우리 민족의 피눈물의 력사를 더 알게 되고 우리가 즐겨 먹는 불고기의 유래도 알게 되였다며 두툼한 얼굴에 웃음살을 피웠다.
2002년에 연길서 조직한 《세계조선족운동대회》때도 정걸씨는《백두산》팀과《동청련》팀 선수들《재일 조선족축구팀》을 조직하여 출전하였다.
지금 일본에 최저로 10개 이상의 조선족축구팀이 있다. 8월 9일에는 일본 관동지구 조선족운동대회를 소집하는데 경기는 축구, 배구, 탁구, 륙상 외 다양한 체육오락까지 참가인수가 아마도200명 이상이 될 것이라고 정걸씨는 소개했다.
정걸씨에 따르면 얼마 후에 고고성을 울릴 《재일 중국조선족축구협회》를 위해 지금 조선족축구발전의 유공자들인 마홍철회장과 리호회장이 조직사업을 맡고 한창 뛰고 있단다.
《축구는 합작정신의 정품이다》
도대체 축구란 무엇이고 또 축구팀이란 무엇인가는 필자의 물음에 정걸씨는 마침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한다.
축구란 뽈 하나를 놓고 사람과 사람간의 마음을 접촉하는 첫 보이며 서로간 교류의 촉매제입니다.
축구는 믿음성을 바탕으로 한 합작정신의 정품이다.
모 운동원이 남보다 뽈재간이 차하다고 해도 그에게 패스를 해주면 그는 자기한테 차려진 그 뽈에 대한 책임감으로 분발하며 그에 따른 교류가 형성된다.
축구는 철저한 단체정신(團隊精神)과 집단힘을 요구한다.
50년대에 어느 축구대원이 밖에서 맞고 돌아 왔다면 그 팀의 교련원이 당장에서 몽둥이를 들고 가해자를 찾아가서 보복을 했단다. 단체정신이 없다면 축구를 못한다는것이다.
축구를 통해 집단의 활력과 생명력이 형성되고 축구를 중심으로 지역공동체의 사회적화합이 이루어 진다는 분석이다.
축구는 모든 사람들의 성격을 표현시킨다. 우리는 일본축구선수들의 책임성과 열성, 자아관리 정신을 따라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일단 축구선수가 되면 피우던 담배와 마시던 술을 멀리하며 자기의 체질에 따라 음식을 조절 한다. 이에 비해 우리네 선수들은 자아관리에 문제가 있다.
축구팀이란 11명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목적(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협력을 하는 조직기구다. 축구팀의 성공은 집단의 노력에 달려있다. 쉽게 말하면 한개의 두뇌보다 두개 이상의 두뇌가 조화있게 협력할 때 훨씬 커다란 에너지를 방출하는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를 전지(電池)에 비유하면 전지 하나보다도 두개 이상, 11개의 전지를 련결하면 더욱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것과 같은 도리다.
연변축구를 말한다면?
정걸씨에게 올해 연변축구를 론하라는 부탁을 하니 이렇게 말했다.
-축구는 연변의 브랜드다. 《북방의 연변과 남방의 매현이 없으면 중국축구가 형성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변은《중국축구의 고향》으로서의 력사와 전통이 있는 고장이다.
-나는 연변팀을 4강까지 올린 한국의 최은택감독을 많이 만났었다. 나의 소식통에 따르면 박태하감독은 머리가 아주 명철하다. 그는 단계에 따라 순서를 잘 짜며 대방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장기(象棋)를 논다.
- 그는 선수들을 신뢰하고 차별화를 안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후덥게 포옹해 주는 것 같다
-축구는 운동장 내외가 호흡이 맞아야 한다. 올해 연변은 운동장 내외가 호흡이 잘 맞으니 서로 끌어 당기고 뭉치는 《자기마당》이 생겼다.
-옛날에 할아버지들이 50전씩 모금하여 100원씩 챙겨서 우리 선수들더러 개잡이를 하라며 고무할 때 우리 선수들의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수박할머니(리애신, 78세)의 실례가 오늘의 연변축구붐이 5, 60년대 연변축구를 련상게 하며 30년전 전국에서 이름 떨친 《광수(축구명장)시기》의 고봉강세가 돌아온 기분이다..
축구는 누구에게는 일, 누구에게 드라마, 누구에게는 생명이라고 하는데 정결씨에게는 축구가 밀어버릴래야 밀어버릴 수 없는 큰 일로 지역과는 관계없이 계속되는 사업이라고 믿어진다.
정걸씨의 축구사랑은 훈춘에서 잉태하여 중국의 대지와 섬나라 일본도에서 까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있다.
필자는 정걸씨가 조직하고 잉태시킨 《재일 중국조선족축구협회》의 자랑찬 래일을 기대해 본다.
오기활
인물이름 : 정걸
재일 조선족류학생1세들을 만나본다 (1)
편집자의 말:오기활선생은 2008년부터 올해 7월까지 3차에 걸쳐 근 8개월간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류학생 1세 30여명을 취재하였다.
오기활선생은 중국조선족의 외국 이동사에서 처음으로 류학생이란 신분으로 일본에 진출한 1세들의 현장을 찾고 그들의 모습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사업, 생활, 사회활동에서의 스토리, 그들이 사업,생활, 활동에서 조선족이란 요소를 어떻게 작용했는가? 이 세대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조선족의 발전에 있어서 현재의 위치와 일본진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등 문제점들과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본지는 오기활선생이 취재집필한 재일 조선족류학생1세들의 삶의 현장을 륙속 련재하게 된다.
-일본중앙문화원 정걸사무국장 인터뷰
지난 7월 11일 일본의 오오미야겐포그랜드 재일조선족컵 축구경기장에서 일본에서 조선족축구를 발족하고 자리매김시킨 유공자이며 6년째 일본중앙국제문화학원 사무국장을 맡고 류학담당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정걸(鄭杰)씨를 만났다.
이번컵 경기에 일본관동지역의 SKYNE, 백두산팀, 하나팀, 동청련팀, 오아시스팀, 쉼터, 녕고탑팀, 가나가와팀 등8개 조선족팀과 재일 한족팀인 호운(Good Luck)팀까지9개 팀이 출전했다. 소개에 따르면 재일 조선족축구경기는 해마다 3.4차씩 조직된다.
정걸씨와는 비록 첫 만남이였지만 우람진 체구와 늘찍하고 어리무던한 말투에서 믿음직한 인상이였다.
중국 《8.1》팀 선수가 일본 《건강체육전문학교》류학생 담당으로
축구는 그의 운명이였다. 훈춘태생인 정걸(1966년생, 말띠)씨는 심양부대 《8.1》팀 꼴키퍼로 활약하다가1986년에 퇴역하자 연변대학축구팀에 입대하여 축구전문대학공부를 하였다. 1992년에 대학을 졸업한후 한동안 주대외무역분야에서 근무하다가 1994년에 일본류학생으로 일본 릿쇼(立正)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2001년에 일본건강체육전문학교(日本健康体育专门学校) 류학생담당으로 근무하다가2009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중앙국제문화학원에서 류학담당일을 맡고있다.
그가 일본스포츠전문학교에서 류학담당부장으로 근무할 때 중국과 기타 여러 나라와 지구에 다니며 많은 선수와 운동애호가들을 유치하였다. 그때 중국 광주태양신축구팀에 입적하고 간염병으로 잠시 휴식하는 연변의 축구명장 김광주도 정걸씨가 일본스포츠학교에 입학시켜 학교축구팀 코치로 활약, 1년후 당년의 연변팀 리호은감독이 이를 알고 김광주를 챙겨갔다.
《모이면 할 일이 생긴다》
《모이면 할 일이 생긴다》는 말은 정걸씨의 생활신조다.
1994년에 일본 땅을 밟자 발빠르게 《조선족 만남의 마당》ㅡ 《천지협회》에 창회자의 일원으로 4.5년간 회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을 때라 우리는 편지로 련계하며 <교류 협력 공동발전》의 <천지협회>취지를 지켰습니다.》
《천지협회》초창기를 회포하며 후에는 학생모집으로 해외출장이 많아서 《천지협회》사업에 무심해졌다며 정걸씨는 자책했다.
《모이면 할 일이 생긴답니다…》
정걸씨는 《천지협회》로부터 화두를 돌려 이렇게 말하며 일본에서의 조선족축구 발족사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천지협회》로부터 인맥을 넓혀《백두산》축구팀을 조직한 후 일본서 조선족축구를 자리매하게 되기까지는 재일 조총련의 덕을 많이 보았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아직 언어관도 못 넘긴 형편에 정걸씨는 조선족들이 모여 뽈을 차자고 해도 운동장을 빌리는 등 여건으로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생각하고 찾은 것이 재일 조총련이였다.
일본 조총련산하에는 조선인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43개의 학교가 있다.
정걸씨는 피는 물보다 짙다는 것을 이국 땅에서 피부로 느꼈단다.
그때 조총련축구단의 이청경교육국담당 오배근, 및 많은 감사한 분들이 발벗고 나서 운동장을 제공하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준 외 맛있는 김치, 된장국, 불고기 등 음식까지 부담없이 제공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도움을 받고있다고 한다.
축구는 뽈 하나로 사람들간의 마음을을 접촉할수 있는 첫 보이며 서로간의 믿음을 기본으로 한다》 정철씨는 이국 땅에서 타오르는 축구사랑을 말릴수가 없어 당년에 《동북아청년련의회》(이하 동청련으로 칭함)의 멤버들과 함께 조총련을 찾아가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조총련축구단의 관심과 지도하에 정걸씨네《백두산축구팀》과《동청련》축구팀은 매달마다 축구훈련과 경기를 통해 서로간 정보와 우정을 교류하며 재일 조선족축구를 부상시켰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하여 달마다의 축구경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정걸씨는 조총련의 선배들로부터 우리 민족의 피눈물의 력사를 더 알게 되고 우리가 즐겨 먹는 불고기의 유래도 알게 되였다며 두툼한 얼굴에 웃음살을 피웠다.
2002년에 연길서 조직한 《세계조선족운동대회》때도 정걸씨는《백두산》팀과《동청련》팀 선수들《재일 조선족축구팀》을 조직하여 출전하였다.
지금 일본에 최저로 10개 이상의 조선족축구팀이 있다. 8월 9일에는 일본 관동지구 조선족운동대회를 소집하는데 경기는 축구, 배구, 탁구, 륙상 외 다양한 체육오락까지 참가인수가 아마도200명 이상이 될 것이라고 정걸씨는 소개했다.
정걸씨에 따르면 얼마 후에 고고성을 울릴 《재일 중국조선족축구협회》를 위해 지금 조선족축구발전의 유공자들인 마홍철회장과 리호회장이 조직사업을 맡고 한창 뛰고 있단다.
《축구는 합작정신의 정품이다》
도대체 축구란 무엇이고 또 축구팀이란 무엇인가는 필자의 물음에 정걸씨는 마침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한다.
축구란 뽈 하나를 놓고 사람과 사람간의 마음을 접촉하는 첫 보이며 서로간 교류의 촉매제입니다.
축구는 믿음성을 바탕으로 한 합작정신의 정품이다.
모 운동원이 남보다 뽈재간이 차하다고 해도 그에게 패스를 해주면 그는 자기한테 차려진 그 뽈에 대한 책임감으로 분발하며 그에 따른 교류가 형성된다.
축구는 철저한 단체정신(團隊精神)과 집단힘을 요구한다.
50년대에 어느 축구대원이 밖에서 맞고 돌아 왔다면 그 팀의 교련원이 당장에서 몽둥이를 들고 가해자를 찾아가서 보복을 했단다. 단체정신이 없다면 축구를 못한다는것이다.
축구를 통해 집단의 활력과 생명력이 형성되고 축구를 중심으로 지역공동체의 사회적화합이 이루어 진다는 분석이다.
축구는 모든 사람들의 성격을 표현시킨다. 우리는 일본축구선수들의 책임성과 열성, 자아관리 정신을 따라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일단 축구선수가 되면 피우던 담배와 마시던 술을 멀리하며 자기의 체질에 따라 음식을 조절 한다. 이에 비해 우리네 선수들은 자아관리에 문제가 있다.
축구팀이란 11명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목적(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협력을 하는 조직기구다. 축구팀의 성공은 집단의 노력에 달려있다. 쉽게 말하면 한개의 두뇌보다 두개 이상의 두뇌가 조화있게 협력할 때 훨씬 커다란 에너지를 방출하는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를 전지(電池)에 비유하면 전지 하나보다도 두개 이상, 11개의 전지를 련결하면 더욱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것과 같은 도리다.
연변축구를 말한다면?
정걸씨에게 올해 연변축구를 론하라는 부탁을 하니 이렇게 말했다.
-축구는 연변의 브랜드다. 《북방의 연변과 남방의 매현이 없으면 중국축구가 형성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변은《중국축구의 고향》으로서의 력사와 전통이 있는 고장이다.
-나는 연변팀을 4강까지 올린 한국의 최은택감독을 많이 만났었다. 나의 소식통에 따르면 박태하감독은 머리가 아주 명철하다. 그는 단계에 따라 순서를 잘 짜며 대방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장기(象棋)를 논다.
- 그는 선수들을 신뢰하고 차별화를 안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후덥게 포옹해 주는 것 같다
-축구는 운동장 내외가 호흡이 맞아야 한다. 올해 연변은 운동장 내외가 호흡이 잘 맞으니 서로 끌어 당기고 뭉치는 《자기마당》이 생겼다.
-옛날에 할아버지들이 50전씩 모금하여 100원씩 챙겨서 우리 선수들더러 개잡이를 하라며 고무할 때 우리 선수들의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수박할머니(리애신, 78세)의 실례가 오늘의 연변축구붐이 5, 60년대 연변축구를 련상게 하며 30년전 전국에서 이름 떨친 《광수(축구명장)시기》의 고봉강세가 돌아온 기분이다..
축구는 누구에게는 일, 누구에게 드라마, 누구에게는 생명이라고 하는데 정결씨에게는 축구가 밀어버릴래야 밀어버릴 수 없는 큰 일로 지역과는 관계없이 계속되는 사업이라고 믿어진다.
정걸씨의 축구사랑은 훈춘에서 잉태하여 중국의 대지와 섬나라 일본도에서 까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있다.
필자는 정걸씨가 조직하고 잉태시킨 《재일 중국조선족축구협회》의 자랑찬 래일을 기대해 본다.
오기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