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에서 도문방향으로 옛 국도길을 따라 차를 달리는데 차창밖으로 늦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락엽이 지며 산야가 거칠어가건만 두만강반의 소나무숲은 푸르른 기상으로 더욱 완연하기만 하다.
약 40리 길을 달려 장안진룡가마을구간에 들어서자 《룡가미원》(龙家美圆)이라는 돌간판 하나가 도로변에 번듯하게 서있었다. 이곳이 바로 지난해 중국인류학민족학연구회민족관광전문위원회로부터 동북의 첫 《중국민족문화관광시범건설기지》로 지정된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 연변룡가미원이다.
선학문(仙鹤门)과 룡두선(龙头船)
간판앞으로 꺾어들어 작은 목조다리를 건느고 오른쪽으로 휘우듬히 굽어드노라니 이상하리만치 특이한 대문과 마주하게 되였다.
문틀도 없는 대문은 량어구에 어마어마한 돌기둥만 하늘높이 치솟아있고 량기둥에는 나래가 돋혀있었다. 돌기둥의 높이는 9.3메터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창립을 뜻하고있었다. 량기둥사이로는 푸르른 창공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흰구름 두둥실, 선학이 훨훨 날아예는듯했다. 문은 흔히 봉페된 공간을 뜻하나 대자연과 융합된 선학문은 마주하는이의 상상력을 무한히 동원하고있었다.
대문안으로는 하늘을 향해 건뜻 머리를 치켜든 룡두가 시야에 안겨온다. 거북선을 방불케하는 《룡두선》이 우람하게 자리잡고있었다. 《룡두선》은 문헌에 기재된 조선민족이 숭상하는 토템의 하나인 룡의 머리를 선두로 하고 민족기원을 상징하는 《곰》과 《범》을 태운채 뫼 《산》(山)자를 형상하는 큰 바위를 돛으로 올리고 먼 항행을 하고있는듯하였다.
거룩한 이 《룡두선》을 지켜보며 그 비범한 구상에 대해 다시 한번 음미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열린 미술관 그리고 백년의 정취
뒤머리를 약간 기른 어딘가 예술가적 끼가 풍기는 세련된 몸가짐의 주인장 필충극원장(71세)은 우리 일행을 반겨주며 우선 미술관쪽으로 안내를 하였다.
《중국조선족력대미술소장품전》이라는 간판을 건 미술관에는 필원장이 몸소 수집 정리한 중국조선족미술가들의 력대작품 200여점이 소장, 전시되여있었다. 워낙 연길시도시건설계획위원회의 책임자로 사업하던 필충극원장은 어린시절부터 미술에 뜻을 둔 분으로서 90년대초 조선족 수부도시인 연길시에 미술관이 없는 현실을 안타까이 여겨 《연변조선족화원》을 설립하고 이곳 룡가마을에 미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로부터 민간차원으로 조선족미술가들의 력대미술작품을 수집, 정리하였으나 《개인행위》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과 오해로 작품수집에 어려움을 겪게 되였다. 그러자 그는 연변주정부로부터 비준문건(정함1998년 275호)을 받아쥐고 조선족미술사적체계를 이루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여러 원인으로 화가들의 원작들이 분실되거나 훼손되여 단층이 생기게 되자 그는 원로미술가들을 모시고 원작모사에 달라붙었다. 조선족 제1대 대표적 화가이며 중국미술협회 유일한 조선족리사였던 석희만선생의 50년대 대표작 《로인독보조》(1953년)를 모사하기 위해 림종에 이른 석희만선생을 휠체어에 모시고 미리 구도를 뜬 화판을 가슴앞에 받쳐놓으며 몇번이고 졸도를 하였지만 끝끝내 작품을 마무려냈던것이다.
조선전쟁이라는 이 세계사적, 민족사적 력사사건을 독보조로인들의 굳어진 표정으로 영원히 정착해놓은 이 작품은 석희만화백께서 생전에 손수 원작을 모사해낸것으로서 조선족미술사에서 조선전쟁제재의 공백을 메웠던것이다.
당년 연변미술계의 유명한 리론저술가 림무웅화백도 말년에 고골두무균괴사병으로 모진 고통에 모대기면서도 필원장의 도움으로 50년대 암석을 뚫어 홍기하수로를 빼는 사회주의건설현장의 열기를 반영한 유화작품 《물》(1958년)을 필사적으로 모사해내였다. 화백은 또 아들을 옆자리에 앉혀놓고 수십년간 이불장뒤에 숨겨두었던 대표작 《밭머리씨름》이며 《봄날의 해란강》과 같은 작품들을 아낌없이 필원장의 앞에 밀어놓았다.
연원갑화가의 유족들도 조선족화가들의 작품전시관을 꾸리려는 필원장의 의지에 감동되여 농궤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고인의 유작 《친근한 사람-주덕해》,《탐구》등 작품을 고스란히 기증하였다.
당년의 정경을 새삼스레 떠올리는 필원장은 《원로화가들의 헌신적인 성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조선족미술사는 이토록 풍부하고 다채롭게 빛을 뿌릴수 있게 되였다.》며 감개무량해한다.
원로미술가들의 유작외에도 70대로부터 30대 현대미술인들의 대표작까지 빠짐없이 전시한 룡가미원은 《중국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력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전하게 집중해놓은 아직까지 한곳뿐》인 미술관이였다. 필원장은 《아무리 귀중한 문화유물일지라도 소장만 하고 전시를 하지 않으면 죽은 무덤이나 다름없다.》며 미술관문을 활짝 열어놓고있었다.
최근에는 또 조선족미술가들의 력대작품을 중심으로 126점의 대표작을 선정하여 《중국조선족력대미술소장품선집》을 출판하였다.
영원한 기억을 위한 로천조각기념관
미술관을 나서니 그옆으로 푸르른 소나무숲이 우거진 로천조각기념관이 있었다.
《저는 살길을 찾아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 조선족들에게 땅을 주고 호적을 준 모택동주석을 신처럼 받들어 모시면서 모택동주석조각기념비를 제일 먼저 세웠습니다. 》
필원장이 가리키는 기념비에는 모택동주석의 초상화와 함께 1950년 전국 제1차희곡회보공연회에서 제기한 《백화만발 추진출신》(百花万发 推陈出新)이라는 모택동문예사상이 아로새겨져있었다. 이 문예사상이야말로 문예창작일군들이 가장 생명력이 있는 작품을 창작하는 근본적인 문예방침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이 조각기념관에는 중국돈황고대벽화를 모사한 최초의 화가이며 키즐석굴을 발굴하고 연구한 고고학자, 항일에 앞장선 혁명가로서 20세기 중국의 피카소로 불린 한락연, 중국 신해혁명의 참가자이며 손중산의 절친한 벗으로서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대동세계를 수립하고 교육구국의 길을 창도한 시인 신규식, 중국 3대 음악가의 한사람이며 인민예술가로서 중국과 조선 두나라의 군가를 창작한 정률성, 불굴의 문학거장 김학철, 중국영화황제 김염 등 우리 민족 문화예술계의 위인들이 조각기념비로 우뚝우뚝 솟아계셨다.
조각기념비에는 위인들의 명예나 지위를 떠나 그들의 인적사항과 명언, 성과들만 수식없이 기록되여있다. 기념비중 정3각을 역으로 아슬아슬하게 세운 김학철문학비, 그가 쓴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위대한 명언앞에서 사람들의 발길은 자연 굳어지고 자세 또한 숙연해진다.
필원장은 《수십년간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평생을 불의에 도전하며 살아온 투사의 삶은 편안할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에 진리에 뿌리박은 그 삶은 영원히 넘어지지 않는 지평을 이룹니다.》라고 하며 문학비의 의미를 들려준다.
《우리 세대에 이분들을 기념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우리 력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것입니다. 죽기전에 내가 구상했던 모든 작품들을 꼭 완성해야겠는데…》고래희에 접어든 필원장은 저도몰래 조바심을 내비쳤다.
필원장은 자신의 20년간의 모지름에 가까운 노력과 분투, 가족의 헌신적인 지지와 지원, 사회 각계의 도움으로 오늘날까지 어렵게 버텨왔으나 지금쯤 한계를 느끼게 되는 시점에서 도문시에서는 도시건설 5개년계획으로 룡가미원의 생태문화건설을 밀고나아가게 된다면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신비를 품은 바가지섬의 전설
20년전, 필원장이 《연변조선족화원》을 꾸리고 미술가들의 창작기지를 구상하며 이곳을 찾았을 때는 나무 한대 없는 강변 자갈밭이였다.
불도저가 밤낮 없이 움직이며 남쪽강물을 에워내고 뚝을 쌓아 호수를 만들었는데 어느 한밤중에 곬물이 터지며 뚝을 밀어내고 호수를 모래자갈로 메워놓았다. 다시 기초를 다지며 폭 20메터, 길이 240메터의 뚝을 쌓고 바가지형 인공호수를 만들기에 꼬박 3년 세월이 흘렀다.
와중에 상류에서 모래공사가 벌어져 호수에서 노닐던 치어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린근 마을에서 땔나무를 한다며 람벌을 하니 수토류실이 엄중해졌다. 그걸 막자고 교섭하느라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필원장은 장안진으로, 도문시로, 연변주 해당 부서로 발이 닳게 뛰여다니며 층층이 문건을 발부받아 12헥타르되는 룡가미원의 사방 2.5킬로메터 지역의 생태환경을 지켜내는 권한을 받아냈다.
2007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의 문건으로《각급 지도간부들은 정확한 정치업적관을 확립하고 생태환경대가와 경제성장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룡가미원 관리규정 실시조치 첫 조목으로 규명하여 각급 지도간부들이 생태환경보호에 각성하도록 호소하였다.
한편 호수로 둘러싸인 바가지섬에는 적송과 흑송을 s자로 심어 음양구조를 이루고 장백산미인송 몇천그루를 심어 미원전체를 상록원으로 가꾸면서 줄곧 15년간이나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지금 이곳은 온갖 화초며 나무, 열매, 버섯들이 자라고 떠났던 물매미도 찾아들고 씨도 넣치 않은 조개며 새우, 말배까지 번식하는《무릉도원》으로 되였다. 계절 따라 철새들이 날아들며 신비한 자연회귀를 이루고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자연생태가 깃든 곳에 창작화실도, 문예리론포럼장도, 조선족백년력사를 담은 벽화실도, 민속박물관도, 생태극장도, 민속음식원도 하나둘 생겨나면서 문화생태의 완벽한 구성을 이루어가고있다.
최근 룡가미원의 바가지섬어구에는 또 이색적인 돌바가지 예술조각품이 하나 새롭게 세워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측백기둥이 량측에서 하늘을 떠받치고있다. 《쪽박 차고 살길을 찾아온 우리 민족, 강산을 담은 돌바가지, 자손만대 대박내며 영원히 흘러흐르라.》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역시 필충극원장의 걸작이였다.
미술가, 조각가, 설계사의 안목과 기량으로 모든 작품을 완성해가는 필충극원장은 자신의 창작주선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애와 존엄을 후세에 전하고 중화를 떨치며 세상을 거닐자.》(熊慈虎威传后世, 弘扬中华游五洲). 그는 《문화의 가치는 절대로 돈으로 계산할수 있는것이 아니며 꼭 사회적가치로 따져봐야 한다. 문화예술은 무조건 투자를 해야 하고 또 희생을 안받침해야 하며 거기에는 완성이란 있을수 없다》고 그 실천궁행(实践躬行)의 리유를 밝힌다.
투철한 민족의식과 력사적 책임감, 탁월한 예술재능으로 일떠세운 룡가미원의 진정한 문화함의를 읽을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이 있었다. 룡가미원 건원 10돐을 맞으며 대문가에 세운 기념비 비문에는 《룡가미원의 속셈》이 조한문으로 뚜렷하게 새겨져있었다. 그 《속셈》을 읽어내려가며 필자는 그만 이름할수 없는 감동에 눈시울을 붉히고말았다.
《한세기에 거쳐 우리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과 건설을 위해 갖은 피땀을 흘렸으며 심지어 아까운 생명까지 바쳐오면서 빛나는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피눈물로 얼굴진 투쟁의 력사속에서 그리고 미래로 향한 진실한 현실속에서 민족주체의식과 문화의식에 모박아가며 중국조선족문화권을 이뤄간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양한 민족문화의 다원공존의 시기에 전통에 뿌리박고 자연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기 몰골을 뽐내가는 영원한 문화생태존재로 남으려 함이 룡가미원의 속셈이다….》