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트렌드 다민족 국가대표 / 평창 올림픽 출전 145명 선수 중 귀화 선수 19명.. 전체 13% 달해 / 아이스하키·바이애슬론 성과 기대 / 제정러시아 시기 우리 조상도 이민 / 스탈린의 강제 이주 등 고난 불구 / 특유 근면·성실로 새 터전서 활약 / 다문화, 사회 융합·발전에 순영향 / 이해·소통으로 밝은 미래 견인해야
평창 동계 올림픽 관련 뉴스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미 프로 스포츠에서 외국인 선수들을 많이 봐 왔지만,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다른 피부색의 국가대표를 바라보는 시선은 또 새롭다.
평창 올림픽에서 다문화 국가대표들의 경기 모습에 환호와 응원을 보낼 것이며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뜨거운 감동을 느낄 것이다. 물론 한국 스포츠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도 마련될 것이다.
2016년을 기준으로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약 176만명으로 총 인구의 3.4%를 차지한다.
전라남도 인구에 육박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집에 와서 외국인 친구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이미 다문화사회로 변화된 한국의 일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우리’에 속하지 못하는 남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아직도 존재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사회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이후 본격적으로 실시된 정부의 각종 다문화 정책도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186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에는 상당수 조선 농민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당시는 이주나 귀화가 어려웠는데, 쇄국정책을 펼친 조선은 조국을 버리는 백성에게 사형에 처했다. 사진은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조선인 마을.
평창 동계 올림픽 총 15종목에 145명의 선수가 출전하는데 이 중 귀화 선수가 7종목 19명, 전체의 13%에 이른다.
남자 아이스하키 팀의 경우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7명의 선수가 활약하며,
바이애슬론의 경우 3명의 러시아 출신 귀화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외국인 지도자들까지 합하면 이번 동계 올림픽 기간 동안 태극기를 단 외국인과 다양한 피부색의 국가대표들이 소개될 것이다.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 조선 학교를 방문한 대주교.
빙상 종목에만 쏠렸던 관심이 여러 종목으로 분산되어 동계 스포츠의 비약적인 발전의 기회가 될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종목은 한국 사람들에게 그 이름부터 낯설다. 단어의 뜻 그대로 두 개의 종목,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합쳐진 종목이다.
사냥 또는 군사적 목적으로 스키와 사격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1960년 동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 특성상 북유럽과 러시아 출신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부터 한국에 귀화한 러시아 출신 바이애슬론 선수들이 보여줄 올림픽 성적은 큰 관심을 모으게 될 것이다.
설상 스포츠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동계 올림픽 바이애슬론 국가대표의 활약이 앞으로 한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흥미롭다.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러시아 쇼트트랙 선수 빅토르안(안현수)이 그렇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빅토르안은 러시아 대표로 금메달 3개를 거머쥐었다.
러시아는 열광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 출신의 한국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랍신은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빅토르안이 러시아를 흥분시켰듯이 바이애슬론 경기장에서 한국인들을 흥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빅토르안의 눈부신 활약으로 러시아에서는 관심도 없던 쇼트트랙이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
한국계 미식축구 선수인 하인즈 워드 또한 미국에서의 전적이 대단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스포츠계의 반응도 뜨거웠지만 하인즈 워드의 행보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 수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 슈팅 레인지에서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귀화 선수 티모페이 랍신.
연합뉴스
지금은 개인의 능력과 목적에 따라 이주 또는 귀화를 결정하지만 옛날에는 이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근대 한국의 이주 역사를 살펴보면 가슴 아픈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특히 연해주 지역이 그렇다.
19세기 말 제정러시아는 아이훈조약, 베이징조약을 통해 극동 지역에 진출해 조선과 국경을 맞댄다.
당시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에는 백성들이 조국을 버릴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제정러시아 국경 초소의 지휘관이었던 랴자노프는 1865년 7월 4일 작성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제 밤 9시, 10명의 조선인이 찾아왔는데 그중에 이주를 요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척 5명이 붙잡혀 있고, 3일 후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울면서 하소연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의 이주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흉년과 기근, 그리고 만연한 조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이들을 연해주로 내몰았다.
마침 동진 정책과 극동지역 개발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정러시아 또한 이주 행렬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우리는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광활한 황야에 사람들로 들끓도록 하라.”
1869년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수천명의 조선 농민들이 이주해 갔다.
이렇게 많은 숫자가 이주해 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정러시아 지방관리는 되돌아갈 것을 명령하며 이 과정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도록 조선 관리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당시 연해주에는 비축된 식량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라도 내쫓겠다는 협박을 하기는 했지만 조선 농민들이 완강하게 강제송환을 반대했다.
제정러시아는 결국 조선 이주민들에게는 음식과 종자, 농기구, 가축 등을 제공하고 러시아에 남도록 허락했다. 이주민의 숫자는 점점 더 증가했다.
오른쪽은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에서 대회를 준비 중인 귀화 선수 예카테리나 아바쿠모바.
연합뉴스
1881년 황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3세는 극동지역의 정치·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방 조직의 개편 및 적극적인 정책들을 단행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연해주 개발에 나선다.
러시아 서부 지역과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로 주민들을 끌어들인 결과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여 1905년에는 40만명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정러시아는 조선이나 중국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발생할 소지를 없애기 위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여 법적으로 안정된 기반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조선 사람들은 분배 받은 토지를 목장이나 초지로 사용하지 않고, 모두 개간하여 농사짓는 데 사용했다 점이다.
처녀지 개간에 뛰어든 한국인의 근면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해주의 고위 관리였던 나세킨은 “이들이 조선으로 떠나게 되면 분명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극동지역은 수백명의 근면한 거주민을 잃게 되는 것이다.
세금까지 정확히 내고 있는데 이들의 존재가 극동지역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오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한인들이 떠난다면 그 자리에 수백명의 떠돌이들만 남게 될 것이다.
” 또한 19세기 말 영국의 여행가 비숍은 조선을 여행하며 비참한 모습들을 많이 목격했지만 연해주의 한인 마을을 방문한 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연해주에서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농장주 계급으로서 번영하고 있었으며 이들에게서 근면 성실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1937년 소련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고난의 세월을 겪는다.
아무런 시설도 완비되지 않은 시베리아 열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고, 중앙아시아의 열악한 환경에서 다시 처음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민족의 도움, 그리고 한국인 고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안정을 되찾고, 지역사회의 발전에 공헌한다.
필자가 카자흐스탄에 잠깐 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좋은 날 축하와 감사의 자리에 한국 음식인 잡채가 빠지면 잔치 음식이 아니라고 했다.
잡채처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국가의 어엿한 국민으로서 자신의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주의 배경과 과정이 복잡하고 순탄치 않지만 여전히 상호 이해와 소통을 바탕으로 한 다문화의 힘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개발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한국의 다문화사회는 밝은 미래를 담보해 줄 것이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단 외국인 국가대표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이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