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가의 아버지’조선족 음악가 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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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9-11 08:36|본문
중국 '군가의 아버지’조선족 음악가 정율성
중국에서 널리 불리어진‘중국 인민 해방군 군가’는 조선족 음악가 정율성이 만든 곡입니다. 중국에서 그는 ‘군가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지난 1988년 8.1 건군절을 앞두고 그때 당시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이 노래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현재 이 노래는 중국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선 음악가 정율성입니다.
이 노래의 전신은 ‘팔로군 진행곡’입니다. 이 노래는 일본이 전면적으로 중국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에 창작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 옌안 항일군정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정율성 씨는 궁무(公木)와 함께 이 노래를 창작하기로 했습니다.
창작의 편리를 위해 그들은 한 집으로 이사했고 머리를 맞대고 곡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옌안의 토굴집에서는 정율성이 궁무에게 들려주는 선율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두 음악가의 거듭되는 수정을 거쳐 '팔로군 진행곡'이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정율성의 본명은 정부은입니다. 그는 1914년에 지금의 한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봄, 19살 젊은 나이에 중국에 온 정율성은 1937년 7.7사변을 시작으로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올린을 메고 옌안으로 갔습니다.거기서 섬북공학원, 노신예술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영화예술가 쑤리(蘇里)는 “정율성은 산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타고 노래부르기를 즐겼다”면서 “그 모습이 위풍당당했으며 모두들 그를 좋아했었다”고 말했습니다.
1938년 정율성은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의 음악지도 겸 노신음악학원의 성악교원으로 일하면서 대량의 혁명 노래를 창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시인 모예(莫耶)와 함께 그때 당시 혁명지역에서 널리 불리어졌던 연안송(延安颂)을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저명한 작가 류바이위(刘白羽)는 “일본 군이 옌안에 대한 대폭격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옌안은 꽤 흥성했는데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면서 "그때 당시 심정을 잘 반영한 노래”라고 말했습니다.
1950년 조선전쟁이 일어났고 저우언라이(周恩来)총리의 비준을 거쳐 정율성은 아내와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적에 가입했습니다.
그 뒤 그는 중국 인민예술극장에서 일하다가 1976년 베이징에서 서거했으며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됐습니다.
지난 2005년, 주잉제(朱英杰) 한국 주재 중국 문화 참사관 겸 한국 주재 중국문화센터 주임은 “정율성은 항일전쟁시기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 준 음악가이자 음악으로 평화를 제창한 대표적인 음악가”라고 그를 평가했습니다. (편집:박해연,림영빈)
중국에서 널리 불리어진‘중국 인민 해방군 군가’는 조선족 음악가 정율성이 만든 곡입니다. 중국에서 그는 ‘군가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지난 1988년 8.1 건군절을 앞두고 그때 당시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이 노래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현재 이 노래는 중국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선 음악가 정율성입니다.
이 노래의 전신은 ‘팔로군 진행곡’입니다. 이 노래는 일본이 전면적으로 중국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에 창작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 옌안 항일군정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정율성 씨는 궁무(公木)와 함께 이 노래를 창작하기로 했습니다.
창작의 편리를 위해 그들은 한 집으로 이사했고 머리를 맞대고 곡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옌안의 토굴집에서는 정율성이 궁무에게 들려주는 선율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두 음악가의 거듭되는 수정을 거쳐 '팔로군 진행곡'이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정율성의 본명은 정부은입니다. 그는 1914년에 지금의 한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봄, 19살 젊은 나이에 중국에 온 정율성은 1937년 7.7사변을 시작으로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올린을 메고 옌안으로 갔습니다.거기서 섬북공학원, 노신예술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영화예술가 쑤리(蘇里)는 “정율성은 산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타고 노래부르기를 즐겼다”면서 “그 모습이 위풍당당했으며 모두들 그를 좋아했었다”고 말했습니다.
1938년 정율성은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의 음악지도 겸 노신음악학원의 성악교원으로 일하면서 대량의 혁명 노래를 창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시인 모예(莫耶)와 함께 그때 당시 혁명지역에서 널리 불리어졌던 연안송(延安颂)을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저명한 작가 류바이위(刘白羽)는 “일본 군이 옌안에 대한 대폭격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옌안은 꽤 흥성했는데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면서 "그때 당시 심정을 잘 반영한 노래”라고 말했습니다.
1950년 조선전쟁이 일어났고 저우언라이(周恩来)총리의 비준을 거쳐 정율성은 아내와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적에 가입했습니다.
그 뒤 그는 중국 인민예술극장에서 일하다가 1976년 베이징에서 서거했으며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됐습니다.
지난 2005년, 주잉제(朱英杰) 한국 주재 중국 문화 참사관 겸 한국 주재 중국문화센터 주임은 “정율성은 항일전쟁시기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 준 음악가이자 음악으로 평화를 제창한 대표적인 음악가”라고 그를 평가했습니다. (편집:박해연,림영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