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최초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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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2-03-05 00:29|본문
한국독립운동 력사에서 10-20년대에 창립한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가 여러곳이 되지만 최초 기지는 1909년 중국 동북지구 밀산 봉밀산 기슭 흥개호반에 세운 《한흥동》이다. 《한흥동》은 지금의 중국 흥룡강성 밀산시 백포자향 림호촌 3조지역을 말하는데 그 지리 위치로 보면 북쪽으로는 봉밀산을 등지고있고 남쪽으로는 흥개호와 린접해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러시야 륙지변경과 잇대여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1905년11월 일제는 조선황실을 강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대한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나라와 민족이 고난에처한 생사존망의 관두에 무수한 애국지사들은 일본 침략자를 항격하고 나라의 주권을 찾는 독립운동에 일떠섰다. 특히 1910년 국치이후 의병항전으로부터 독립군의 항전으로 전환되여 새도운 독립운동의 리념과 전술로 “독립전쟁론”이 형성되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에서 실시한 무단통치와 날로 가중되는 무단탄압으로하여 국내의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은 엄중한 좌절을 당하였으며 길이 막히였다. 이런 정황하에 구체적 방략으로 형성된것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고 그를 바탕으로 “독립전쟁론”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1909년2월에 미주에서 건립된 국민회를 주도로 하는 애국지사들은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의 형세와 방략을 연구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에서 한민족의 근대적 력량을 길러 그 힘으로 기회를 보아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진행하는것이 국가독립을 회복할수있는 유일한 길이라 인정했다.
그 기지에서 산업을 일으켜 생활 안정과 경제토대를 마련하면서 한편으로 청소년들을 조직하여 근대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켜 민족의 무장력량 광복군과 민족운동의 근위대를 양성하며 이 기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국내동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면서 해외에 있는 전체 한민족을 조직화하고 무장화시켜 간다면 언젠가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진행할수 있고 최후로 한민족의 국권을 회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 주장과 방략의 선코 실천자는 리상설이다 .
리상설은 1870년 음력12월 7일 조선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리행우와 벽진(碧珍) 리씨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斋)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7세때에 동부승지(同副承旨)리룡우에게 출계하여 학문에 전심하였다 1894년 25세에 甲午文科에 급제하고1895년에는 비서감 비서랑으로 첫 출사했다. 1896년27세에 성균관 관장에 올랐으며 1905년36세에 이정부 참찬( 参赞)에 발탁되였다.
1905년11월17일 을사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리상설은 의분에 역적을 처단하고 매국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한 상소문을 다섯차례 올림과 동시에 떳떳이 관직을 사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1906년4월에 리상설은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애국지사 리동녕 정순만등과 함께 망명길을 떠나 중국 상해를 거쳐 중국동북지구 룡정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한국 근대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친히 서장을 담임했다 .
1907년6월 리상설은 리준, 리위종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체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주권수호를 위한 국제외교를 시도하였다.1906년8월9일 리상설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활동으로하여 일제의 괴뢰로 전락한 한국 친일정부의 결석판결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1909년 리상설은 러시아 시베리아 연해주에 망명하여 리동녕, 리중호, 정재관등 동지를 규합하여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구의 한국동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리상설이 한국동립운동 국외무장투쟁 기지건설을 연구하고 설정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에 이끈것은 이미 1906년 4월에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조국을 떠나기전 부터였다. 당시 《서전서숙》 창설의 그 목적은 단순히 신학문의 전수에만 둔 것이 아니라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에서 인재양성에둔 철두철미한 반일성질의 학교였다.
《서전서숙》이 실시한 항일교육은 철두철미한 반일민족교육이였기에 이름만 서숙이였지 실질적인 면에서는 반일이였으며 한국동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의 일환이였던 것이다. 리상설은 불라디보스또크에서 한민회회장 김학만과 해조신문의 주편 정순만 그리고 윤일병등 당지 한민족 지도자들과 같이 한국동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구체적 후보 기지를 물색하고 그곳의 토지를 사들이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첫 시작으로는 원동림야주식회사를 세우고 중국과 러시아 여러곳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을 동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식을 사게 하고 그 자금으로 토지를 사들인 다음 그들을 그곳에 잡단이주를시켜 한국동립 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잡아가게 하는 것이였다.
그의 이 계획은 인츰 실천에 옮겨져 후보지를 사방에 물색한 결과 처음으로 중국 • 러시아 국경지 흥개호 주변을 정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쪽의 밀산부 봉밀산 지역을 우선으로 택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보면 밀산부 봉밀산 지역은 한인들이 많이 이주 정착하여 상당한 기반을 닦았고 수천리에 달하는 황무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지리상으보면 중국 • 러시아 국경지대로서 러시아 정치적 탄압을 받던 연해주보다 안전하고 조선에 주둔한 일제의 군사력량이 직접적으로 미치지않은 곳으로 민족독립운동과 무장투쟁기지 건설에 비교적 유리한 지역이였다. 리상설을 위수로하는 한국독립운동 활동가들은 밀산지구에서 토지를 사들이고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 임무를 리승희에게 맏기였다.
1909년 가을 리승희는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아래 지금의 밀산시 백포자향 림호촌 3조지역에와서 45방(약2200무)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이고 집단이민100여호를 정착시켰으며 한국독립 운동 국외 무장투쟁 첫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이 동네의 이름을 《한흥동》이라 지었는데 바로 한국을 부흥한다는 뜻이다.동시에 학교를 세웠는데 《한민학교》라 이름 지었다.1913년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홍범도가 교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진보청년들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진행하며 한국독립운동 무장조직 창건에 힘을 썼다.
리승희는 4년동안 《한흥동》에 거류하면서 《한흥동》을 한국독립운동의 유력한 국외 무장투쟁 기지로 건설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심혈을 기울리였다.그는 《동국사략》을 저술하여 학생들에게 조선력사를 가르치고 《민약》을 제정하여 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일측명》,《오강십목》을 편찬하여 마을사람들더러 외우게 하였다. 리승희는 이처럼 유학사상을 전파하는 활동을 통하여 마을사람들의 애국열정을 불러일으키고 민족독립운동 의식을 심어주었다.
리상설의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에 대한 주장은 《한흥동》 한곳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광범한 지역과 중국 동북지구 여러곳에 한인들을 정착시켜 터전을 딱고 개척하여 광범하고도 공고한 독립운동무장투쟁 기지를 창설하는 것이였다. 리상설의 《한흥동》건설에 호응하여 국내에 있는 신민회와 기타 반일단체들은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곧 한국독립운동의 당면 주요한 과업이라 인정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일떠섰다.
1910년 4월에 신민회의 주요성원들인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리종호, 김의선,류동렬,리종만, 리강, 김지간,리동휘 등은 중국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밀산부 경내에서 토지를 사들이고 토지개간 사업을 벌리며 무관학교를 세워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창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리강 김성무등을 중국 밀산에 파견하여 봉밀산 북쪽 십리와지역에 《십리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하였다. 1911년 2월 안창호,안정근등 신민회 지도자들이 십리와에 와서 기지건설을 시찰하였다 .
《한흥동》무장투쟁기지가 건립된후 조선의 평안도, 함경도와 러시야 연해주로부터 대량의 이민들이 밀산 흥개호연안에와 정착하여 당벽진,룡왕묘,봉황덕.황강,리수구,십리와,시달린즈등 한인촌을 세워 한국독립운동의 유력한 근거지로 건설했으며 동시에 후에 전개된 밀산지역의 중국 항일운동에서 이 근거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주력으로되여 불굴의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
《한흥동》기지건설은 약4년간 유지했다.그후 주요하게는 자금문제와 독립군의 전략적인 이동으로 더유지할수 없었다. 특히1933년 일제가 밀산을 침점하고 러시아와 대적하기 위하여 《잠행보용법》을 공포하고 중•러변경의 분산된 마을를 집결하여 집단부락을 만들면서 《한흥동》마을은 강제적으로 철소되였다 .
《한흥동》 무장투쟁 기지건설은 3.1운동이후 본격적인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계단으로서 그후 대한독립군의 급속적인 발전을 대폭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역 승전의 유력한 기초로 되였다. 《한흥동》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의 발원지로서 조선 근대 3대 민족사상이 통일전선을 이룬 전형이다. 또한 《한흥동》 무장투쟁 기지 건설의 최초성과 유일성은 한국독립운동 력사에서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민족력사에서 자랑스럽고 유서깊은 곳이다.그러나 지리적조건과 력사적원인으로 지금 《한흥동》무장투쟁 유적지는 흔적마저 찾아볼수 없다. 이는 빛나는 한국독립운동 력사에서 하나 유감스러운 일이라하지 않을수 없다.
리상설은 1917년 3월 2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双城子)에서 48세를 일기로 꿈에도 그리였던 조국광복을 못보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작고하였다.그는 림종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수 있으랴.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였다.
리상설의 유체는 그의 유언대로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분하 강변에서 화장하고 생전에 남긴 그의 문고와 유물도 모두 거두어 불태웠다. 1962년3월1일 대한민국정부에서 리상설에게 독립운동 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1996년 10월27일 리상설선생 기념사업회의 주관하에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분하 강변에서 리상설선생의 초혼제를 지낸 뒤 국내로 반혼하여 숭렬사 경내에 부인 서씨와 합장하여 묘지를 섰다.
/ 밀산시인민정부 맹고군
1905년11월 일제는 조선황실을 강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대한 식민통치를 실시하였다. 나라와 민족이 고난에처한 생사존망의 관두에 무수한 애국지사들은 일본 침략자를 항격하고 나라의 주권을 찾는 독립운동에 일떠섰다. 특히 1910년 국치이후 의병항전으로부터 독립군의 항전으로 전환되여 새도운 독립운동의 리념과 전술로 “독립전쟁론”이 형성되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에서 실시한 무단통치와 날로 가중되는 무단탄압으로하여 국내의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은 엄중한 좌절을 당하였으며 길이 막히였다. 이런 정황하에 구체적 방략으로 형성된것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고 그를 바탕으로 “독립전쟁론”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1909년2월에 미주에서 건립된 국민회를 주도로 하는 애국지사들은 반일투쟁과 독립운동의 형세와 방략을 연구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에서 한민족의 근대적 력량을 길러 그 힘으로 기회를 보아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진행하는것이 국가독립을 회복할수있는 유일한 길이라 인정했다.
그 기지에서 산업을 일으켜 생활 안정과 경제토대를 마련하면서 한편으로 청소년들을 조직하여 근대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켜 민족의 무장력량 광복군과 민족운동의 근위대를 양성하며 이 기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국내동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면서 해외에 있는 전체 한민족을 조직화하고 무장화시켜 간다면 언젠가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진행할수 있고 최후로 한민족의 국권을 회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 주장과 방략의 선코 실천자는 리상설이다 .
리상설은 1870년 음력12월 7일 조선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리행우와 벽진(碧珍) 리씨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斋)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7세때에 동부승지(同副承旨)리룡우에게 출계하여 학문에 전심하였다 1894년 25세에 甲午文科에 급제하고1895년에는 비서감 비서랑으로 첫 출사했다. 1896년27세에 성균관 관장에 올랐으며 1905년36세에 이정부 참찬( 参赞)에 발탁되였다.
1905년11월17일 을사매국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리상설은 의분에 역적을 처단하고 매국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한 상소문을 다섯차례 올림과 동시에 떳떳이 관직을 사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1906년4월에 리상설은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애국지사 리동녕 정순만등과 함께 망명길을 떠나 중국 상해를 거쳐 중국동북지구 룡정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한국 근대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친히 서장을 담임했다 .
1907년6월 리상설은 리준, 리위종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체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주권수호를 위한 국제외교를 시도하였다.1906년8월9일 리상설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활동으로하여 일제의 괴뢰로 전락한 한국 친일정부의 결석판결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1909년 리상설은 러시아 시베리아 연해주에 망명하여 리동녕, 리중호, 정재관등 동지를 규합하여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구의 한국동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리상설이 한국동립운동 국외무장투쟁 기지건설을 연구하고 설정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에 이끈것은 이미 1906년 4월에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조국을 떠나기전 부터였다. 당시 《서전서숙》 창설의 그 목적은 단순히 신학문의 전수에만 둔 것이 아니라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에서 인재양성에둔 철두철미한 반일성질의 학교였다.
《서전서숙》이 실시한 항일교육은 철두철미한 반일민족교육이였기에 이름만 서숙이였지 실질적인 면에서는 반일이였으며 한국동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의 일환이였던 것이다. 리상설은 불라디보스또크에서 한민회회장 김학만과 해조신문의 주편 정순만 그리고 윤일병등 당지 한민족 지도자들과 같이 한국동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구체적 후보 기지를 물색하고 그곳의 토지를 사들이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첫 시작으로는 원동림야주식회사를 세우고 중국과 러시아 여러곳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을 동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식을 사게 하고 그 자금으로 토지를 사들인 다음 그들을 그곳에 잡단이주를시켜 한국동립 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잡아가게 하는 것이였다.
그의 이 계획은 인츰 실천에 옮겨져 후보지를 사방에 물색한 결과 처음으로 중국 • 러시아 국경지 흥개호 주변을 정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쪽의 밀산부 봉밀산 지역을 우선으로 택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보면 밀산부 봉밀산 지역은 한인들이 많이 이주 정착하여 상당한 기반을 닦았고 수천리에 달하는 황무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지리상으보면 중국 • 러시아 국경지대로서 러시아 정치적 탄압을 받던 연해주보다 안전하고 조선에 주둔한 일제의 군사력량이 직접적으로 미치지않은 곳으로 민족독립운동과 무장투쟁기지 건설에 비교적 유리한 지역이였다. 리상설을 위수로하는 한국독립운동 활동가들은 밀산지구에서 토지를 사들이고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 임무를 리승희에게 맏기였다.
1909년 가을 리승희는 이민단과 함께 봉밀산아래 지금의 밀산시 백포자향 림호촌 3조지역에와서 45방(약2200무)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이고 집단이민100여호를 정착시켰으며 한국독립 운동 국외 무장투쟁 첫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이 동네의 이름을 《한흥동》이라 지었는데 바로 한국을 부흥한다는 뜻이다.동시에 학교를 세웠는데 《한민학교》라 이름 지었다.1913년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홍범도가 교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진보청년들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진행하며 한국독립운동 무장조직 창건에 힘을 썼다.
리승희는 4년동안 《한흥동》에 거류하면서 《한흥동》을 한국독립운동의 유력한 국외 무장투쟁 기지로 건설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심혈을 기울리였다.그는 《동국사략》을 저술하여 학생들에게 조선력사를 가르치고 《민약》을 제정하여 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일측명》,《오강십목》을 편찬하여 마을사람들더러 외우게 하였다. 리승희는 이처럼 유학사상을 전파하는 활동을 통하여 마을사람들의 애국열정을 불러일으키고 민족독립운동 의식을 심어주었다.
리상설의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사업에 대한 주장은 《한흥동》 한곳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광범한 지역과 중국 동북지구 여러곳에 한인들을 정착시켜 터전을 딱고 개척하여 광범하고도 공고한 독립운동무장투쟁 기지를 창설하는 것이였다. 리상설의 《한흥동》건설에 호응하여 국내에 있는 신민회와 기타 반일단체들은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곧 한국독립운동의 당면 주요한 과업이라 인정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일떠섰다.
1910년 4월에 신민회의 주요성원들인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리종호, 김의선,류동렬,리종만, 리강, 김지간,리동휘 등은 중국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밀산부 경내에서 토지를 사들이고 토지개간 사업을 벌리며 무관학교를 세워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창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리강 김성무등을 중국 밀산에 파견하여 봉밀산 북쪽 십리와지역에 《십리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 기지를 건설하였다. 1911년 2월 안창호,안정근등 신민회 지도자들이 십리와에 와서 기지건설을 시찰하였다 .
《한흥동》무장투쟁기지가 건립된후 조선의 평안도, 함경도와 러시야 연해주로부터 대량의 이민들이 밀산 흥개호연안에와 정착하여 당벽진,룡왕묘,봉황덕.황강,리수구,십리와,시달린즈등 한인촌을 세워 한국독립운동의 유력한 근거지로 건설했으며 동시에 후에 전개된 밀산지역의 중국 항일운동에서 이 근거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 주력으로되여 불굴의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
《한흥동》기지건설은 약4년간 유지했다.그후 주요하게는 자금문제와 독립군의 전략적인 이동으로 더유지할수 없었다. 특히1933년 일제가 밀산을 침점하고 러시아와 대적하기 위하여 《잠행보용법》을 공포하고 중•러변경의 분산된 마을를 집결하여 집단부락을 만들면서 《한흥동》마을은 강제적으로 철소되였다 .
《한흥동》 무장투쟁 기지건설은 3.1운동이후 본격적인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계단으로서 그후 대한독립군의 급속적인 발전을 대폭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역 승전의 유력한 기초로 되였다. 《한흥동》은 한국독립운동 국외 무장투쟁기지 건설의 발원지로서 조선 근대 3대 민족사상이 통일전선을 이룬 전형이다. 또한 《한흥동》 무장투쟁 기지 건설의 최초성과 유일성은 한국독립운동 력사에서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민족력사에서 자랑스럽고 유서깊은 곳이다.그러나 지리적조건과 력사적원인으로 지금 《한흥동》무장투쟁 유적지는 흔적마저 찾아볼수 없다. 이는 빛나는 한국독립운동 력사에서 하나 유감스러운 일이라하지 않을수 없다.
리상설은 1917년 3월 2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双城子)에서 48세를 일기로 꿈에도 그리였던 조국광복을 못보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작고하였다.그는 림종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수 있으랴.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기였다.
리상설의 유체는 그의 유언대로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분하 강변에서 화장하고 생전에 남긴 그의 문고와 유물도 모두 거두어 불태웠다. 1962년3월1일 대한민국정부에서 리상설에게 독립운동 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1996년 10월27일 리상설선생 기념사업회의 주관하에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분하 강변에서 리상설선생의 초혼제를 지낸 뒤 국내로 반혼하여 숭렬사 경내에 부인 서씨와 합장하여 묘지를 섰다.
/ 밀산시인민정부 맹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