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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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2-12-23 06:50|본문
1933년 5월에 발행된 《량도전선》 제11호 표지. 《량도전선》은
항일투쟁시기 중공동만특위에서 발간된 기관지이다.
동만항일유격근거지
쏘베트정부 정치 경제 문화 로농병 위하여 복무
동만항일유격전쟁의 튼튼한 전략적기지로 건설
산악지대에 근거지 건립
일본제국주의의 파쑈통치가 극대화되고 유격대를 그 맹아시기에 소멸하려는 일본군의 군사적“토벌”이 미친 듯이 감행됨에 따라 각지의 유격대와 대중들은 자신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적을 타격하고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기지-항일유격근거지가 적발히 수요되였다.
“성세호대하게 진행된 ‘추수’, ‘춘황’투쟁이후 동만지구는 기본상에서 광범한 항일혁명군중에게 통제된 상태였습니다. 의란구거나 배초구같은곳은 혁명군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있었는데 배초구일본령사분관 관원과 경찰들은 언녕 도망쳐버리고 없었습니다. 이것은 항일유격근거지건립을 위한 군중기초가 형성되였음을 증명해줍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항일유격근거지건립을 위한 군중토대와 공산당의 지도력 및 객관적인 유리한 조건 등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동만의 중국공산당조직은 군중을 령도하여 항일투쟁을 진행한 경험이 풍부했다. 1928년 제일 처음으로 중공룡정지부를 성립한 그때로부터 연변의 공산당조직은 “붉은5월투쟁”, “8.1”길돈폭동 등 대규모적인 혁명운동을 이끌면서 그 지도력을 과시했다. 또 이미 500여명의 유격대원을 가진 4갈래의 유격대가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군중성적인 무장조직인 돌격대, 적위대, 소선대 등이 있었다. 지형조건으로 보아도 장백산일대는 고산준령으로서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퍽 유리했다.
“중공동만 각급 공산당조직들에서는 이 유리한 조건을 틀어쥐고 적들의 통치가 빈약한 산간지대와 농촌들에 항일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설명이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에 기재된 1932년(소화 7년) 11월에 분석한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간도에 있어서의 이른바 ‘쏘베트구역’”은 아래와 같다.
훈춘현 투도구로부터 오지 초모정자에 이르는 지대.
훈춘현 동포대로부터 로만국경 동남쪽 지대.
훈춘현 황구로부터 가야하동북지대를 지나 왕청현 서대파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의란구 왕우구 류채구로부터 석인구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삼도만으로부터 동불사 북쪽 위자구 차일령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화련리 북심미동으로부터 왕청현 경계 사수평에 이르는 지대.
삼도구 수침동으로부터 이도구 어랑촌에 이르는 지대.
화룡현 득미동으로부터 하광포 평정산을 지나 우심산, 류동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장인구로부터 안도현 대황구에 이르는 지대.
동만 공산당, 공청단 특위의 사업보고에서는 당시 적색유격구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
왕청현: 황구구, 소왕청구, 대황구구, 가야하구.
연길현: 만구구, 팔도구구, 삼도만구, 로투구구, 의란국구.
훈춘현: 황구구, 연통라자구, 하남구, 반가요구.
화룡현: 이도구구.
이러한 지대는 모두다 중국공산당과 그 령도밑에 있는 항일조직들이 통제하고 있는 곳들이였다. 다시말하면 일본침략군의 “토벌”로 하여 허다한 지방의 대중들은 부득불 산골인 상술한 지대에 집결되였으며 중공동만특위를 비롯한 각급 당조직들도 부득불 이러한 산간지대에 이동하였다. 이리하여 일제의 침략통치구역과 멀리 떨어진 상술한 지역들은 자연히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지역으로 되었다. 동만의 각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러한 정세와 토대우에서 창설되였다.
1932년말까지 동만에는 연길현 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길유격구, 왕청현 남부와 중부 및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왕청유격구, 화룡현 서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화룡유격구, 훈춘현 서북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훈춘유격구 등 네 개 유격구가 형성되였다. 유격구내에서 각현의 당조직에서는 유격대와 반일군중들을 이끌고 유격전을 벌리는 한편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군중투쟁이 활약적이며 진공, 방어에 유리한 지대를 골라 10여개의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왕우구, 석인구, 위자구, 능지영, 소왕청, 마촌, 가야하, 사수평, 영창동, 대황구, 연통라자, 어랑촌, 우복동 등 유격근거지가 그것이다. 유격근거지들은 둘레 60~70리, 지어 100리까지 되었으며 인구는 적어서 500~600명, 많으면 2000명도 더 되었다. 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근거지는 동만의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아래에 초보적인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왕우구항일근거지는 룡정북부의 연길, 왕청경계에 자리잡고있었다. 근거지는 왕우구, 북동, 송림동, 봉서동, 의란구 남구, 북동, 남양촌 등 몇 개의 비교적 큰 자연툰을 포섭하고있었는데 1000여호의 조선인농호가 있었다. 근거지가 건립된후 중공동만특위서기 동장영을 위수로 하는 중공동만특위기관과 중공연길현기관은 조양천으로부터 왕우구유격근거지의 고성툰으로 옮겨왔다. 이때로부터 왕우구유격근거지는 동만항일투쟁의 지도중심으로 되었다.
훈춘대황구유격근거지는 영안, 밀강의 북부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중강자, 삼안(하중구), 상중구, 청수동, 황구, 동구, 북구, 대빈랑구, 소빈랑구, 서대마구, 양목교자등 자연툰을 포섭, 1000여호의 주민이 있었으며 둘레는 1000여평방키로메터였다.
항일유격근거지들이 건립된 지역으로 보면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하통하 이북의 산악지대, 어랑촌을 중심으로 한 봉밀구일대의 산악지대, 가야하, 소왕청, 요영구를 중심으로 한 가야하량안의 산악지대,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황구령이북의 령북산악지대와 연통라자를 중심으로 한 훈춘강 이남의 산악지대들이다.
근거지의 쏘베트정부
박창욱교수는 근거지내에서의 쏘베트정부의 건립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1932년 6월, 중공중앙은 상해에서 북방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위기의 증장과 북방 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습니다. 이 결의는 실제상 제3차 ‘좌’경모험주의책략을 북방지구 공산당의 사업가운데 시달한것입니다. 이때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직부장 하성상을 이 회의에 참가시켰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만주는 특수한 상황인데 그것은 첫째로는 만주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영향이 크지 못하고 민중이 잘 발동되지 않고 있으며 둘째로는 이미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만주의 혁명은 무장을 탈취하여 일제와 싸우는것이여야 한다고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동북의 특수성을 말살하고 만주성위가 제출한 ‘동북당의 중심임무는 무장으로 일제침략에 반항하는것이다’는 주장에 대해 ‘만주특수론’이라고 비판하였으며 동북도 관내와 마찬가지로 홍군과 쏘베트정권을 건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중공동만특위는 할수 없이 중앙 ‘북방회의’정심에 따라 유격근거지에 홍색정권을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11월에는 연길현 이란구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 1932년 12월에는 왕청현 5구 가야하유격근거지에서, 훈춘황구대황구와 연통라자유격근거지에서, 1933년 1월에는 왕청현 2구 소왕청유격근거지에서, 1933년 2월에는 연길현 팔도구 석인구유격근거지에서 선후로 로농병대표대회를 소집, 중화쏘베트공화국의 헌법, 강령, 법령에 근거하여 쏘베트구역시정강령을 제정하고 구쏘베트정부와 일부 촌쏘베트정부를 선거하였다. 연길현 옹성라지구의 삼도만, 이란구의 남양촌, 연길현의 화련지구, 삼도구구의 우복동 등 지역에서는 선후로 혁명위원회를 건립하고 쏘베트정권의 직능을 대행했다.
쏘베트정부는 낡은 정권의 법령과 민족불평등제도르 페지했고 적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시하였다. 16세이상의 로동자, 농민 및 혁명군인들에게는 민주,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주었지만 부농에게는 이러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경제상에서는 봉건착취제도를 배척하면서 지주와 일제의 주구, 반혁명분자의 토지, 집, 농기구 등 자산을 몰수하여 고농, 빈농, 중농 및 유격전사들에게 분배해주었다. 8시간 로동제도를 선포하고 가렴잡세를 취소했으며 누진세를 실행했다. 쏘베트정부에서는 조선인민회금융부를 철소하고 고리대착취를 취소했으며 무리식대부의 농민신용사를 세웠다. 쏘베트정부에서는 농민들을 조직동원하여 농업생산을 추진하는 한편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꾸리기도 하였다.
쏘베트정부에서는 또 유격근거지에 소학교를 세우고 학령어린이들에 대한 “소학교의무교육법”를 공포, 실시하였다. 각 근거지에서는 투쟁실제와 군민의 수요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학교를 건립했는데 학교에서는 교육이 로동인민과 항일전쟁을 위해 복무하며 생산로동과 결합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항일전쟁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 각 근거지에는 30여개 학교가 있었다. 학교들에서는 본민족 언어문자로 수업하였다. 성인사회교육에 중시를 돌려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식자반, 야학교 등을 꾸려 문맹을 퇴치하고 사람마다 글을 읽을수 있게 하였다.
유격근거지내에서는 각종 문예오락활동도 활발히 벌리였다. “혈해지창”, “전투적인 밀림”, “경축대회”등 연극을 창작공연하였으며 수많은 항일가곡을 창작하였다. “투쟁”, “두갈래로선”, “전투일보”등 간행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군사상에서는 유격대외에 적위대, 소선대 등 반군사성조직을 건립하기도 했다.
동만유격근거지에는 1234명의 공산당원과 830명의 공청단원, 1600여명의 아동단원과 적위대원이 있었다. 유격근거지에는 2만여명의 항일군중이 있었는데 각급 공산당조직과 유격근거지의 쏘베트정부에서는 군중운동을 활발히 벌리여 반일회, 호제회, 아동단, 소선대, 부녀회 등 반일단체를 조직, 이런 조직들로 하여금 유격근거지의 생산, 건설, 전선지원, 상병간호, 보초, 한간방지, 정찰, 통신, 선전 등 활동에 적극 참가하도록 이끌면서 유격대의 작전에 배합, 근거지의 든든한 후군이 되었다.
유격근거지에서는 소형의 병기공장, 피복공장, 인쇄공장을 꾸려 무기를 수리하고 탄약, 수류탄, 토배기작탄, 군용칼, 단발권총, 군복 등을 만들어 유격대에 보냈으며 문화선전품과 교과서, 신문간행물을 인쇄하기도 했다. 동만근거지내에는 병기공장 4개, 피복공장 4개, 인쇄공장 3개가 있었다.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원인으로 하여 유격근거지는 비록 분산적이며 규모가 작고 밀접히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각급 공산당조직의 령도아래 근거지의 군민들은 일치 단결하여 유격근거지를 동만항일유격전쟁의 전략적기지로 건설하였다.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동북에서 제일 구전하고 제일 오래 지속된 항일유격근거지였습니다. 그러나 동만공산당조직이 왕명이 ‘좌’경모험주의를 집행하고 타격면을 넓혔기 때문에 유격대와 반일부대의 관계가 악화되였고 동시에 유격근거지에 쏘베트정권을 건립하여 홍색구역과 적통치구를 대립시키고 적통치구군중을 쟁취하는 사업을 틀어쥐지 않은 탓으로 홍색구역이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에 불만을 가진 부농, 부유중농 등 단결할수 있는 항일력량을 포섭하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확대하며 유격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계속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