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속의 고려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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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11-10-17 00:31|본문
중국속의 고려촌
요녕성 무순시 고려영자촌을 찾아서
요녕성 무순시에서 동쪽으로 신빈, 청원행 202국도를 따라 약 35키로미터쯤 가다 보면 원수림으로 들어가는 갈림 길목에 무순현 인민정부와 무순현 민정국에서"고려(高丽)"라고 돌에 새겨 세운 촌비가 보이는데 이 마을이 바로 고려촌이다.이 고려촌의 원래 이름은 무순현 장당진 고려영자(高丽营子)촌이었다.
고려영자촌 뻐스역. 고려란 두 글자가 뚜렸하다.
마을어귀에 무순현인민정부와 무순현민정국에서 "고려"라고 돌에 새겨 세운 촌비.
필자가 취재 길에 올라 고려영자마을 어귀에 들어서는데 맞은편에서 한족 노인 한분이 다가오기에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족노인은 성이 류씨이고 1940년에 고려영자촌에서 태여나 줄곧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먼 옛날 고려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여 고려영자라 부른다고 그가 어렸을 때 동네 노인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원래의 고려영자촌은 지금의 마을 동쪽 낮은 곳에 있었다. 1958년 대화방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마을이 침수되었고 촌민들은 정부에서 이민을 보냈다. 지금의 마을 위치에는 원래 집이 없었고 무덤뿐이었다. 1960년부터 일부분 이민을 가지 않은 사람들과 흑룡강성 안달현으로 이민을 갔던 한족들이 그 곳의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되돌아와 원래의 마을 서쪽 산언덕에 새집들을 지으면서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성기 때의 고려영자촌에는 약 600여 호가 살았다. 그중 조선족도 많이 살았고 조선족학교까지 있었다. 지금은 이 촌에 약 300여 호가 거주하는데 조선족으로는 한족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박씨(60여세) 안노인 1명뿐이다.
김은산(1932년 신빈에서 출생) 노인은 증조할아버지 때 평안북도 구성에서 고향땅을 등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와 신빈에 정착하였다. 그는 한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무순의 고려영자로 이사를 왔다. 그때 그의 가정 식솔은 증조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1940년대 고려영자촌에는 조선족이 60여호 거주하고 있었다. 한족사람 몇 집이 기와집에서 사는 이외 모두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의 가정은 한족사람의 초가집을 세내고 살았다.
일제통치시기 나이가 약 50여세 되 보이는 장봉환이란 조선족이 고려영자 촌의 구장직을 맡고 일본사람의 앞잡이노릇을 하면서 촌민들한테서 공출을 받아 가군하였다.
공출이란 일제가 저들의 침략전쟁에 충당하기 위해서 백성들로부터 양곡을 비롯한 군수용 농산물과 기타 물자들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약탈 행위였다. 공출임무를 제때에 완수하면 일본사람이 구장에게 상금을 주군 하였다. 장봉환은 조선족촌민들의 어려운 생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출을 받아 내여 일본사람에게 바치는 한편 자기의 사리를 채우군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장봉환은 조선으로 갔는데 지금 그의 자녀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
올 여름 그의 아들이 자기 부모들이 살았던 고장이라면서 한국에서 제물을 차려들고 조부의 묘소를 찾아보려고 고려영자촌에 찾아왔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묘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여 원래의 마을위치에서 서북쪽 어느 산에 묻혀있다는 말에 북방향으로 제사만 지내고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1945년"8·15" 광복후인 어느날, 그는 집에서 키우던 소를 한 마리 팔았는데 그날 밤으로 도둑이 들어 소 판 돈을 내 놓으라고 손찌검하며 을러대었다. 그의 할머니가 도둑에게 달려들면서 돈을 내놓지 않자 도둑들은 할 수가 없었던지 할머니를 사정없이 구타만하고는 가버렸다. 그날 밤에 이 마을에는 두 집에 도둑이 들었다.
1930년대 초 고려영자촌에 이미 개인서당이 있었는데 나이가 40여세 된 훈장이 5-6명의 조선족 아이들을 모아 놓고 천자문을 가르쳤다. 그도 어려서 이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배웠다.1939년에 그는 영반(营盘)조선학교에 입학하여 6년을 공부하였는데 방인호 선생이 담임교원이었다. 그 후 무순 한국인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광복을 맞았고 심양 조선중학교에서 초중을 졸업한 후 집에 돌아와 1년동안 농사를 지었다. 1949년 새 중국이 건립된 후 고려영자와 동싸르후 (东萨尔浒)에 조선족학교를 세웠다. 1951년 교육 사업에 참가한 그는 고려영자 조선학교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상급의 발령을 받고 동싸르후 조선족학교와 포가조선학교에서, 1960년부터는 회원향 흥안조선족학교 교도 주임으로, 1964년에는 전전공사 교육판공실로 전근되여 근무하였다.1980년에 다시 포가 조선족소학교로 전근되여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다. 해방초기에 교원들의 전근이 빈번하였다.
리장산(1933년 신빈에서 출생)노인은 어려서 흥경, 능계(지금의 신빈,영릉)에서 살다가 1940년에 부모들을 따라 고려영자촌으로 이사하였다. 그때 그의 가정 식솔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넷이였다. 그의 부모들은 평안북도 선천군 구산면이 고향인데 언제 중국으로 이사했는지는 모르고 있다. 일제통치시기 고려영자촌앞에는 혼하가 유유히 흘렀고 혼하 양안은 넓은 수전이였는데 고려영자 동쪽인 이화락촌과 와자화락촌 남쪽 산 밑의 혼하가에 보를 쌓고 혼하의 물을 끌어들여 관개수를 해결하였다. 지금은 옛 마을앞에 동서로 곧게 뻗어 있는 구철로 흔적 이외 기타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9세 때 영반 조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처음 학교에 가니 조선어를 배워주기에 재미있게 공부를 하였는데 약 1년이 지난 후 일제의 노화교육이 시작되면서 조선어문 이외에는 몽땅 일본어 교과서로 바뀌였으며 일본말만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는 일본어 교과서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일본어를 안 배우겠다고 배짱을 부리는 통에 그는 선생한테 구박을 받고 벌도 많이 받았다. 하여 그는 억지로 4학년까지 다니다가 광복이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마을에서 꾸리는 야학에 가끔씩 나가 천자문을 배웠다. 약 한해가 지나 그는 남잡목 조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년쯤 공부하다가 1950년 18세의 나이로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쟁터로 나갔다. 지원군 경비대에 배치되여 복무하던 와중 포탄의 파편에 맞아 부상당하여 1953년에 제대하였다.
1958년 대화방 저수지가 건설되자 고려영자촌은 저수지 물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정부에서는 조선족들을 지금의 무순 경제개발구 동대(东台)촌으로 집단이민 시키고 일부분 조선족들은 지금의 전전촌, 대도촌,포가촌, 고산촌 등지로 떠나가기도 하였다.
김룡복 (1934년 신빈 영릉에서 출생) 노인은 할아버지 때 고향인 평안북도 운산군을 떠나 중국으로 천입하여 신빈 영릉에 정착하였다. 영릉에서 태여난 그는 세 살 때 하장당으로 이사했고 여섯살 때 또 동사르후로 이사했다. 동사르후는 지금의 영반촌 동남쪽 혼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촌에 도합 170여 호가 있었는데 그중 조선족이 40여호 살았다. 촌장은 류조산이란 한족사람이었다. 조선족들은 주로 벼농사만 지었다.아래 마을에서 수전관개수를 해결하려면 동사르후마을 부근에서 혼하의 물을 끌어 들여야 했다. 일본사람들은 조선족들을 시켜 혼하가에 보를 막고 한족들이 심어놓은 곡식을 보상도 없이 무조건 파헤치고 물도랑을 내었다.
영반촌은 원래 지금의 마을 남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물에 잠기여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일제통치시기 그가 영반조선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 모두 6개 반급이였다. 한개 반급이 한학년이였고 학생 160여 명에 교원은 6명이 있었다. 동사르후와 영반조선학교의 거리가 약 3~4키로미터 상거하였으므로 배를 타고 혼하를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농망기 때면 5학년 이상은 방학을 하고 집에서 부모들의 일손을 돕도록 하였다. 한번은 학교에서 5~6학년 학생들을 조직하여 고려영자촌에 가서 돈이 좀 있는 어느 집의 모내기를 해주기도 하였다. 영반촌에 살고 있었던 조선족 홍례호가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였으며 일본사람 앞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정생활이 부유하였다. 그는 영반 조선학교옆에 붉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1930년대 초에 그가 앞장에 나서 영반조선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한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조직해서 심양에 유람을 가게 되였는데 집이 학교와 동떨어져 있는 학생들이 새벽기차를 타러 올 수가 없었으므로 홍례호가 자기집에서 재우고 이튿날 새벽에 기차를 태워 유람을 보내였다. 동사르후촌에는 김명찬이란 조선족이 좀 괜찮게 살았는데 그의 매부가 일본 헌병대 중대장이였다. 그가 매부의 덕을 얼마나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김명찬은 후에 병으로 인해 무순에서 사망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조선족들을 다 때려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자 홍례호나 김명찬가정 등 돈이 좀 있거나 일본사람의 세력을 ale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1945년8월 중순의 어느 하루, 여름방학 기간이라 학생들이 집에서 놀다가 학교로 나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교실안에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들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가득 누워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일본군이 투항을 하고 귀국하는 길에 들려 휴식을 하던 것이였다. 선생은 소식을 보낼 터이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일본군이 떠난 뒤 학교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영반마을 거리에 “양코배기”(러시아군인)들이 욱실거렸다. 러시아군인들은 술병을 거꾸로 들어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바라기를 까먹기도 하면서 거리를 누비다가 어디론가 모두 사라졌다.광복이후 이 일대에 토비들이 기승을 부리면서 백성들의 집에 달려들어 약탈을 감행하기도 하고 해방군과 국민당이 들락날락하면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1957년 동사르후 촌의 조선족들은 모두 이석채 사방대촌으로 이민을 갔다.
고려영자 인근 마을에 조선족들이 적지 않게 모여 살았는데 동싸르후촌 외에도 서싸르후(西萨尔浒)촌에 30여호, 영반촌에 20여호, 와자화락촌에 7~8호, 그리고 이화락촌과 강남하촌에도 조선족들 20~30호씩 모여 살았다.
고려영자촌에서 살던 조선족들 가운데 김일동, 김이동, 김삼동 형제, 이학준, 이학섭 형제, 한병섭, 한병숙 형제, 그리고 서룡호, 최광길,윤서범, 김천수, 황규석, ○운환, ○운길, 조특주 등이 살고 있었다. 그중 조특주(1939년생)는 환인에서 태여나 1945년 신빈 노성으로 이주하였고 후에 고려영자촌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958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모 집단군기률검사위원회 전직위원,대좌(大校) 계급으로 승진되였으며 하북성 제8차 인민대표대회대표였다. 김삼동은 20세기 6,70년대부터 무순현 공안국에서 근무하였고 서룡호는 7,80년대 무순현 전전공사 사장으로 근무하였었다.
고려영자는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수려하다. 지금은 넓은 저수지 물속에 숨어버려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과거의 고려영자는 산 좋고 물이 맑았으며 혼하 양안에 넓은 수전이 펼쳐져 있었다. 봄이면 산나물, 가을이면 산열 매, 여름에는 물고기, 겨울에는 산짐승이 많았고 장작으로 불을 때고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참으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또한 고려영자는 천년의 역사가 깃들어 있고 민족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마을 동북쪽산기슭 포도밭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돌거북 좌대.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1권 별록에 근거하면 진주 강씨의 시조이고 고구려시기(수나라 시기)의 병마원수 강이식(兵马元帅姜以式)의 묘소가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지금의 중국 요녕성 무순현 원수림 역전)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马元帅姜公之冢)이란 큰 비석이 있어 최근 참배한 후손이 그 진상을 말하기에 추기 한다고 썼다. 지금도 마을 동북쪽 산기슭 포도밭에 돌 거북 좌대가 하나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는 돌 거북 좌대우에 "병마원수 강공지총"이라 글을 새긴 큰 비석이 있었는데 언제, 누가 없앴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년전 당태종이 이곳에 동정(东征)의 발자취를 남기였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500여년전인 1487년 조선의 지식인 최부(崔薄,1454~ 1504)가 직접 눈으로 보고 적은《표해록(漂海录)》에 “해주(海州)ㆍ요동(辽东) 등지에는 중국사람, 우리 나라사람, 여진사람이 고루 섞여있다. 석문령(石门岭)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거의 우리와 같다”라고 적혀 있다. 해주는 현재의 요녕성 해성(海城)시고 요동은 현재의 요양(辽阳)시를 말하며 석문령은 무순의 장당 동쪽, 고려영자촌의 서쪽으로 10여키로미터 떨어져 있다.즉 압록강에서 석문령 일대에는 조선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심양을 지나 서쪽으로 요양, 해성 일대에도 중국사람, 조선사람, 여진사람이 섞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나라 사람인 오조건(吴兆骞)이 이곳에 이르러 도도히 흐르는 혼하수를 마주하고 역사의 풍운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여 시 한수를 읊었는데 그중 이런 구절이 있다. “문황석일전료해, 차지고려역주병(文皇昔日战辽海,此地高丽亦驻兵).”즉 이곳에 고려도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려영자촌에서 서남방향으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저명한 싸르후전역 옛터가 있다.즉 후금 천명 4년(1619년)누르하치가 명나라 군대를 대패시킨 곳이다.
고려영자촌 남쪽에 깎아지르듯 웅장한 자태로 솟아있는 철배산 벼랑과 저수지물을 사이 두고 봉계군벌 장작림의 빈 무덤이 있다.1928년 6월 4일, 일본관동군이 조작한 심양 황고둔사건에 장작림이 폭사하게 되자 장씨 가족들은 장작림의 묘지를 만들기 위해 풍수선생을 시켜 요심지역의 명산대천을 다니며 선택하다가 최후에 고려영자촌 남쪽으로 약 1.5키로미터 상거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 능원을 지었다. 약 2년여 기간에 공사가 기본상 완공되였으나 후일 일본사람들이 청산하고 무덤을 파헤칠가 두려워 장작림의 유해를 이곳에 가져오지 않고 금현 역마방에 안장하였다.원수림이라 부르는 이곳은 지금 유람관광지로 변하였다.
《무순시지》(제9, 10권)의 기록에는 1948년4월의 어느날, 중국인민해방군 요동군구 3분구 2퇀에서 바로 이 고려영자촌을 포위하고 야간습격을 진행하였다. 그날 이 촌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국민당 청원현 청초총대 분대장 화사품을 사살하고 이 촌에 주둔했던 국민당 수정총대의 손사량 부대, 안동성 당부무 공대 등 도합 200여명을 하루밤새 소멸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이야기도 있다.
/이윤선 기자
요녕성 무순시 고려영자촌을 찾아서
요녕성 무순시에서 동쪽으로 신빈, 청원행 202국도를 따라 약 35키로미터쯤 가다 보면 원수림으로 들어가는 갈림 길목에 무순현 인민정부와 무순현 민정국에서"고려(高丽)"라고 돌에 새겨 세운 촌비가 보이는데 이 마을이 바로 고려촌이다.이 고려촌의 원래 이름은 무순현 장당진 고려영자(高丽营子)촌이었다.
고려영자촌 뻐스역. 고려란 두 글자가 뚜렸하다.
마을어귀에 무순현인민정부와 무순현민정국에서 "고려"라고 돌에 새겨 세운 촌비.
필자가 취재 길에 올라 고려영자마을 어귀에 들어서는데 맞은편에서 한족 노인 한분이 다가오기에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족노인은 성이 류씨이고 1940년에 고려영자촌에서 태여나 줄곧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먼 옛날 고려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여 고려영자라 부른다고 그가 어렸을 때 동네 노인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원래의 고려영자촌은 지금의 마을 동쪽 낮은 곳에 있었다. 1958년 대화방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마을이 침수되었고 촌민들은 정부에서 이민을 보냈다. 지금의 마을 위치에는 원래 집이 없었고 무덤뿐이었다. 1960년부터 일부분 이민을 가지 않은 사람들과 흑룡강성 안달현으로 이민을 갔던 한족들이 그 곳의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되돌아와 원래의 마을 서쪽 산언덕에 새집들을 지으면서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성기 때의 고려영자촌에는 약 600여 호가 살았다. 그중 조선족도 많이 살았고 조선족학교까지 있었다. 지금은 이 촌에 약 300여 호가 거주하는데 조선족으로는 한족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박씨(60여세) 안노인 1명뿐이다.
김은산(1932년 신빈에서 출생) 노인은 증조할아버지 때 평안북도 구성에서 고향땅을 등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와 신빈에 정착하였다. 그는 한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무순의 고려영자로 이사를 왔다. 그때 그의 가정 식솔은 증조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1940년대 고려영자촌에는 조선족이 60여호 거주하고 있었다. 한족사람 몇 집이 기와집에서 사는 이외 모두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의 가정은 한족사람의 초가집을 세내고 살았다.
일제통치시기 나이가 약 50여세 되 보이는 장봉환이란 조선족이 고려영자 촌의 구장직을 맡고 일본사람의 앞잡이노릇을 하면서 촌민들한테서 공출을 받아 가군하였다.
공출이란 일제가 저들의 침략전쟁에 충당하기 위해서 백성들로부터 양곡을 비롯한 군수용 농산물과 기타 물자들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약탈 행위였다. 공출임무를 제때에 완수하면 일본사람이 구장에게 상금을 주군 하였다. 장봉환은 조선족촌민들의 어려운 생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출을 받아 내여 일본사람에게 바치는 한편 자기의 사리를 채우군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장봉환은 조선으로 갔는데 지금 그의 자녀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
올 여름 그의 아들이 자기 부모들이 살았던 고장이라면서 한국에서 제물을 차려들고 조부의 묘소를 찾아보려고 고려영자촌에 찾아왔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묘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여 원래의 마을위치에서 서북쪽 어느 산에 묻혀있다는 말에 북방향으로 제사만 지내고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1945년"8·15" 광복후인 어느날, 그는 집에서 키우던 소를 한 마리 팔았는데 그날 밤으로 도둑이 들어 소 판 돈을 내 놓으라고 손찌검하며 을러대었다. 그의 할머니가 도둑에게 달려들면서 돈을 내놓지 않자 도둑들은 할 수가 없었던지 할머니를 사정없이 구타만하고는 가버렸다. 그날 밤에 이 마을에는 두 집에 도둑이 들었다.
1930년대 초 고려영자촌에 이미 개인서당이 있었는데 나이가 40여세 된 훈장이 5-6명의 조선족 아이들을 모아 놓고 천자문을 가르쳤다. 그도 어려서 이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배웠다.1939년에 그는 영반(营盘)조선학교에 입학하여 6년을 공부하였는데 방인호 선생이 담임교원이었다. 그 후 무순 한국인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광복을 맞았고 심양 조선중학교에서 초중을 졸업한 후 집에 돌아와 1년동안 농사를 지었다. 1949년 새 중국이 건립된 후 고려영자와 동싸르후 (东萨尔浒)에 조선족학교를 세웠다. 1951년 교육 사업에 참가한 그는 고려영자 조선학교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상급의 발령을 받고 동싸르후 조선족학교와 포가조선학교에서, 1960년부터는 회원향 흥안조선족학교 교도 주임으로, 1964년에는 전전공사 교육판공실로 전근되여 근무하였다.1980년에 다시 포가 조선족소학교로 전근되여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다. 해방초기에 교원들의 전근이 빈번하였다.
리장산(1933년 신빈에서 출생)노인은 어려서 흥경, 능계(지금의 신빈,영릉)에서 살다가 1940년에 부모들을 따라 고려영자촌으로 이사하였다. 그때 그의 가정 식솔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넷이였다. 그의 부모들은 평안북도 선천군 구산면이 고향인데 언제 중국으로 이사했는지는 모르고 있다. 일제통치시기 고려영자촌앞에는 혼하가 유유히 흘렀고 혼하 양안은 넓은 수전이였는데 고려영자 동쪽인 이화락촌과 와자화락촌 남쪽 산 밑의 혼하가에 보를 쌓고 혼하의 물을 끌어들여 관개수를 해결하였다. 지금은 옛 마을앞에 동서로 곧게 뻗어 있는 구철로 흔적 이외 기타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9세 때 영반 조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처음 학교에 가니 조선어를 배워주기에 재미있게 공부를 하였는데 약 1년이 지난 후 일제의 노화교육이 시작되면서 조선어문 이외에는 몽땅 일본어 교과서로 바뀌였으며 일본말만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는 일본어 교과서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일본어를 안 배우겠다고 배짱을 부리는 통에 그는 선생한테 구박을 받고 벌도 많이 받았다. 하여 그는 억지로 4학년까지 다니다가 광복이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그는 마을에서 꾸리는 야학에 가끔씩 나가 천자문을 배웠다. 약 한해가 지나 그는 남잡목 조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년쯤 공부하다가 1950년 18세의 나이로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쟁터로 나갔다. 지원군 경비대에 배치되여 복무하던 와중 포탄의 파편에 맞아 부상당하여 1953년에 제대하였다.
1958년 대화방 저수지가 건설되자 고려영자촌은 저수지 물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정부에서는 조선족들을 지금의 무순 경제개발구 동대(东台)촌으로 집단이민 시키고 일부분 조선족들은 지금의 전전촌, 대도촌,포가촌, 고산촌 등지로 떠나가기도 하였다.
김룡복 (1934년 신빈 영릉에서 출생) 노인은 할아버지 때 고향인 평안북도 운산군을 떠나 중국으로 천입하여 신빈 영릉에 정착하였다. 영릉에서 태여난 그는 세 살 때 하장당으로 이사했고 여섯살 때 또 동사르후로 이사했다. 동사르후는 지금의 영반촌 동남쪽 혼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촌에 도합 170여 호가 있었는데 그중 조선족이 40여호 살았다. 촌장은 류조산이란 한족사람이었다. 조선족들은 주로 벼농사만 지었다.아래 마을에서 수전관개수를 해결하려면 동사르후마을 부근에서 혼하의 물을 끌어 들여야 했다. 일본사람들은 조선족들을 시켜 혼하가에 보를 막고 한족들이 심어놓은 곡식을 보상도 없이 무조건 파헤치고 물도랑을 내었다.
영반촌은 원래 지금의 마을 남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물에 잠기여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일제통치시기 그가 영반조선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 모두 6개 반급이였다. 한개 반급이 한학년이였고 학생 160여 명에 교원은 6명이 있었다. 동사르후와 영반조선학교의 거리가 약 3~4키로미터 상거하였으므로 배를 타고 혼하를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농망기 때면 5학년 이상은 방학을 하고 집에서 부모들의 일손을 돕도록 하였다. 한번은 학교에서 5~6학년 학생들을 조직하여 고려영자촌에 가서 돈이 좀 있는 어느 집의 모내기를 해주기도 하였다. 영반촌에 살고 있었던 조선족 홍례호가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였으며 일본사람 앞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정생활이 부유하였다. 그는 영반 조선학교옆에 붉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1930년대 초에 그가 앞장에 나서 영반조선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한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조직해서 심양에 유람을 가게 되였는데 집이 학교와 동떨어져 있는 학생들이 새벽기차를 타러 올 수가 없었으므로 홍례호가 자기집에서 재우고 이튿날 새벽에 기차를 태워 유람을 보내였다. 동사르후촌에는 김명찬이란 조선족이 좀 괜찮게 살았는데 그의 매부가 일본 헌병대 중대장이였다. 그가 매부의 덕을 얼마나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김명찬은 후에 병으로 인해 무순에서 사망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조선족들을 다 때려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자 홍례호나 김명찬가정 등 돈이 좀 있거나 일본사람의 세력을 ale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1945년8월 중순의 어느 하루, 여름방학 기간이라 학생들이 집에서 놀다가 학교로 나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교실안에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들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가득 누워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일본군이 투항을 하고 귀국하는 길에 들려 휴식을 하던 것이였다. 선생은 소식을 보낼 터이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일본군이 떠난 뒤 학교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영반마을 거리에 “양코배기”(러시아군인)들이 욱실거렸다. 러시아군인들은 술병을 거꾸로 들어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바라기를 까먹기도 하면서 거리를 누비다가 어디론가 모두 사라졌다.광복이후 이 일대에 토비들이 기승을 부리면서 백성들의 집에 달려들어 약탈을 감행하기도 하고 해방군과 국민당이 들락날락하면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1957년 동사르후 촌의 조선족들은 모두 이석채 사방대촌으로 이민을 갔다.
고려영자 인근 마을에 조선족들이 적지 않게 모여 살았는데 동싸르후촌 외에도 서싸르후(西萨尔浒)촌에 30여호, 영반촌에 20여호, 와자화락촌에 7~8호, 그리고 이화락촌과 강남하촌에도 조선족들 20~30호씩 모여 살았다.
고려영자촌에서 살던 조선족들 가운데 김일동, 김이동, 김삼동 형제, 이학준, 이학섭 형제, 한병섭, 한병숙 형제, 그리고 서룡호, 최광길,윤서범, 김천수, 황규석, ○운환, ○운길, 조특주 등이 살고 있었다. 그중 조특주(1939년생)는 환인에서 태여나 1945년 신빈 노성으로 이주하였고 후에 고려영자촌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1958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모 집단군기률검사위원회 전직위원,대좌(大校) 계급으로 승진되였으며 하북성 제8차 인민대표대회대표였다. 김삼동은 20세기 6,70년대부터 무순현 공안국에서 근무하였고 서룡호는 7,80년대 무순현 전전공사 사장으로 근무하였었다.
고려영자는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수려하다. 지금은 넓은 저수지 물속에 숨어버려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과거의 고려영자는 산 좋고 물이 맑았으며 혼하 양안에 넓은 수전이 펼쳐져 있었다. 봄이면 산나물, 가을이면 산열 매, 여름에는 물고기, 겨울에는 산짐승이 많았고 장작으로 불을 때고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참으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또한 고려영자는 천년의 역사가 깃들어 있고 민족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마을 동북쪽산기슭 포도밭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돌거북 좌대.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1권 별록에 근거하면 진주 강씨의 시조이고 고구려시기(수나라 시기)의 병마원수 강이식(兵马元帅姜以式)의 묘소가 고구려 심양현 원수림(지금의 중국 요녕성 무순현 원수림 역전)에 “병마원수 강공지총”(兵马元帅姜公之冢)이란 큰 비석이 있어 최근 참배한 후손이 그 진상을 말하기에 추기 한다고 썼다. 지금도 마을 동북쪽 산기슭 포도밭에 돌 거북 좌대가 하나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는 돌 거북 좌대우에 "병마원수 강공지총"이라 글을 새긴 큰 비석이 있었는데 언제, 누가 없앴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년전 당태종이 이곳에 동정(东征)의 발자취를 남기였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500여년전인 1487년 조선의 지식인 최부(崔薄,1454~ 1504)가 직접 눈으로 보고 적은《표해록(漂海录)》에 “해주(海州)ㆍ요동(辽东) 등지에는 중국사람, 우리 나라사람, 여진사람이 고루 섞여있다. 석문령(石门岭)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거의 우리와 같다”라고 적혀 있다. 해주는 현재의 요녕성 해성(海城)시고 요동은 현재의 요양(辽阳)시를 말하며 석문령은 무순의 장당 동쪽, 고려영자촌의 서쪽으로 10여키로미터 떨어져 있다.즉 압록강에서 석문령 일대에는 조선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심양을 지나 서쪽으로 요양, 해성 일대에도 중국사람, 조선사람, 여진사람이 섞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나라 사람인 오조건(吴兆骞)이 이곳에 이르러 도도히 흐르는 혼하수를 마주하고 역사의 풍운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여 시 한수를 읊었는데 그중 이런 구절이 있다. “문황석일전료해, 차지고려역주병(文皇昔日战辽海,此地高丽亦驻兵).”즉 이곳에 고려도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려영자촌에서 서남방향으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저명한 싸르후전역 옛터가 있다.즉 후금 천명 4년(1619년)누르하치가 명나라 군대를 대패시킨 곳이다.
고려영자촌 남쪽에 깎아지르듯 웅장한 자태로 솟아있는 철배산 벼랑과 저수지물을 사이 두고 봉계군벌 장작림의 빈 무덤이 있다.1928년 6월 4일, 일본관동군이 조작한 심양 황고둔사건에 장작림이 폭사하게 되자 장씨 가족들은 장작림의 묘지를 만들기 위해 풍수선생을 시켜 요심지역의 명산대천을 다니며 선택하다가 최후에 고려영자촌 남쪽으로 약 1.5키로미터 상거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 능원을 지었다. 약 2년여 기간에 공사가 기본상 완공되였으나 후일 일본사람들이 청산하고 무덤을 파헤칠가 두려워 장작림의 유해를 이곳에 가져오지 않고 금현 역마방에 안장하였다.원수림이라 부르는 이곳은 지금 유람관광지로 변하였다.
《무순시지》(제9, 10권)의 기록에는 1948년4월의 어느날, 중국인민해방군 요동군구 3분구 2퇀에서 바로 이 고려영자촌을 포위하고 야간습격을 진행하였다. 그날 이 촌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국민당 청원현 청초총대 분대장 화사품을 사살하고 이 촌에 주둔했던 국민당 수정총대의 손사량 부대, 안동성 당부무 공대 등 도합 200여명을 하루밤새 소멸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이야기도 있다.
/이윤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