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명의 장군을 배출한 회룡봉촌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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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3-25 13:12|본문
오지마을에는 그 혼이 살아있다
11명의 장군을 배출한 회룡봉촌을 찾아서
회룡봉의 명물을 꼽으라면 백년된 고택, 여기저기에 산재한 늪과 못, 방죽 그리고 렬사기념비와 페교된 학교빈터다. 귀뚜라미만 처량하게 우는 빈터를 명물로 대접하고 추켜세우기에는 역부족인것 같지만 1913년에 세웠다는 학교가 그 전신이라면 연변에서도 가장 일찍 세운 학교반렬에 당당하게 오를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학교는 회룡봉의 령혼을 키운 학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11명의 장군을 배출하고 106명의 대학생과 53명의 중등전문학교학생, 29명의 항일렬사와 16명의 항일투사, 32명의 해방전쟁과 항미원조 렬사, 87명의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 참가자, 60명의 인민해방군, 62명의 인재를 배출한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학교에서 장군, 장령, 교수, 박사, 법관, 공정사, 예술가들이 태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룡봉촌을 항일촌, 혁명촌, 인재촌으로 기꺼이 부른다. 그리고 회룡봉은 연변에서 유일하게 촌사를 책으로 기록하고있는곳이기도 하다.
회룡봉은 두만강의 억겁의 세월을 흐르면서 개석해놓은 분지가녁에 자리잡은 강류역의 오지마을이다. 하지만 회룡봉에는 민족자존심을 당당하게 세우고 살았던 사람들의 냄새와 력사의 전설바다가 굼실거린다. 그러니 명물은 그래도 현재를 살아가는 회룡봉사람들이다. 거기로 가자. 회령봉으로 가자.
훈춘에 있는 친구의 덕으로 취재전용차를 마련하여 회룡봉으로 가는 차에는 훈춘문화관에서 소품창작원으로 일하는 박승규(45세)가 길을 안내하고 훈춘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일하는 박초란도 함께 동승했다. 박승규씨는 회룡봉출신으로서 회룡봉에 익숙하다. 때는 바야흐로 진달래가 무르익는 계절이라 산야에서 싱그러운 봄내음이 살뜰하게 풍기련만 스피드가 빠른 승용차는 산경치에 취할 눅거리감상마저 주지 않은채 살같이 달려서 경신진에 고댔다. 왕년 같으면 한시간도 훨씬 넘게 달려야 할 거리를 포장길덕에 20분으로 단축해버렸다.
경신진소재지 마을인 이도포에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회룡봉으로 들어갈 때에는 차 뒤지부지에는 먼지가 아성을 지르면서 쫓아왔고 그것은 회룡봉의 현재의 모습같아서 기분이 서서히 다운되기 시작했다. 차는 회룡봉 촌장집에 금방 고댔고 거기에서 고택을 사진찍고 다시 로인회관에 나만 떨구고 되돌아나갈 때는 오후해가 서편으로 기울무렵이였다.
기자는 어려움도 없이 술병과 맥주따위를 찾아들고 첫 취재목표로 로인회관으로 찾아들어갔다. 로인회관에는 10여명의 로인이 모여있었다. 거기에서 기자는 유도질문같은 판에 박은 딱딱한 물음을 피하고 로인님들의 자유자재로 늘어놓는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편하게 들었다.
어른들에 의하여 《뉘엽치》라고 불리웠던 경흥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사는 회룡봉촌은 지금도 《김치를 짐치로, 찍다를 띡다로, 정갱이를 덩개이로, 좋다를 됴다로…》 발음하고있는데 마른나무를 꺾듯 원래 꺽꺽한 함경도방언에 이채를 더해주고있다.
로인들은 기자의 출현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은 기자는 취재에 서두르지 않고 로인님들과 비치볼을 치는 넉살도 선보였는데 일곱번을 쳐도 제일관문을 빠져나가지 못해서 로인님들의 웃음거리를 남겼다.
저녁이 되자 기자는 촌장집에 저녁상을 차리고 또다시 마을로인들과 마주앉았다. 로인님들의 이야기는 종횡으로 무진했다. 회룡봉촌은 훈춘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두만강이 서, 남, 동 삼면을 장난같이 완곡하게 흐르면서 남긴 말발굽형마을이다.
회룡봉은 조선말기 함경북도 경흥방면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로서 이들이 찾아들무렵에는 도룡비, 첫벌등, 중벌등, 상벌등, 헤대(로전), 사방간, 넉덕미 등 일곱개 자연촌이 어우러져서 회룡봉촌으로 통칭되였다가
1972년 로전이 행정촌으로 승격하면서 회룡봉에서 세간나고 1982년에는 로전이 다시 행정촌으로 승격하면서 회룡봉촌에서 리탈했다.
회룡봉은 조선말기 함경북도 경흥방면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로서 이들이 찾아들무렵에는 도룡비, 첫벌등, 중벌등, 상벌등, 헤대(로전), 사방간, 넉덕미 등 일곱개 자연촌이 어우러져서 회룡봉촌으로 통칭되였다가
1972년 로전이 행정촌으로 승격하면서 회룡봉에서 세간나고 1982년에는 로전이 다시 행정촌으로 승격하면서 회룡봉촌에서 리탈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이 세개 촌을 회룡봉으로 통칭하여 부르고있다. 3년전 통계에 의하면 회룡봉은 136호(벌등촌이 60호, 로전이 22호, 회룡봉 54호), 인구가 550명, 경작지가 266헥타르에 달한다.
인구에 비하면 경작지가 부족한편이다. 로인협회 리경해회장(60세, 당지부서기출신)의 소개에 의하면 회룡봉은 인구가 1000여명을 호가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에 학생이 340명에까지 달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회룡봉이 1862년에 세워졌고 지금까지 145년의 년륜을 자랑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일찍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회룡봉촌은 처음에는 도룡비라는 이름으로 태여났지만 그후 위만주국시절에 마을앞의 자그마한 둔덕같은 산이름이 회룡봉이라 하여 그 이름을 빌려서 마을이름을 대신했다.
도룡비란 두만강이 룡두산을 에돌아 흐른다는 뜻이란다. 1844년, 청조 순치원년이후 청정부는 봉금령을 내리고 두만강에서의 조선변민들의 도강을 막고 두만강연안을 봉페했다. 하지만 조선북부변민들은 가만히 강을 건너와서 농사를 지었으니 그때부터 아침에 건너와서 농사짓고 저녁에 강을 건너 집으로 간다는 말이 생겨났다. 리조시기 조선은 련속적인 재해와 기근에 허덕이고 전정, 군정, 환곡 등 3정문란에 의해 피페해졌다. 무서운 기아에 배가 허천들리듯 껄떡거리고 그 기아를 피해서 두만강을 건너와서 신개치를 터치고 밀농업을 했다.
그 시기인 1860년 《중로북경조약》에 의하여 로씨야가 연해주지역을 차지하고 연해주개발을 시도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대량이주를 허락하고 반기는 눈치를 보이자 청정부도 1881년 신사년에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변민들이 대량 이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귀화입적 치발역복이라고 야비한 절차를 편입시켜서 만족옷을 입히는 등 동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후 이민들이 급증하자 1890년부터 두만강북안의 너비 20~25킬로메터, 길이 350킬로메터 지역을 한인전간구역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에 4보 39개사를 설치하여 이주민에 대한 관변책을 정비했다. 이 시기부터 회룡봉은 번창일로를 걷기 시작했고 인가가 급증했다. 그러자 훈춘연세국에서는 정변국륙군대를 회룡봉에 파견하여 토지세, 농업세 집세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회령봉의 항쟁의 력사는 1908년 무신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회룡봉일대는 두만강이 범람하면서 벌등방천에 50여헥타르에 달하는 섬을 남겼는데 이 땅을 욕심낸 한 관리가 신개지를 일구지 못하게 하자 발끈해난 회룡봉사람들은 3년간의 항쟁을 거쳐서 끝내 그 관리를 직위에서 몰아내고 그 땅의 개척권을 차지했다.
1913년, 회룡봉에서 이 땅을 팔아서 학교를 설립하였다.회룡봉의 기는 학교를 설립하고 계몽을 시작하는 그날부터 서서히 만연되기 시작했다.
1913년, 회룡봉에서 이 땅을 팔아서 학교를 설립하였다.회룡봉의 기는 학교를 설립하고 계몽을 시작하는 그날부터 서서히 만연되기 시작했다.
회룡봉촌에서의 인재배출은 학교의 창립과 밀접하게 련계되고 민족항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여 있다. 회룡봉촌은 1913년에 경신향 제2초급소학교를 발족시키면서부터 안길의 다주사립학교, 사방분교, 벌등분교, 로전분교 등이 련이어 고고성을 올렸고 여기에서 회룡봉사람들은 계몽되면서 반일항쟁의 기치를 들었다. 일찍 1930년대부터 지하당조직이 형성되였고 항일활동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런 화려한 전적과 전설적인 력사를 가진 현재의 회룡봉촌은 화려한 촌으로 탈바꿈하지 못했다.깊은 오지에 자리해도 산나물이 귀하고 농업에서의 기둥산업이 자리잡지 못하고 알짜민족집성촌에 이제 한족들이 들어오면서 조선족들의 손에서 땅을 넘겨받고있다.
처처에 《황성옛터》가 나타나고 그 빈터에서 낮에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귀뚜라미소리를 듣는 일도 이제 신기한 일도 아니다. 벌등에는 아직도 벽돌집이 귀하다고 했다. 회룡봉촌이 왜 번신하지 못하는가는 물음에 회관에 모인 로인들은 한결같이 궁벽한 지리적인 원인을 들었고 농업특산의 전무함을 한탄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생산한 농산물은 헐값에 팔고 대처에서 사오는 생필물은 값이 나날이 올라가는 원인도 말했다.
이들의 말대로 인당 겨우 3~4무에 그치는 땅에서 부를 창출하기에는 역부족이였고 이제 이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여직껏 종사해온 농사가 사양산업이 되였다.
리경익로인(70세)은 인민공사화직전까지 회룡봉사람들은 3일동안 길에서 풍찬로숙하면서 소수레에 공량을 싣고 훈춘으로 공량바치러 간것만치 국가에 공헌이 많은 사람들이 왜 못사는지 난해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력사는 유정해도 현실은 무정하다는 말은 회룡봉에 가면 가슴이 시리도로 통감된다.
작년에 경신진정부에서 발표한 정부사업보고에 의하면 경신진의 재작년 인당 수입은 3900원이라 밝히고있다. 연변의 여타 향진의 수치와 비슷하다. 이 수치대로 추산하면 회룡봉촌의 수입도 3900원내외로 볼수 있다.
그리고 5년동안 경신진에서 총547만원을 투자하여 농촌기초시설을 건설했다고 밝히고있지만 아직까지 회룡봉촌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있는 상황이다. 내가 만난 수많은 촌민들은 출국을 유일한 부를 창출할수 있는 수단으로 알고있었고 저마다 천국의 색조같은 출국에 사활을 거는듯 진공상태에 있었다.
올해로 4년차로 부녀회장으로 일하는 엄순녀씨(30살)는 현재 실시되는 무연고 방문취업건에 희망을 걸고 여러모로 알아보는중이라면서 회룡봉촌의 정보에 어두운 점을 호소했다.
지금까지 이 촌에서는 20여명에 달하는 촌민이 출국하여 돈을 벌고있다고 했다. 로인회관에서 만난 로인들도 조건만 된다면 다 나가고싶다고 했다. 하지만 돈을 벌면 회룡봉으로 다시 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민족전통문화기반으로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우리들의 농촌은 급격한 산업화풍조에 바야흐로 사양일로에서 허덕이고있다. 하지만 이제 농부일생 무한이로세를 열창하던 농경시대는 지나가고 농촌에서의 세거를 고집하는 시기도 지나가고있다. 전통문화의 소실과 부의 창출에서 그래도 부의 창출에 손을 들어주고싶은 심경이다.하기에 농촌의 황페화에 지나친 우려를 삼가해야 한다.
로병은 죽지 않는다. 회령봉촌은 한마디로 민족의 넋과 항쟁의 혼이 살아있는 고장이다. 회룡봉도 중국의 모든 농촌처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궁페하게 변했지만 결코 선인들이 남긴 민족의 혼만은 망각하지 않고있었고 대가 끊어지지 않고있었다. 이 민족항쟁의 혼과 불굴의 넋이 부의 창출과 련대되고 접목할 때면 진정 회룡봉촌은 굴기하게 될것이고 환골탈태식을 거행하게 될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가운데서 당지부서기 겸 촌장 유광률씨(46세)만은 유일하게 촌에 남아서 회룡봉촌의 지리적인 위치와 초원현황에 근거하여 연변소를 사육하고싶다는 뜻을 밝혔다. 연변소도 좋고 출국도 권장산업이다. 부의 창출에서 출국이라는 지름길을 선택하는것은 명지한 일이다.
저녁이 되자 유광률씨네집에 혼자 남은 기자는 집앞 늪에서 울어대는 밤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설쳤다. 민족의 항쟁 혼이 살아있는 고장에서 이 혼은 분명 앞길을 밝혀주는 회룡봉사람들의 등대가 되리라…
이들에게는 처처에 널려있는 습지와 늪, 못, 방죽들이 무형, 유형 자산들이고 현재 추진중인 《3농》건설은 이들의 든든한 뒤심이 될것이다.
최국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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