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 렬사(전우)들의 유골 이름 찾아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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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3-31 10:07|본문
60년전 길림해방전투서 희생된 12명 렬사(전우)들의 유골 이름 찾아 14년
림남석 리규택 로인 오늘도 11명 무명렬사들의 이름 찾는다
60년전인 1947년 11월 7일 길림시를 해방하는 제1차 외곽전투에서 12명 조선족전사들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60년후인 2007년 11월 7일에 그 전역에서 요행 살아남은 렬사들의 전우 림남석(83세)과 리규택(80세)은 렬사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길림시 풍만구 가룡원렬사릉원에 또다시 찾아와 12명 영령들을 추모하였다.
《60년전의 오늘 희생된 12명 조선족전사들은 모두가 17, 18세부터 20세의 피끓는 청춘들이였다. 그중 11명 렬사들의 이름을 모르는것이 제일 가슴아픈 일이다. 렬사들의 이름마저 밝혀놓지 못하고 죽으면 우리는 눈을 감을수 없다!》 두 로인은 목메여 울었다.
《조선족련》
올해 83세 고령인 림남석은 화전시 팔도하자진 맹가툰의 농민출신으로서 1945년 12월 팔로군에 입대하여 제4야전군 제10종대 29사 85퇀 3영 9련에서 련장으로 있었다. 당시 9련은 모두 조선족전사들로 무어져 형제부대에서는 9련을 두고 《조선족련》이라고 불렀다. 3영 영장은 《장정간부》로서 한족이였고 영 지도원은 조선족인 까닭으로 이르는 곳마다 조선족청년들에게 선전동원하여 참군하도록 하다보니 3영 역시 90% 이상이 유수, 서란, 반석, 화전, 연길, 오상 일대에서 참군한 조선족청년들이였다.
올해 80세 고령인 리규택은 18살이던 1946년 1월에 길림시 룡담구 강밀봉진 왕마구촌(원 영길현 강밀봉향임)에서 참군하여 퇀정치처 조직간사로 있었다. 1947년초 그는 서란일대 전투에서 왼쪽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부대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긴급이동을 하게 되였다. 림남석은 리규택을 잘 은페시키고 전사들과 함께 산을 넘어가 담가를 구해다가 한시간 후에야 리규택을 구원하여 부대로 돌아왔다.
리규택은 그때를 회고하며 《그때 림남석과 전우들의 구원이 없었다면 나는 얼어죽었을것이다》며 감개무량해 했다.
경천산의 혈전
1947년 11월초. 국민당군이 길림시주변에 설치한 거점을 함락하기 위해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 사령원 량흥초는 길림시안의 국민당군대와 풍만일대 국민당군대와의 교통련락을 차단하는 전투임무를 29사 85퇀(퇀장 려원)에 맡겼다. 85퇀에서는 지금의 풍만구 강남향 대장툰, 영경, 포태산 일선에 매복하였다.
11월 6일, 길림시를 해방하는 첫 외곽전이 여기에서 시작되였다. 당시 국민당군대의 60호 또치까가 대장툰 경천산마루에 설치되여 있었다. 주공임무를 맡은 9련에서는 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60호 또치까를 끝내 점령하였다.
이튿날 9련 전사들이 부상병들을 호송하여 대장툰부근의 송화강변에 이르러 휴식정비하고있는데 오후 3시경 적군이 삼면으로 포위하여 강변으로 습격하였다. 9련의 140명 전사들중 부상자들이 많다보니 남은 100명 좌우가 전투에 뛰여들었다. 적들과 불과 20~30메터 사이라 처음엔 쌍방에서 서로 수류탄을 던지며 불질하다가 마감엔 육박전이 붙었다. 용감무쌍한 9련 전사들은 한사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련장 림남석은 오른쪽 팔에 부상을 입고 왼쪽 다리가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3소대 소대장 리충걸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하도록 명하고는 정신을 잃었다. 림남석은 통신원의 등에 엎혀 구원되였다. 리규택의 회억에 의하면 9련 전사들은 부근의 작은 산마루를 점령하고 계속하여 적들과 싸웠다.
이때 형제부대의 지원으로 결국 적들을 소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련장 림남석외 퇀정치처 조직간사 리규택도 중상을 입었으며 련지도원, 3소대 리충걸소대장, 문화교원 등 12명 조선족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특수한 전쟁환경에서 림남석과 리규택은 리충걸소대장의 이름외 11명 렬사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있다. 그들이 연변 로투구, 명월구에서 참군한 조선족청년들이라는것만은 기억하고있다.
지방병원에서 부상치료를 받은후 림남석은 기포련지도원으로 흑산주격전, 평진전역, 도강전역, 상서토비섬멸전에까지 참가하였다. 1950년 그는 또 첫번째로 항미원조에 나갔으며 정전후 6급 불구자로 확정받고 무순탄광에서 사업하였다.
리규택의 종군경력도 림남석과 비슷하였다. 그 역시 1953년 조선에서 귀국한 후 6급 불구자로 확정받고 선후로 영길현법원, 길림시42중에서 심판장, 일어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정년리직하였다. 1993년에 정년리직한 림남석은 전우들과 련락하며 렬사들의 유골을 찾는데 일체 정력을 몰부었다. 당년의 길림시 해방전쟁 유적지를 여러 번 찾아다니던 림남석과 리규택은 1998년 5월에 풍만구정부의 도움으로 렬사들의 유골을 찾아내여 가룡원 렬사릉원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이 곳에 안장한 12명 조선족렬사들중 11명 렬사들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후 두 로인은 해마다 청명절이면 렬사릉원을 찾아 《전우》들을 만나보았다. 전우들이 희생 60주년을 맞는 올 11월 7일에도 림남석은 무순에서, 리규택은 길림시 강북에서 《전우》들을 찾아와 추모제사를 지내며 오늘까지 《전우》들의 이름을 모르고 지내는게 부끄럽고도 유감스럽다면서 눈물을 비오듯 했다.
연변이나 산재지역에 유가족이거나 아직 살아있는 전우들이 있으면 련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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