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의 보람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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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7-28 09:51|본문
내 꿈은 명의가 되는것이였지만 본의 아니게 엉뚱한 길만 걸어왔고 4년동안 최선을 다해 번역회사를 운영해온, 번역의 길이였다. 그동안 나는 끝없이 밀려드는 번역일에 밤샘을 밥 먹듯 하였고 사업이니 성취감이니 하면서 딸애와 남편에게 전혀 무관심했을뿐만 아니라 도리여 숨쉴 시간도 없는 생활에 스트레스가 가득 쌓여 딸애와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남편 말대로 갱년기, 정신병 환자처럼 살고있는 와중에 우연히 무연고방취제 정보를 알게 되였다. 연고없는 우리도 한국 갈수 있다는 정책이 너무 고맙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언니, 형부를 비롯해 내가 인터넷신청을 해준 여러 사람들은 모두 추첨이 되여 2007년 말 한국에 왔다.
비자가 나오자 남편은 내가 진짜 정신병환자가 되기 전에 환경을 바꿔야 한다며 무작정 한국행을 고집했다. 그때 나는 거래하고있던 고객들이 많았기에 그들과의 업무 중단을 고려해 고민이 많았으나 결국은 사업자등록증까지 말소시키고 한국행을 결심, 목적을 분명히 했다. 보다 질 좋은 한국어번역을 위해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는 동시에 닥치는 대로 많은 인생경험을 하고 세상살이를 느껴보면서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국 와서 1년동안은 남편과 같이 회사 생산직에 종사했다.
2008년 말, 경기침체로 인해 회사일이 급기야 줄어들게 되자 나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또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 꼭 경험해 보고픈 식당일을 해보기로 했다. 식당 홀서빙은 례의와 써비스 마인드를 갖추고 갖가지 사람들을 상대하므로 한국인들의 정서와 문화에 보다 빨리 융합될수 있다는것이 내 생각이였으나 막상 하려 하니 해보지 않은 일이고 자신이 없어 너무 떨리고 두려웠다.
설겆이는 머리 수그리고 부지런히 씻기만 하면 될것 같아 면접 갔더니 사장님이 기어코 홀서빙을 하란다. 구리시 산자락에 위치한 콩나물국밥집인데 싸구려 집에 비해 인테리어가 너무 고급스럽고 화려하였다. 너무 떨려 손님들이 무서워지기까지 한다고 했더니 며칠만 하면 적응이 되니까 잘 할수 있다면서 격려해 주었다. 자신감이 없는 나를 선뜻 받아주고 믿어주시는 사장님이 좋아서 이튿날부터 당장 출근하기로 했다. 하긴 뭐 남들도 다하는 일을 나라고 못하겠냐, 이럴 때 아예 성격이나 고쳐보자 싶어 큰 마음 먹고 출근 첫날 트렁크를 질질 끌고 11시에 도착하니 엄마야, 먼 손님이 이렇게 많다냐? 내가 손을 어디에 두고 어떻게 서있었으면 좋겠는지, 허공만 바라보며 주눅이 들어 어쩔줄 몰라 하니 사장님은 우선 설겆이를 시켰다. 삽시간에 설겆이 일이 잔뜩 밀려 설겆이 전담 언니에게 자리를 내여주고 세척기에서 그릇을 빼여주는 일밖에 할수 없었다.
그러나 몇분도 되지 않아 사장님은 잘 할수 있다면서 무작정 홀로 내밀었다. 나는 우선 상치우는 일만 했는데 손님들을 향해 눈길 주기가 너무 부담스러워 손님들이 언제 가버린지도 모르고 멍하니 서있군 하여 다른 홀서빙이 일일이 알려줘야 했다. 례의빨라야 하는줄은 아는지라 손님만 들어오면 《어서 오세요》하고 기여들어가는 소리를 하는데 식사를 마치고 잠간 서 계시는 손님에게도 《어서 오세요, 몇분이세요?》하고 물을 정도로 어리버리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튿날부터는 쑥스러움이 덜해져 주문도 받긴 했으나 워낙 필지 같은것을 쓰지 않다보니 손님이 들어온 순서와 주문한 국밥 그릇수를 기억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안된다. 고참 홀서빙은 손님이 바글바글 들이닥쳐도 순서를 야무지게 기억한다. 너무 존경스럽다.
우리는 주간에만 300~400그릇, 주말에는 500~700그릇 파는데 하루 종일 뚝배기 들고 정신없이 다니다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주말에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빠서 전쟁터가 따로 없다. 손님이 많을 때는 아침 7시에 식사하면 오후 3~4시쯤에야 식사하게 되는데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는듯한 그 배고픈 아픔을 체험해보면서 여태껏 배고픔 모르고 살면서도 불만투정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란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왕초보 딱지를 떼고 당당하게 손님들 앞에 나서게 되였고 자연스럽게 웃을수 있게 되였다. 사장님과 언니들은 모두 막내, 막내 하면서 기특해하고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또다시 심한 변비가 생겼고 자다가도 《어서 오세요. 상 치워드릴게요》 하고 헛소리 치면서 벌떡벌떡 일어나 앉군 했다. 산자락에 있는 콘테이너 숙소에서 악 하고 비명도 잘 질러댔으니 불쌍한 나의 언니들이 자다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나는 처음으로 정신력으로 버틸수 없는 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석달만에 국밥집 일을 그만두었다. 아니,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쉽게 싫증을 느끼는 병이 또 발작했으리라!
지금도 초보인 나에게 기회를 주고 열심히 가르쳐주신 사장님과 언니들, 내 악몽과 헛소리 속에서도 잘 주무셔 주시고 너그럽게 웃어주신 언니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인지 모른다.
현재 나는 국밥집에 비해 체력이 적게 드는 생태찌개 집에서 큰 홀을 혼자 보고있다. 첫 한달은 새로운 분위기와 배우는 재미에 시간 가는줄 몰랐지만 또 벌써부터 지겹다고 중얼대며 싫증을 느끼는 내 병이 발작하기 직전인듯 하다. 그러나 매일매일 닥치는대로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려는 의욕에 버텨가면서 한국인의 정서에 융합되려고 노력하고있다. 이것 모두가 귀국후 계속해나갈 번역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한국생활 1년 반, 낮에 12시간 일하고 저녁엔 늦게까지 공부하면서 건강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그런지 너무 빨리 진액이 다 빠져버린 듯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이젠 푹 쉬고싶지만 그래도 앞서 말한 삶의 자세는 영원하다. 단순로동을 할지라도, 자기 신체조건에 맞는 일터에서 인간성을 갖추고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임하자! 체류기간이 다되는 날까지 한국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배우며 꿋꿋이 부지런히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