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 오가며 롯데그룹 키운 신격호 명예회장, 영면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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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20-01-20 13:17|본문
한국-일본 오가며 롯데그룹 키운 신격호 명예회장, 영면에 들다
두 세기 동안 재계의 정점에 올라있던 롯데그룹 창업주
울산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사업 실패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롯데그룹을 키운 인물, 신격호 창업주
1921년 11월 3일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 둔기리의 영산 신씨 집성촌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신격호가 태어났다. 농부였던 부친은 재력이 있었지만 절대 주변에 자신의 재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신격호는 일제강점기에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인 194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현재의 와세다대학교 이학부인 와세다 고공 야간부 화학과로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재학 중이던 1944년 그에게는 고학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평소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하나미츠’라는 지인에게서 당시로는 거금인 5만 엔을 사업 자금으로 투자 받게 된 것이다.
이 돈으로 그는 전쟁으로 인해 수요가 충분했던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폭격을 당해 공장이 완파되면서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만다.
신격호는 다시 하나미츠를 찾아가 돈을 빌려서 공장을 차렸지만, 이번에도 1년 반 뒤에 공장이 다시 미군의 폭격을 받게 된다. 결국 그는 광복 이후인 1946년 사업 실패를 뒤로하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한국행을 택하게 된다.
전후의 성공과 롯데껌의 시작
신격호 창업주의 가족사진, 순서대로 장남 신동주, 신격호 창업주, 시게마쓰 하츠코 여사, 신동빈 회장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말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돈을 벌고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사업 자금을 빌려준 하나미츠는 “살길을 찾으라”라고 위로하며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를 포기했지만, 빌린 돈이니 갚자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밀항선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양한 일을 하며 생활하던 신격호가 원래 꿈꾸던 일은 ‘작가’였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생활고에 꿈을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결국 1948년에 이르러서 다시금 신격호는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다양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 이번에는 세탁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다행히도 사업은 번창했고, 개시 1년 반 만에 신격호는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원금뿐만 아니라, 물론 감사의 표시로 집 한 채도 추가로 선물하고도 돈이 남았다.
그는 남은 돈을 모아 다시금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이번에 그가 주목한 분야는 ‘껌’이었다. 당시에 시판되는 껌들을 죄다 모아서 시험해 보고, 각각의 제품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후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주변의 과자점 점주들이 납품을 위해 신격호의 연구소에서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롯데 설립, 일본을 휘어잡다
시장의 반응을 통해 가능성을 엿본 신격호는 본격적으로 투자자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1948년에 현 롯데그룹의 모태가 되는 ‘롯데’를 설립하게 된다. 사명은 그가 평소에 즐겨 보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를로테’의 애칭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었다.
롯데껌이 시판되는 시점에서는 주변의 우려가 컸다. 배고픔이 먼저였던 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주전부리에 불과한 껌이 과연 사업성이 있겠느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불량식품 단속을 위해 제정된 식품위생법이 롯데에 날개를 달았으며, 일본 내에서 분 선풍적인 풍선껌의 인기가 성공을 당겼다.
풍선껌의 인기에 시장은 커지고, 식품위생법 하에서 타 업체의 제품에 비해 롯데껌이 고평가를 받으면서 제품에 대한 신뢰도와 시장의 평가도 높아진 것이다.
1989년 개장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테마파크, 롯데월드
당시 일본 껌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하리스’를 롯데는 빠른 속도로 따라잡았으며, 1950년에는 재일한국인이 많은 도쿄 신주쿠구 신오쿠보에 껌 공장인 롯데 신주쿠공장을 설립할 수 있었다.
1953년에 이르자 롯데는 하리보를 누르고 시장 1인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통해 1960년대에는 전체 껌 시장의 70%를 장악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롯데껌의 성공은 신격호가 다른 사업 분야로의 진출의 발판이 된다. 1959년에는 롯데상사를 설립하는 데 이어 1961년에는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으로 롯데의 사업은 점차 커졌다.
한국으로의 진출과 대성공
신격호 명예회장은 이전부터 잠실에 기념비적인 ‘랜드마크’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수시로 내비쳐 왔다 신격호가 자신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군사독재시절이었던 1966년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신격호는 귀국해 1966년 동방아루미공업(현 롯데알미늄)을 세웠으며, 이듬해에는 한국 롯데그룹의 뿌리가 되는 ’롯데제과‘를 설립하게 된다.
롯데제과에서 신격호는 사장을 맡고 회장직은 유창순 전 경제부총리가 담당했다. 롯데제과의 사업이 정부의 지원하에서 성공을 거두자 신격호는 일본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속속 사업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호텔롯데를 설립했고, 롯데파이오니아를 통해 전자사업도 시도했다. 1974년에는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하고 1977년에는 삼강산업을 인수했으며, 이듬해에는 롯데유업을 세워 국내에서의 식품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1978년 신격호는 롯데그룹의 총괄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이후 롯데그룹은 식음료를 넘어 유통과 서비스에까지 사업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고도성장의 시기에서 롯데그룹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특히 일본에서의 부동산 버블은 신격호에게 커다란 부를 안겨주게 된다.
일본 부동산 버블이 절정에 달했던 1988년 신격호는 포브스가 선정한 전 세계 부자순위 4위에 올랐는데, 이는 한국인 중 역대 최고 순위로 기록돼 있다. 한국에서도 그의 사업역량은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국가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한 바 있다.
5대 그룹으로 성장, 그리고 승계
1996년까지 이어진 그룹의 성장을 통해, 롯데는 한국 10대 기업으로 진입했다. 1997년에는 우리나라에 닥친 IMF 금융위기의 상황 속에서는 업계 우위의 경쟁력에 신념을 갖고 투자를 더욱 확장했다.
그리고 이는 롯데그룹에 다시 한번 성장의 계기를 가져다주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롯데그룹은 투자를 바탕으로 더욱 성장했고, 한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 중국, 미국 등지로 진출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2006년에는 롯데쇼핑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상장하는 등 신격호는 끝을 모르고 승승장구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열정적인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롯데의 야구단
롯데그룹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군 그가 경영권 승계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였다. 차남 신동빈을 부회장으로 앉히면서 승계 작업은 가속화됐으며, 2004년에는 경영권의 무게추가 신동빈에게 기울게 된다.
신동빈이 롯데 정책본부장을 맡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을 진행하면서 경영권을 강화한 덕이었다. 일련의 흐름 속에서 신격호가 신동빈 부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준 것은 2011년으로, 그는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총괄회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2015년에 이르러서 롯데그룹에서 신격호와 신동빈 회장을 위시한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왕자의 난 이후의 퇴장
신격호 명예회장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신격호의 두 아들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은 2015년부터 경영권 분쟁을 벌인 바 있다. 발단은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신동빈 회장을 롯데홀딩스 이사에서 해임하려던 것이었다.
이후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격호가 자신을 롯데홀딩스 사장에 재임명한다는 지시서의 내용과 “신동빈을 지지하지 않으며, 그를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로 임명한 적이 없다”는라 말을 하는 영상을 공개하게 된다.
이후 신동빈 회장은 대국민 사과문 형식의 입장을 발표하고 호텔롯데 비공개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신동주 전 부회장을 한국 롯데그룹 계열사의 모든 등기이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신격호의 건강이상설이 급속히 퍼지게 된다.
신격호는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이 커지면서 2015년 7월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직에서, 이듬해에는 롯데제과 등기이사에서 49년 만에 물러났다. 그리고 2016년 4월, 치매 판정을 받은 상태인 것이 알려졌다. 치매 치료제인 아리셉트는 2010년부터 복용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신격호의 건강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고령에 치매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기에 수시로 서울 아산병원을 오가는 중이었다. 지난 7월 2일에는 입원해 열흘 만에 퇴원한 바 있으며, 19년 11월 26일에 다시 탈수증세로 앰뷸런스를 타고 입원했다가 퇴원한 바 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20년 1월 18일 밤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돼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였다. 일본 출장 중인 신동빈 롯데 회장도 급히 귀국했고 임원진까지 모여있는 상태에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