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영웅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 장보고 (張寳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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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5-13 02:01|본문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 장보고 (張寳高)
원래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전해지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張)이라는 성과 보고(保臯)라는 이름은 당나라로 건너간 뒤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長寶高’ 혹은 ‘張寳高’로 되어 있다.
친구인 정년(鄭年)과 함께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냈으며, 장보고와 정년은 용맹하고 씩씩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이들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828년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에게 당나라의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하여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오늘날의 완도인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했다.
왕이 허락하자 1만 명의 병사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대사(大使)로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교관선(交關船)을 보내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을 보내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에 신라에서는 왕의 사촌인 김균정(金均貞)과 조카인 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김균정이 살해되고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金祐徵, 뒷날의 신무왕)은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838년 상대등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민애왕, 재위838~839), 김양(金陽) 등이 병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김우징을 찾아와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839년 장보고는 김우징, 김양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공으로 장보고는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임명되었으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이 즉위한 뒤 장보고는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임명되었다.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왕비로 보내려 했으나 중앙의 귀족들이 섬사람[海島人]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장보고는 청해진에 웅거하여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846년(문성왕 8) 문성왕은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에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삼국유사》에는 신무왕이 자신을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장보고에게 약속했고, 이를 어기자 장보고가 왕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일본의 《쇼쿠니혼코우키(續日本後紀)》에는 842년 정월에 신라사람 이소정(李少貞) 등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장보고가 죽고 그의 부장인 이창진(李昌珍)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를 토벌했다는 사실을 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장보고가 죽은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죽은 연대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